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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름답고 귀한 모습에 [주옥(珠玉)같다]는 표현을 한다.
주옥같은 글!
[묵향] 자매님의 감동적인 글을 옮겨 놓는다.
6.25전몰군경유자녀 하면 역경과 고난을 앞세우는 게 우리 유자녀들의 자부(自負) 자부감(?)이다.
그러기에 성급하고, 때로는 저돌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소질도 어김없이 챙기곤 하는 게 우리 6.25전몰군경유자녀들의 적성이라고 하면 너무 자학적일까?
어느 형제분은 [나는 호래자식]이 아니라고 항변도 한다.
여하튼 우리 6.25전몰군경유자녀를 스스로를 주옥(珠玉)으로 자부(自負)하기는 쉽지 않다.
오래 전에 [묵향]이란 자매님의 글이 몇 번 오르다가 끊겼다.
그분의 천성이었는지?
아니면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들이 다듬어 주신 소양(素養)의 흔적인지?
더할 수 없이 소박하게 영근 심성이 부럽기만 한 분이다.
카페를 두고 내 노라느니, 못 내놓겠다느니, 어수선한 참에 -
누가 관리를 하면 어떻겠는가?
이 카페가 내동댕이쳐지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이 주옥같은 글들이 지켜지기만을 빌어, 글을 옮겨 놓는다.
아래 마중물님의 댓글을 곁들이면서-
마중물 09.06.02. 10:33
묵향님! 글이 절절하게 와 닫는군요. 자작 글 코너에 시나 산문 등 글을 20편 이상 올려 주시면 별도 묵향의 메뉴(코너)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혹 나중에 묵향님의 자전적 책을 내실 때 도움이 되실 수도 있을 것이구요. 감사합니다. - yeoms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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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06. 02. 현충일에 아버지를 기리며 - 그리운 아버지(글) - 묵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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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에 아버지를 기리며| 그리운 아버지(글)
묵향 | 조회 88 |추천 0 | 2009.06.02. 00:41 http://cafe.daum.net/625warTruceline/3CYg/5
현충일에 핀 무궁화
아버지!
아버지는 누구이시기에 겨례의 등불이 되셨습니까?
아버지!
아버지는 누구이시기에 겨레위한 희생 -
그리고 민족의 어느 공적보다 빛난 값진 공을 세우셨습니까?
역사의 뒤안길에 남아 기록된 인물들은 꽃이라도 피웠지요?
아버지는 왜 그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저물어가는 석양 길을 홀로 쓸쓸이 걷다
그냥 한줌의 흙이 되려-
저-세상으로 아무런 말 없이 떠나야만 했나요?
아버지!
무심한 세월 속에 아버지가 걸어온 길 짧으셨지요.
걸어도, 걸어도, 끝 없는 -
한 많은 길이요 -
아버지의 생애는 무엇을 위함이었고 -
남은 것은 무엇이었나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의 그 높은 뜻 -
그 높은 공 -
그리고 그늘 속에 가려진 못다 한 희생 -
겨례의 가슴 속에 영원히 영원히 남아 -
길이 길이 꺼지지 않을 -
민족의 등불이 되겠지요.
아버지!
- 현충일 날 아버지를 기리며 -
댓글 5
현충일에 아버지를 기리며
마중물 09.06.02. 10:33
묵향님!! 글이 절절하게 와 닫는군요. 자작글 코너에 시나 산문 등 글을 20편 이상 올려 주시면 별도 묵향의 메뉴(코너)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혹 나중에 묵향님의 자전적 책을 내실때 도움이 되실수도 있을 것이구요...!! 감사합니다. - yeomsang -
나마스테 09.06.03. 11:22
묵향님 잘보고 느끼고 공감하면서 가겠습니다.
들국화 09.06.08. 14:54
정말마음속에 와 닿는 글 들 이군요 묵향님의 글 솜씨가 대단하군요. 종종 좋은 글 만이만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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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06. 07. 현충원을 다녀와서 - 자유게시판 - 묵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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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원을 다녀와서| 자유게시판
묵향 | 조회 53 |추천 0 | 2009.06.07. 19:25 http://cafe.daum.net/625warTruceline/3QLh/775
저는 현충원에 아버지 위패가 있는 줄도 모르고 무심히 살았고(행방불명이라 ) 2년 전에 알게 되어 참배를 시작했습니다.
