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고대 아테나이의 민주정체를 말하면 자동적으로 중우정치를 떠올리는 인식은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인식과 깊에 관련되어 있는 제도가 바로 도편추방제다. 도편추방제와 함께 흔히 아리스티데스의 에피소드가 언급된다. 아리스티데스가 뭘 하는지도 모르지만, 하도 인기가 높다보니 짜증이 난 무식한 농부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도편에 기꺼이 써주었다는 그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무지한 이들에게 국가대사를 맡기는 민주정이 과연 좋은 정체였는지 고민이 들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들과 함께, 도편추방제는 자연스럽게 아테나이 민주주의를 중우정치와 연결시키는데 한 역할을 담당했다.
바로 이런 인식이다
그러나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이러한 몇몇 일화들을 통해서 전체를 규정하려 드는것은 상당히 조심해야 할 행위다. 고대 사서에 나오는 많은 에피소드들은 사실 검증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을뿐더러, 정말 도편추방제가 무지한 이들이 정치를 마구 뒤흔들수 있도록 하는 제도였는지, 더 나아가 그러한 제도가 기능하던 민주정은 과연 대중선동가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써먹을 수 있는 그런 정체였는지 알기 위해서는 좀더 자세히 그 제도와 그 제도의 목적 자체를 살펴봐야 한다.
역사적 맥락
물론 잘 알려져있다시피, 도편추방제는 참주의 등장을 막기 위해서 참주가 될 가능성이 있는 시민을 10년간 추방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우리의 근대적 상식으로는 이 제도가 상당히 불합리해보인다. 무엇보다도,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시민을 단지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추방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것 같다. 그리고 앞서 말한대로, 무지한 하층시민들의 인기투표로 전락하여, 정치를 뒤집어놓을 수 있고, 중우정치를 유발할 것만 같아보인다.
그러나, 모든 제도는 그 제도가 만들어지고 시행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 안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아테나이의 민주정은 참주정치와 귀족들의 세력싸움이라는 진통을 겪으면서 만들어진 제도다. 따라서 이 민주정을 운영함에 있어서 당면과제는 당연히 참주정으로 돌아가는 것과, 아테나이가 귀족들의 패싸움으로 인한 혼란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었다. 그러자면 당연히 정치 활동에 전면으로 나서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엘리트 시민들을 제어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고대 사회에서 국가와 사회를 운영할 전문지식을 갖춘 이들은 이 엘리트 시민들일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참주정과 귀족정의 기억이 생생한 상황이라 아테나이인들은 엘리트들이 국가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의 전문지식은 반드시 필요했다. 따라서 신생 민주정은, 평등이 중시되는 시민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엘리트 상층시민들의 국정운영 능력을 활용해야 하는, 상당히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이것이 도편추방제가 등장하게 된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Josiah Ober의 지적대로, 아테나이 시민들은 국가 운영을 완전히 엘리트에게 맡기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능력을 적절하게 활용하는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그에 따르면, 심지어 민주정에 과도하게 비판적이었던 플라톤의 글도 상세히 읽으면 이러한 부분이 드러난다) 그와 동시에 신생 민주주의는 이 재능있는 자들의 파벌싸움으로 국가가 내전 상태에 떨어지거나 엘리트들이 국가를 장악하는 사태도 대체로 방지할 수 있었다.
도편추방제의 운용-과연 중우정치의 상징인가?
그렇다면 과연 도편추방제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지한 대중들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권력을 마구 휘두를 수 있는 장치인지, 대중선동에 넘어가서 선동가들의 무기가 되기 쉬운 제도였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사실 지난 역사의 경험을 곱씹으면서 수많은 고민을 통해 민주정체를 만들어나간 아테나이인들이 도편추방제에 내재한 위험성을 몰랐을리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세심하게 이 제도를 제어하려 노력하였다. 실제로, 고전 아테나이 민주주의 시대 180년 동안 도편추방 투표가 열린 것은 고작 15번에 지나지 않는다. 설마 그 긴 세월동안 야심만만하고 능력있는 엘리트 정치인이 15명밖에 되지 않았겠는가?
우선 도편추방 투표 자체가 열리는게 쉽지가 않다. 도편추방 투표가 열리려면 우선 정해진 시기에(이 때에만 가능하다) 시민단이 도편추방을 할 것인지 안 할것인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여기서 시민들 절반 이상이 지금이 정말 민주정의 위기라서 도편추방으로 해결해야만 한다고 동의하지 않는한 도편추방 투표 자체가 행해질 수 없다. 만일 여기서 시민 다수가 결정한다면, 아고라에서 도편추방 투표가 열린다. 이때의 정족수는 6000명이다. 6000명의 유권자가 모이지 않으면 역시 도편추방은 행해질 수가 없다.
