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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책장 앞턱에
보얀 먼지.
“먼지야, 자니?”
손가락으로
등을 콕 찔러도 잔다.
찌른 자국이 났는데도
잘도 잔다. (*)
<싸움>
번쩍 - 버언쩍!
꽈르릉 꽈르릉 - 우르릉 꿍꽝!
먹구름, 비구름
싸움이 붙었다.
진 편은 쓰러져
막 운다.
좍좍좍 소리내며
운다.
<빈집>
할머니, 아기, 장롱, 항아리
강아지 집
다 데리고, 가지고
이사를 가면서
집은 그냥 두고 가더란다.
오막살이여도 내 집이어서
제일 좋은 우리 집이라고
자랑삼을 땐 언제이고,
다락, 툇마루, 문지방
댓돌이 울더란다.
미닫이문이야 속으로 울었겠지.
이사 가는 걸 끝까지 지켜본
대문은 서운해서
열려 있는 그대로더란다.
그래서 말인데 얘들아,
우리 모두 함께 살러 가자.
안마당, 부엌 아궁이 앞, 지붕 위도
좋아.
툇마루 밑도 괜찮아.
들깨야, 엉겅퀴야, 도깨비바늘아,
우리가 살러 가자.
대신 살러 가자. (*)
<남긴 밥>
강아지가 먹고 남긴
밥은
참새가 와서
먹고,
참새가 먹고 남긴
밥은
쥐가 와서
먹고,
쥐가 먹고 남긴
밥은
개미가 와서 물고 간다.
쏠쏠쏠 물고 간다. (*)
<속으로 말한다>
작고 귀여운 걸 보기만 하면
우리집 고양이 생각이 난다.
‘우리 쪼꼬미만큼 예쁘네!’
속으로 말한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
“우리 강아지, 예쁘지?”
하고 물으면
웃음이 난다.
참으려고 해도 웃음이 난다.
‘야, 우리 고양이하고는
비교도 안 된다!‘
친구가 속상해 할까 봐
속으로 말한다.
우리 쪼꼬미, 정말이지 예쁘다.
<우리집 고양이>
우리집 고양이는
병아리보다 예쁘고
토끼보다 예쁘고
오리보다 예쁘고
강아지보다 예쁘고
원숭이보다 예쁘고
사슴보다 예쁘고
새끼 멧돼지보다 예쁘고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것의
예쁜 것보다
훨씬 더 예쁘다.
<햇빛 밝은 날>
기와 지붕 위에
앉아 있던 비둘기
몇 마리가
날아올랐습니다.
지켜보던
기와 몇 장이
비둘기를 따라
날아오르려다
멈칫,
주저앉았습니다. (*)
<보름밤>
얘들아,
별들아.
앞마당 말끔이
쓸어 두었다.
맨발로 와서
놀다 가거라.
흙 한 알갱이 안 묻게
쓸어 두었다. (*)
<손이 혼자>
지하도 계단을 내려가면서
무심코 잡은 친구 손.
“네 손은 참 따뜻해.”
친구는 말했다.
“주머니에 넣고 와서야.”
오는 동안 내내
주머니 속에 숨어있던
내 손.
정말은
차가운 네 손 따뜻하게
녹여주려
손이 혼자
주머니 속에
숨어 있었던 걸 거야.
숨이 막히는 걸
꼭 참고.
갑갑한 걸
꼭 참고.
손이 혼자 (*)
<눈 온 아침>
싸락싸락 눈을 쓰는
비질 소리가
이른 아침 잠을 깨웠다.
눈이다!
눈이 소리를 모조리 먹어
조용하다.
(귀 앞이 밝다.)
창을 연다.
내려다보이는 담장과 지붕들이
흰 눈으로 조금씩 떴다.
길 옆 자동차는 지붕 위 흰 눈을
쏟아뜨릴까 봐
꼼짝 못하고 업드려 있다.
(‘눈’이라는 말이
입 속을 차갑고 환하게 한다.)
책상 앞에 앉는다.
깨끗한 종이에 편지를 써야겠다.
누구에게?
흰 눈에게.