유자녀 수당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작년에 현충일 날 참배를 하고 돌아가다가 전몰군경 유자녀 쉼터를 발견하고 반가워서 차 한 잔 하면서 이야기 나누다가 알게 되어 유자녀 수당을 지금 2년째 언니가 수혜를 받고 있습니다.
유자녀 말만 들어도 저는 학창시절의 학자금을 받던 생각이 났고(그때는 수치스러운 마음이었음) 모두가 같은 아픔을 갖고 있는 분들이라 마음이 편안함과 형제 같은 느낌으로 참 편안 했습니다.
까페에 등록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구요.
그동안에 유자녀 모임에서 얼마나 많은 투쟁과 희생으로 지금의 우리들이 국가로 부터 받고 있는 수당을 지급받고 있는 줄도 알았습니다.
무심히 살아온 저는 부끄럽고 할 말이 없습니다만 어제 현충원을 다녀와서 느낀 점 한 말씀 올릴까 합니다.
유자녀 모임이 둘로 나뉘어 있는 모습에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한쪽에서는 텐트그늘에서 오손 도손 식사를 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뙤약볕에서 서명운동을 펼치고 식사도 못하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착잡한 마음에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요.
국가로 상대로 싸워서 우리의 권리와 아버지의 명예를 찾으려면 한목소리로 한마음으로 해야만 큰 힘이 될 텐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무거웠습니다.
같은 유자녀인데 미수당 유자녀에게 힘을 보태어 수혜를 받을 수 있도록 우리 함께 노력을 해야 될 것 같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문제 해결에 동참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아는 게 사실 없습니다.
까페에 가입해서 조금 갈등을 겪고 있는 정도로 만 알았고, 수당 문제도 못 받는 사람도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한쪽에서는 일요일 셋째 주 한쪽에는 토요일 둘째 주 이렇게 모임을 하는 것도 알았구요.
형제자매 여러분!1
우리는 함께 이 모든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성숙한 유자녀 모임이 될 수 있기를 기원 해 봅니다.
댓글 3
영진 09.06.08. 09:11
안산에서는 지자체별로 충혼탑에서 현충일 추념식을 해서 동작동에는 셋째일요일에 참배를 합니다. 다 같이 같은 유자녀 입장에서 잘들 해 보자는 노력 일 것입니다. 그전에 많은 활동을 해봐서 이해는 하고 있지만 그래도 모양이 안 좋아 입 다물고 지내는 처지 입니다. 이해하시고 자주 들어와서 글을 남겨 주시도록 부탁 합니다.
나마스테 09.06.09. 10:17
묵향님 속상해하지 마셔요. 우리 모두가 다 속상하거든요.
사랑니 09.06.10. 13:15
참으로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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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1. 01. 막걸리 담그는 날에 - 나도 작가(시,수필 등) - 묵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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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담그는 날에| 나도 작가_(시,수필 등)
묵향 | 조회 15 |추천 0 | 2009.11.01. 16:57 http://cafe.daum.net/625warTruceline/3Cbf/42
언제부터 내가 직접 막걸리를 담가서 마시고 싶었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부지런히 재래시장을 다니며 누룩을 구해놓고 엿기름도 사놓았다.
수소문 하여 막걸리를 잘 담는 할머니를 찾아가 방법을 듣고 메모해 두었지만 선뜻 용기나 나지 않았다.
드디어 오늘에서야 막걸리를 담아보기로 작정을 했다.
누룩을 빻아야 하는데 동탄에 떡집에서는 빻을 수가 없다고 수원으로 나가 보라고 했다.
수원으로 달려갔지만 그 곳에서도 딱딱한 누룩은 못 빻는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부탁을 했다.
집에서는 망치질을 하면 아래층에서 달려 올까봐 현관 밖으로 들고 나갔더니, 망치로 잘게 부수어 주었다.
난 고두밥을 쪄서 누룩과 잘 섞어두었다.
