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가 좋은 아침] 왼쪽 어깨 너머의 날씨
숲 안쪽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아직 내려오지 않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비 그치면 내려오거나 비 그쳐도 내려오지 않기로 한 것이 머루를 따 먹으며 손톱이 까매지도록 앉아
바위벽을 타고 오르는 도마뱀 발톱 소리를 듣고 있을 것 같았다
어둔 굴 안에 젖은 콧등을 움찔거리는 것이 있고 안개는 사람 냄새를 맡으로 걸어 다니고
새벽 일찍 수로를 살피러 온 노인이 나무 아래를 들여다보면 안광이 빗물에 씻긴 머루알처럼 빛나는 누가 앉아 있을 것 같았다
비바람에 잎이 찢기는 소리 툭툭 열매 떨어지는 소리 들으며 밤새 웅크린 등줄기 위로 김을 올리고 앉은 것이
비는 서 있고
창문은 흐르는데
젖은 우산이 문 앞에 세워져 있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뜨거운 국물을 들이켜는 사람에게 나는 물었는데
계속 여기 있었잖아! 그는 말했고
왜 한동안 안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방금 어디 먼 곳을 다녀온 사람을 보는 듯이
그러나 아직 다 오지 않은 것을 염려하는 듯이
좀 더 먹어, 하고
나는 국물을 떠 주고 있었다
―김미령(1975∼ ), 『제너레이션』(민음사, 2025)
등 뒤가 허전할 때, “왼쪽 어깨 너머의 날씨”처럼 수상한 배후를 감지하고 더듬이가 길어질 때가 있다. 시의 화자는 이미 어두워진 숲 안쪽에서 “아직 내려오지 않은 것”을 감지한다. 그가 누구인지, 사람인지 짐승인지 죽은 이의 영혼인지 알 수 없다. 종이를 찢고 흘러내릴 것 같은 예감으로 가득할 뿐이다. 근거는 없지만 징후로 가득한 이 시는 매력적이다. 읽는 이를 홀리게 하여 어떤 기미 속에서 헤매게 만든다.
자명한 건 목소리뿐이다. 고요한 일상에 파편처럼 내려앉은, 슬픔의 징후를 찾는 목소리. 무엇도 모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알아채는 목소리. “사람 냄새를 맡으러 걸어 다니는" 안개의 축축한 움직임까지 감지하는 목소리다. 시의 후반부에는 “아직 내려오지 않은 것”일지도 모를 누군가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실체는 분명하지 않지만 기다림 속에서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 뜨거운 것을 떠먹는 것, 신기루처럼 존재하는 것이 나온다. 읽을수록 더 읽고 싶은 시가 있다. 알 것 같아서 그렇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알 것도 같아서 그렇다. 중요한 건 예감이다. 모른 채 알아채는 일이다.
✵김미령(1975∼ ) 시인은 부산 출생.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시집 『파도의 새로운 양상』『우리가 동시에 여기 있다는 소문』『제너레이션』.
+ 당신의 기억이 나에게 옮아와서/ 김미령(1975∼ )
봄이 오는 풀밭에 앉아 풍경을 보고 있으면
아기는 잘 걷는구나. 풀이 따갑구나. 나비가 꽃밭으로 아기를 유인하는구나.
들판의 모든 초록과 빛의 파장과 아기의 미래까지 두루 관장할 듯이 우리는 멀리서 바라보며 잠시나마 흐뭇하구나.
저것은 나의 기억입니까. 당신의 기억입니까.
누구나 한번쯤 저 구간을 지나도록 돼 있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했을까요. 나는 지금 어디쯤에서 저 장면을 보고 있을까요.
당신 없는 자리에 당신의 기억이 나 없는 자리에 내 기억이 앉아있고 그 기억은 우리에게 거주하지 못하고 어디를 맴도는지
우린 지금 저기서 잘하고 있는 거겠죠.
아기를 위해 귀여운 장애물도 몇 준비하고 주변에 봄꽃도 좀 뿌려 놓고
날씨가 좋아요. 기분도 좋아요.
일동 손뼉도 치면서
계속 저 자세로 웃으면 얼굴이 뻣뻣해지고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은데
최선을 다하고 있네요, 아기는 물가로 가고 있는데 무엇을 향해 환호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면서
저 사람들은 정면의 무얼 보고 있는 거냐고 뒤에서 누가 수군대는데
얼굴은 늘어지고 머리카락은 하얘져도 예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으로 풀밭에 앉아
아직 다가오지 않은 지나간 불행 앞에 축복의 기도를 던져 주면서
환한 휴일 대낮
땀과 술과 벌꿀 냄새 뒤섞인 어느 봄의 소풍날에
가족들 몇 즐겁게 놀고 있는데
당신 없는 당신 자리에 나 없는 내 자리에
오래된 기억이 혼자 풀밭에 앉아
―시집 『제너레이션』 2025.6
+ 파도의 새로운 양상/ 김미령(1975∼ )
너의 감정이 입장한다 스타디움으로
유리잔을 깨뜨리고 내 발등에 침을 뱉는다
너는 도취되었다
너는 분열되었다
우리의 절정은 이미 가라앉은 지 오래
우리의 계획은
물밑 빠른 조류를 따라 먼 북쪽으로 흘러갔다
아무것도 인정하지 못한다는 듯이
목이 쉰 팬터마임처럼 끝없이 손을 파닥이고
너는 목표를 전환했다
연보라와 보라의 인터체인지
창백한 분노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서정적인 삶*
동시에 도착할 수 없다면
해일을 예감한 갯벌레들이 인가를 덮치듯이
흰 시트들이 넘어지고
고생대 식물처럼 둥치 굵은 체념들이 차례로 쓰러진다
주체할 수 없는 이 혈통을 누가 바라보는가
수면을 핥는 바람의 혀는 수많은 기호들을 파생시킨다
새로 태어난 관점 하나가 갈라져 간다
멀리 떠밀려 간다
*에밀 시오랑(Emil Cioran, 1911-1995)루마니아 출신의 철학자, 작가.
+ 건너가는 목소리/ 김미령(1975∼ )
여기 앉아도 되겠습니까? 소프라노로 물었습니다
내 목소리에 깜짝 놀라 당신은 스푼을 떨어뜨립니다 노래하듯이 인사했을 뿐인데
누구의 호기심에도 들르지 않고 그 말은 곧장 날아갑니다
죄송합니다 가성으로 사과합니다 가성으로 웃다가 가성으로 멈춥니다
그건 첫 번째 내 목소리에 화답하는 메아리 같은 것입니다 목소리에게 가족을 찾아 주는 일입니다 들뜬 기분으로 실례하거나
춤추듯이
애도하는 것
뾰족한 발끝으로 테라스 위를 걷듯이 밥을 먹고 화장실을 다녀옵니다
목소리는 인사를 잘합니다
공손한 공기처럼
성대 안에 붉은 입술을 가진 아이처럼
입 밖으로 도르르 풀려나가는 리본이 있습니다 입속에 품고 있던 작은 새들을 풀어놓은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 한동안 끝입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한 말인가 하고 당신이 생각할 때
그것은 이미 거기에 없습니다
목소리가 목소리를 건네줍니다 장소가 드문드문 생겨나다가 사라집니다 예사롭지 않은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그것은 흔한 일입니다
귀를 잠시 겨울의 지붕 위로 데려가는 것은
―시집『파도의 새로운 양상』(2017)에서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 《동아일보 2025년 11월 01일(토),〈박연준의 토요일은 시가 좋아(시인)〉》, 《Daum, Naver 지식백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