(해님이 더 먼저 편지를 써
보내시기 전에.) (*)
(詩) <模種의 비밀 하나>
그대 눈에 비치어지길
나는 아리잠직 어여뿐 女人이고 싶어.
가령 흰 목의 線이 고운,
가령
흘러내린 어깨의 線이 물 흐르듯 고요한,
또는 어여머리 둥그렇고,
저고리 섶 짧은 사이로 내어다 보이는
가슴 앞 보오얀.
다시 나는
그대 흐르는 물살같은 두 눈 앞에선
왼켠에서 비껴 바라보이는 옆 모습을랑
愁心 가득 어리이고 싶어
그대 무심코 눈길 던진 사이에도.
마지막인 듯 나는 아무래도
천만 년 전, 그 오래 전의 黃眞伊이고 싶어.
그녀 입었던 속곳이라도 빌고 싶어.
서리서리 얹혀 놓였을 이부자릴 빌고 싶어.
<두고 온 들녘의 그대>
- 나의 어머니 -
함께 나선 길의 들녘에
그대를 혼자 두고
돌아와선 곧바로
해가 짧아진다거나, 길어진다거나
목을 스친 바람이 잠깐 치거운 일
세숫비누기가 지워지지 않는 일에도
갱신이 쉽지 않아.
그대 들녘에 두고 왔으므로
빈 손 들고 돌아왔으므로
그대 鮮然한 눈빛 두고 왔으므로.
차가운 들녘에 묻어두고 온 줄 알았지요.
그러나 그대 식지 않은 채
가슴 속에 이냥 살아,
울음보다 더 앞서 누르곤
떠날 줄을 모르지요.
<또 하나의 失戀을 위해>
그대가 참으로 莫强한
한 여인에게 잡혔다 하기로
한두 번 있어 온 일 아니면서
실없이도 마음을 끓였지요.
그대가 잡히고 만 여인이
다름 아닌 내 그대에게 사로잡히고 만 걸
익히 알고도 남았을 여인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양 하는 게
실은 턱없이 힘들게도 했지요.
그대사 그 여인과 손을 잡았다기로
더하여 가벼이 입맞춤 했다기로
가벼운 입맞춤을 위해 좀 그러안았다기로
그런 것쯤 내게 아무것 아님을
그대가 이미 알리라는 걸
나는 믿으려 하지요.
지금은 귀 밑까지만 내려와 속살거리는
내 머리카락이
음울한 陰謨의 숱으로, 또는 길이로
공연스레 恥慾이라는 이름붙이고 싶게 자라게 한 뒤,
나는 다시 그대를 만나고 싶지요.
豊繇의 머리카락으로 만나고 싶지요.
영 다시 만나지 않을 건 아니지요.
<思慮깊음에 關하여>
어느 한때는 그로 하여
어떤 옅은 기쁨도 그 빛 더하였으되,
일이 잘 되기만 하면
이제 영영 널 못 보게도 되리라는,
기쁘기도 할 양의 지나친 愁心을
나는 오늘 시든 풀잎으로 눕는다.
풀잎은 누워서도 思慮깊거니
사려깊음의 베개
사려깊음의 이불
사려깊음의 잠
사려깊음의 꿈
널 만날 때마다
목 바로 앞에서 못내 간지럽히는
한 마디의 말
짧고 예의바른 재채기 같은 한 마디의 말
‘널 사랑해.’
끝내 삼킨 덧없음의 네 글자,
사려깊음으로.
마지막 끝 간 곳의 사려깊음으로.
<뼈울음>
무심코인 듯
무심코인 듯
소리 하나.
부엌에서 거실을 가로지르던 길.
豫告없이도
가장 슬플 무렵.
왼쪽 발 뒷꿈치 어디 쯤,
(가령 발 뒷꿈치의 心臟이라던가)
그 어디쯤서 들린 소리.
왼쪽 발 뒷꿈치를 타고
종아리를 지나고 허벅지를 지나,
내 귀를 스치운 소리.
어머니,
어머니,
이 추운 겨울 어둠의 땅 속
내 어머니 발뒷꿈치 뼈 하나의
울음.