항아리에 미리 준비해둔 가제로 만든 자루에 누룩과 고두밥을 넣고 엿기름 걸러서 앉힌 그 물을 항아리에 붓고, 국화꽃을 한 주먹을 넣어서 자루를 꼭 쪼매어서 랩으로 밀봉하여 뚜껑을 덮어놓았다.
나 어릴 적에 할머니와 자는 큰 방에는 일 년에 몇 번씩 막걸리 항아리가 구들 막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항아리는 이불에 둘 둘 말려서 덥혀서 있었고, 잠 잘 때는 발아래서 부딪치기도 했다.
시골에 작은방에 그 항아리가 귀찮기만 했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는 어린 나에게 막걸리가 익을 쯤 이면 항아리에 귀를 대어 보라고 하신다. 뽀글뽀글 소리가 나는지 귀를 대어보라고 하셨고 발효가 잘 되었는지 국자로 술을 떠서 어린 나에게 맛을 보라고 주시기도 했었다.
나는 얼떨결에 먹어보곤 했다.
그래서인지 막걸리는 술인데도 나에게는 정겹고 향수마저 느낀다.
결정적으로 용기를 낸 것은 흑산도 여행에서 홍어회와 직접 담근 막걸리 맛에 여운이 있어 행동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내가 담근 항아리에서 뽀글뽀글 소리가 나면 가까운 지인들을 불러 국화 향이 가득한 막걸리 파티를 할 생각을 하니까 지금 부터 행복해진다.
시월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마음이 센치해 진다.
갑자기 할머니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엄마 대신 나를 사랑으로 길러주셨기에 -
오늘 따라 잠은 오지 않고, 이 생각 저 생각으로 -
막걸리는 과연 옛날의 그 맛을 나에게 선사 할지도 궁금하고 -
이불을 뒤집어써도 잠이 오지 않아, 벌떡 일어나 냉장고에 넣어둔 와인을 한잔 들고 와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 홀짝 홀짝 마셔본다.
감미로운 맛이 입 안 가득 퍼져온다.
블로그 음악도 내 기분을 아는지 달콤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웬지 마음이 시려오고 스산한 가을밤에 외로움이 밀려온다.
와인을 마신 탓인가?
눈물이 나올 정도로 외로움이 가슴을 파고든다.
정호승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하느님도 외로워서 가끔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아침에 반석산에서 주워온 낙엽으로 작품을 하나 만들어 볼까보다.
잠 올 때까지 -
오늘밤 꿈에는 할머니를 만나고 싶다.
댓글 1
사랑니 09.11.03. 12:42
할머님의 애뜻한 손녀 사랑과 묵향님의 애절한 할머님에 대한 그리움이 눈에 선하네요.! 아마도 그윽한 국화향 막걸리는 동네 잔치상에 틀림없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것임니다.! 정성이 곧 감읍이라 했지요.! "묵향"님.! 걱정 접으시고, 할머님의 손길로 빚어지는 막걸리에 총력을 다하시고,, "와인"대신의 <막걸리 향의 제2편>을 기대 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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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2. 01. 생일 날 - 나도 작가(시,수필 등) - 묵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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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날| 나도 작가_(시,수필 등)
묵향 | 조회 18 |추천 0 | 2009.12.01. 16:59 http://cafe.daum.net/625warTruceline/3Cbf/44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이다 어떤 때는 잊고 지나칠 때도 있었고 그냥 어제나 그제나 같은 날로 보냈다.
오늘 맞은 내 생일날은 조금 다른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조금 숙연한 마음으로 -
아침에 잠이 들깬 상태에서 한통의 축하 메세지를 받고 한동안 멍^해 젔다.
"당신을 낳아 준 님 들께 먼저 감사하고, 지금의 당신을 있게 해 준 신과 가족에게 감사합니다."
생일 축하인사로 이런 글귀는 나에게는 처음이다.
그래 맞어!
그동안 잊고 살았구나!
낳아준 부모님에게도 감사할 줄 모르고 내가 잘 난 척하며 살았구나!
이불을 뒤집어쓰니 왈칵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난다.
얼굴도 제대로 기억 못하고 키워주지는 못한 부모님이지만 오늘만은 그 분들께 감사 하는 마음으로 보내야 만 내 마음이 편안 할 것 같다.