이런 이중삼중의 안전장치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대중선동가가 자신을 지지하는 시민들을 선동해서 도편추방으로 정적을 추방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정치에서는 별별 일이 다 일어나기 때문에 전혀 없다고 장담은 못하겠지만, 모든 정책에는 효과와 동시에 폐단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도편추방제는 상당히 오랫동안 폐단을 그런데로 잘 제어하면서 효과를 거둔 제도였다. 그리고 이후 이 제도가 조금씩 변질과 남용의 조짐을 보이자, 그에 맞춰서 제도 자체가 폐지되었다.
도편추방제의 의미
그렇다면 이런 절차를 통해서 아테나이인들이 도편추방제를 유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최근까지 여러 해석들이 나오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서로 상충되는 해석은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도편추방제가 제일 위에 설명한 민주정의 당면과제를 이루기 위한, 실질적이면서도 상징적인 견제장치였다는 사실이다.
즉, 도편추방제는 아테나이의 demos(인민)가 정치 엘리트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였다.
"당신에게 권력을 위임한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시민들이다. 그러니까 딴 생각 품지 말고 똑바로 일해라. 안 그러면 당신 정말로 한번에 훅 갈 수 있다."
실제로 투표가 행해지는 것은 드물었고, 행해지기도 힘들었지만 그 제도가 존재하는 한, 정치 엘리트들은 이 메시지를 기억할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도편추방제는 데모스가 엘리트를 제어하는 장치로 기능할 수 있었고, 아테나이 민주주의의 목적인 '데모스에 의한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가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Josiah Ober, The Rise and Fall of Classical Greece (Princeton, 2015).
Hans Beck (ed.) A Companion to Ancient Greek Government (Chichester, 2013).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아테네 민주정은 상당히 고도로 제도화된 특징들이 있어서 단순히 저평가하는 시각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추신: 북부의 왕이 되신 기분이 어떠하십니까. ㅎㅎ
감사합니다^^ 사실 그것과는 별 상관없이 제가 오래 써오던 닉네임입니다ㅎㅎ 1950년대 한 미국 뮤지컬의 등장인물에서 따왔거든요ㅎ
솔직히 좀 열등감이 느껴지네요. 저들은 일찍부터 저렇게 투쟁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지켜나가는 반면 이 쪽 동네는 개돼지마냥 순종하기만 하고, 설령 저항이 일어나더라도 그 때 그 때 진압당했으니까요
...저 고전기 끝난 이후로 그리스 보면 별로 열등감 느낄 것도 없지 말입니다.
@PRODIGAL ㅇㅇ 나중되면 민주정도 개판되고 결국엔... 스뽜르타의 분노DLC를...
@아이신기오로 '더 나은것' 같은건 없습니다. 제가 본문에도 명시했지만 모든 제도들은 근본적으로 모두가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의 산물이고, 각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맞서서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과 투쟁의 산물입니다. 여기에 우열을 가르는것 자체가 역사를 제대로 읽는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현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참여정치의 발달사에서 그리스 고전기가 차지하고 있는 한 모델로서의 역할은 상당한 것이며, 그런면에서 저들이 고대 사회의 한계 속에서 앞서 말한 고민과 노력을 통해 성취한 것까지 통으로 부정할 필요 역시 없습니다.
@아이신기오로 또 하나. 중세 봉건제를 그저 폐쇄적이고 영주들간의 세력다툼으로 이해한 시각도 현재 학계에서는 별로 통용되지 않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중세의 정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정치가 온전히 그들만의 폐쇄적인 리그는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특히 중세의 도시들과 그것을 운영한 시민자치공동체는 당대의 여러 급진 사상들의 모태였으며, 군주권과 영주권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는 견제자로서의 역할을 잘 해냈으며, 이것도 민주주의 발달사에 있어서는 시사해주는 바가 많습니다.
@아이신기오로 중세 봉건제의 정치에 대한 최근의 견해는 W. M. Ormrod의 Political Life in Medieval England, 1300-1450가 잘 소개하고 있으니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기서 별로 멀지도 않은 동네에 유학자들이 보면 까무러칠 정도로 사람들을 개돼지마냥 부리는 곳이 있을텐데
ㅅㅍㄹㅌ라고....