어제 식구들과 외식을 했고, 오늘 그림 공부하는 날이라 학교에서 케익과 과일로 친구들과 나누어 먹고 축하 노래까지 받았다.
집에 오니까 식탁위에 케익이 놓여있길래 아침 일찍 나간 딸내미가 사다 놓은 줄 알고 있었는데 딸이 나오더니 케익 자기가 안 샀다고 한다.
놀랠 일이다.
분명 남편이 사 놓은 거다.
아이들 생일에도 한 번도 케익 사들고 오지 않는 양반이!
오늘 정말 이상하다.
문자를 보냈다.
"고마워요. 오래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네요."
언니가 전화를 했다.
"미역국 먹었니 혹시 또 잊고 있나 해서!"
전에도 몇 번 잊고 지나칠 때가 있었는데 그 때 언니한데 넋두리를 했더니-
그 때부터 신경을 쓰고 꼭 전화를 해준다.
나에겐 소중한 단 하나뿐인 혈육이다.
언니 고마워!
저녁을 먹고 고모한테 전화를 걸었다.
"자야! 오늘 너 생일이제?"
대뜸 그러신다.
고모는 기억하고 있었구나!
목이 메어와 말을 할 수가 없다.
고모! 고마워요. 잘 키워 주셔서-
"그래 별일 없이 잘 지내지?- 왜 그래? 무슨 일 있나? 너 잘사는 거 보기 좋은데-
어릴 때 일은 잊어버리라고 하신다.
나에게 고모는 한 없이 베풀고도 더 줄게 없나하고 지금도 챙기신다.
고모는 어린 나에게 엄마 없는 티 날까 봐 다른 아이들 보다 더 예쁘고 고운 옷 입혔다.
동네 사람들이 나보고 항상 참 하다고 칭찬을 들었을 정도다.
성격이 워낙 깔끔하고 부지런하셨다.
할머니 사랑은 헌신적이고, 나에게는 특별히 절대적이였다.
할머니 가 내게 베푼 사랑을! 그래서 지금도 할머니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온다.
이 글을 쓰면서도, 이 주책없는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한다.
내가 태어난 날이기에 축하 받고, 즐거운 날인 건 분명하지만 오늘 내 생일은 나에게 감동을 주었고 잊지 못할 것 같다.
이 나이에 철들게 해주신 그 분들이 있어, 참 행복하다.
그 고마운 분들께 감사드리고 싶다.
댓글 1
사랑니 09.12.01. 19:47
이글을 대하니 부모 일찍 여읜 우리네의 삶이 진한 감동으로 뭍어납니다. 나이 들어 손주 볼 연륜이 되어도 우리네 부모님들을 생각하면, 한 여름에도 가슴이 찡하며 시려오지요. <묵향>님,, 늦었지만,, 생일부터 축하드립니다. 예로부터 내리사랑 이라 했으니, 자손들, 무탈하게,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우리의 거울로 삼아야겠읍니다. 심심한 위로의 말씀과 더불어 늘 건강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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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04. 11. 진달래 - 나도 작가(시,수필 등) - 묵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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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나도 작가_(시,수필 등)
묵향 | 조회 26 |추천 0 | 2010.04.11. 21:36 http://cafe.daum.net/625warTruceline/3Cbf/75
이 맘 때쯤이면 우리나라 산 어느 곳이나 진달래가 분홍빛으로 온 산을 물들인다.
블로그에 올라 온 게제 대금산에 진달래를 보는 순간 감탄사가 와~하고 나왔다.
정말 분홍빛 담요를 펼쳐 놓은 것 같이 아름다웠다.
진달래는 김소월 님의 시로도 유명하고 우리가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어서 무척 정겨운 꽃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꽃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외국생활을 오래한 이들이 향수병에 시달릴 때, 그렇게 진달래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서 가슴알이를 한다는 글 을 본 적이 있다.
그만큼 우리정서에는, 진달래를 빼 놓을 수 없는 친숙한 꽃이다.
시골에서 자란 나도 진달래가 피면 생각나는 추억들이 있다.
오랫동안 천식을 앓고 계시는 할아버지를 위해 할머니는 집에서, 천식에 좋다는 조약을 만들었는데 그 약의 주 재료가 진달래였던 것이다.
할머니의 부탁으로 봄이 되면 조그만 아이는 진달래를 따기 위해 산을 헤매며 자루에 가득 채웠고, 또 먹기도 하며, 즐겁게 진달래를 많이도 따서 갖다 드렸다.
할머니께서 하루 종일 부엌에서 수고를 하시고 나면 맛있는 조청이 만들어져 조그만 항아리에 담겨져 할아버지 방으로 직행한다.
침을 흘리고 기다리는 우리에게는 한 숟가락 떠서 입으로 넣어주시면 혀끝에 감도는 그 달콤한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할아버지 약이기에 감히 더 달라고 조르지는 않았지만 어린나이에 그 달콤한 맛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우리가 달라고 조르면 약은 나누어 먹으면 효력이 없다고 우리를 따돌리신 할머니.
큰 방에는 할머니 고모 언니 나 이렇게 잤는데, 방이 조금 비좁기도 했던 것 같다.
잠자기 전에 고모는 할아버지 혼자 주무시는 방에 언니나 나 둘 중에 한명을 보내는 작전을 펴신다.
꼬드기는 데는 우리 고모는 선수였다.
어떤 때는 가기 싫어서 자는척하고 있으면 고모는 나더러 가라고 이러신다.
"우리 자야는 벌써 할아버지지 방에 가고 없네!" 한다.
그러면 어쩔수 없이 베개를 안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온갖 감언이설로 꼬시는 말 중에 할아버지 방에 가면 달콤한 조청을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언니는 안가겠다고 하고 나도 가기 싫어서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담배 냄새도 싫었고, 할아버지는, 할머니 고모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도 안 해주시고, 아무튼 가기 싫었는데 어떤 때는 내가 고모와 할머니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스스로 건너 가기도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가면 무척 좋아하셨고, 달콤한 조청도 먹여주시고, 기다란 곰방대로 이불속에 있는 내 발바닥을 살살 간지럼 피우기도 하고, 장난을 곧 잘 치곤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많이 외로우셨을 것 같았는데 그때는 할머니와 함께 자고싶은 마음에 할아버지의 외로움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린애였다.
기억으로는 할아버지는 약골이시고, 농사일을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항상 방안에서 곤방대를 물고 계시고 잦은 기침을 하고 그랬다.
그래서 농사일을 할 남자가 없어서 머슴을 들였고 손녀한테는 다정다감 하셨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의 기억은 단정한 한복차림으로 남지 장날 나들이를 다녀오시고는, 따뜻한 어느 봄날 돌아가셨다.
음력으로 삼월 삼짇날에, 더 이상 하얀 한복차림으로 뒷짐 지고 마당을 거닐던 다정했던 할배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댓글 5
사랑니 10.04.11. 23:32
때 꺼리가 없어 배 골고, 힘겹던 시절, 시골 대가족 제도 틈바구니에서 집안 어르신들과 함께 오밀 조밀 부대끼며 살아야 했던 그 시절 이제 나이 들어 그 할아버님의 시대를 살아가노라면,, 옛 어르신들의 외로움이나, 정감을 알겄같음니다.! 애틋한 사연 잘 읽고 감니다.! 감사함니다.! 고맙슴니다.!
묵향 10.04.14. 09:26
미천한 글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검단동 10.04.19. 20:42
묵향님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 눈물이 납니다 우리 자매님들은 부모님의 사랑이 무언지 모르고 세상을 살다보니 저도 할머님이 정말로 그리워.........묵향님가슴에 세긴 사연 잘 읽고 쉬어갑니다
┗ 묵향 10.04.18. 17:36
감사합니다. 변변치 않는 글에 댓글 주셔셔요
한송이 10.06.03. 00:33
그 시절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이 살아갔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정 있고 사랑이 있고 서로의 배려와의 관심 양보 후한 인심 그 시절이 그리울 때도 있고 추억에 남아 마음이 평화롭게 느껴집니다.
첫댓글 빗물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 -
바로저장 단어장선택 작은 힘이라도 끈기 있게 계속하면 큰일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다까끼 마사오나 토요타 다이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