@아이신기오로 오히려 말씀하신 것 같은 단편적인 사례들을 들어서 '고대 민주정과 전제정이 어디가 더 나으냐' 혹은 동아시아 전통시대의 중앙집권적 국가가 더 나으냐 하는 질문이야말로 역사학에서 필수인 시대적 맥락의 고려를 제거한 질문이라 더더욱 교훈을 도출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유신헌법 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역사상의 한 사건에 대해 '이게 잘한 것이냐 잘못한 것이냐'로 판명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실제 사회와, 역사는 그런 이분법을 적용하기에 훨씬 더 복잡하다는거 잘 아실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의 정치체제를 놓고도 단순히 '이게 더 낫다 아니다'를
@아이신기오로 판단하기 이전에, 그것이 어떤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 나오게 되었는가, 다른 대안은 없었는가, 그 시대의 사람들은 왜 그것을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이루고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복합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민을 통해 역사를 해석한다면 오히려 현대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유의미한 교훈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호시노 에키 스파르타에 대해 그렇게 자신있게 말씀하실 수 있을런지요. 고대 스파르타의 체제는 사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인해 전문 학자들도 '어느 하나도 자신있게 결론 내릴 수 있는게 없다'라고 할 정도로 의문 투성이입니다. 스파르타에 대해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전하는 고대 사서들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도 사실 논쟁거리이고 말입니다. 전반적으로 다른 고대 지중해 세계의 국가들과 이상할 정도로 다른 국가는 아니었다고 보는 Lazenby같은 학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혀 환경이 다른 동아시아 전통사회와 단순비교가 역사학적으로 무슨 의미가 그렇게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mr.snow 별로 역사학적으로 의미 따지면서 한건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자신있게 말한 의도도 아닌데 이런식으로 왜곡하시면 기분이 나쁘군요.
@mr.snow 여기가 무슨 학술지에 실리는 곳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만 볼건 없다' 정도로 말씀하시면 될걸 학술적 가치까지 따지면서 그렇게 반응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름 기본적으로 충분히 증명됬다고 아는 사실에 입각해 가벼운 마음으로 썼는데 뿌리끝까지 무거운 말 들어야 되나요.
@호시노 에키 그래서 충분히 증명된게 아니라고 말씀드린건데요.
@mr.snow 예. 당연히 그러겠죠. 그걸 가지고 제가 이러는게 아니잖아요.
@아이신기오로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반응이라면 그럴수도 있겠지만 ...무슨 제가 서양사개론이라도 전편 다 안외워두면 말할 자격도 없는 놈 취급받는것 같아서 기분 좋을수가 없는것 같네요.
@호시노 에키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만, 과민반응 하시는것같네요.
@호시노 에키 '고대 스파르타는 유학자들이 보면 까무러칠 정도로 사람들을 개돼지마냥 부리는 곳'이라고 정의하신 것에 대해서, 그렇게 한 줄로 정리하기에는 복잡하고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것을 말씀드렸을 뿐이고, 말씀드리는 과정에서 인신공격을 한것도 아니고 욕설을 한것도 아닙니다만. 왜 이렇게 과하게 반응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mr.snow 과한 반응이긴 한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호시노 에키 네 저도 안좋은 기분 느끼게 한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PRODIGAL 저는 헬레니즘기의 그리스가 딱히 비하받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헬레니즘기 그리스에 대한 혐의로, (1) 문화적 정치적 창의성의 상실, (2) 인구 감소, (3) 경제 쇠퇴, (4) 정치적 위상 하락, (5) 불평등의 심화 등을 들 수 있겠는데, (1)은 사실 뭔지도 잘 모르겠고(...) (2)(3)은 기반 근거가 점점 약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적 위상은 확실히 하락하게 되지만, 그것이 꼭 살기 나빠졌다는 의미는 아니겠지요. 빈부 격차 문제는 고전기에도 도처에 존재했고요.
@PRODIGAL 제가 헬레니즘기 그리스의 정치적 발전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고전기가 아테나이 민주정을 정점으로(...현대인이 보기에...) 하는 다양한 정치 체제를 진지하게 실험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냈던 시대였다면 헬레니즘기는 민주적 폴리스를 넘어 민주적 연방국 시스템이 그리스 도처에서 실험되었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로마 침공 앞에서 역사적 패배자가 되어 버리고 말지만, 패배자로 끝난거야 아테나이 민주정도, 스파르타 이왕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물론, 따지고보면 이 어디로 통할지 흥미롭던 실험이 꺾어버렸다는 것 때문에 감상적으로(^^;;) 좋게 평가해 주려는 마음도 저한테 있는것 같긴 합니다만은.
때가 때인지라 자꾸 브렉시트가 생각나네요;;;
그리스는.. 저 때만 황금기였던 듯..
"그리스" 를 현대 지리적으로만 놓고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현대적인 인식을 벗어나서 생각하면 꼭 그런건 아니죠. 지중해 전체가 그리스식 폴리스로 뒤덮여있고 중세 말기까지 이어진 로마제국은 그리스 문화의 후계자였는걸요 ㅎㅎ
고전기 뒤의 헬레니즘 시대는 사실상 모든 지중해 세계가 문화적으로 그리스화된 시기고, 심지어 전통문화가 강고한 유대 지역까지 상당수 그리스화된 시대죠. 뭐랄까 제가 보기에는 우리 나라에서 유독 심하게 그리스를 폄하하는 경향이 강한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