山을 건너고 江을 또 건너
메아리쳐 온 뼈 하나의 울음.
<외포리에서>
외포리, 이른 봄
소름 돋아라.
희디흰 소름 돋아라.
나, 속아픈 사랑 하날
얻었으므로
그 사랑 행여 잃을까
두려워라.
바다, 미리 출렁여
내 잃을지 모를 사랑 하날 위해
근심하노니,
그 근심 짐짓 일삼느라
희디흰 파도와 더불어 근심느라
허위허위 바다에 이르렀으니.
부시게 나부껴 떨어지는
갈매기의 포말.
외포리, 이른 봄
희디흰 소름 돋아라.
마지막엔 맘 아픈 소금적으로 굳을
희디흰 소름 돋아라.
<봄, 무렵>
매양 자리를 지켜줄 듯하던 이는
이미 세상을 버렸고
베란다 빈 화분에 내려앉은
볕살은 저리 밝고 고와라.
소리는 간 곳 없고,
민망한 기다림이란
얼마나 헛된 소망인가.
언제였는지
내 몸을 버리고 떠난
얼마간의 코피가
날 것의 피로 되살아나
펄펄 끓고 있음.
봄, 무렵.
어딘지 떠돌고 있는
날 것의 피는 푸른 독으로 피는 중이다.
<그대를 보낸 뒤>
- 돌아가신 엄마 -
내게 가장 흔한 건 눈물,
그댈 보내고 난 바로 뒤도
눈물,
보낸 한참 뒤도
눈물,
곁에 있을 적엔
그대 설마 내 곁을 떠날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자고 깨서도
약간의 미움만으로 내 곁에
머물 줄 알았었다.
그러나 이제 돌아간
그대는 뻐꾹새 울음으로도 남고
송사리 그림자로도 남고
엉겅퀴꽃 빛깔로도 남아
......
내 눈물 그대 귀맡을 적셔 흐를지,
그대 손바닥 안을 흠씬 젖게 할지,
그러길 참으로 바래는 것은 아니야.
그렇다손 쳐도
못 이길 만큼 벅차게 힘겨운 어느 날은
그대 앞에 무릎 꿇고
그대 이름 부르고 싶어.
흥건히 부르고 싶어. (*)
<사뭇 그리고 어렴풋>
잠깐, 동네 한 바퀴를
가볍게 돌고 오겠다던 당신은
한 시간 남짓이도록 돌아오지 않고,
어딜 향해
당신을 찾아나서야 할 것인가.
눈 녹는 어스름 겨울 저녁 까마귀보다
더 깊고 음울한 눈을 하고서.
마침내 어둠 저편을 뚫고 들려온 당신의
외마디 부름 소리
여보세요...
내 목소리 여전히 당신 귀 앞에 생생하고
내 귓가에서는 흐릿하게 사라지려 하는
지우개로 지워지기 직전의
당신 숨차하는 목소리,
잘 안들려요! 다시 전화하세요!
어느 날, 문득, 저녁, 혹시라도 당신이 ,
자리를 비우고 말았을 적,
나의 두 귀 맡에 幻聽이듯
여보세요....여보세요....
당신 목소리 바람으로 닿았다 흩어질지 몰라.
작정하고 찾아 나서기로 한 그때부터
내 두 눈엔 아무 것도 들지 않아.
당신 패인 두 볼 한번이라도 착실히
아프게 눈여기려면. (*)
<소리>
그가 세수를 하느라
푸닥거리는 소리가 새삼 귀하다. (*)
색(色)에 빠지다
원 종 찬(인하대학교국문학과교수)
동시 쓰는 잘 아는 선배가 색칠하는 일을 즐기더니 어느 날 작은 그림전시회를 연다고 했다. 그 전시회 이름에 반했다. ‘색에 빠지다.’
선배를 처음 만난 것은 좋은 어린이 책을 소개하고자 각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동화 읽는 어른’들의 연수 자리에서였다. 동시인으로 잘 알려진 선배나 어린이 책 비평을 하는 나는 그 자리에 손님으로 참여한 셈인데, 연수하는 건물 뒤편 마당가를 어슬렁대다 마주치고는 첫눈에 벽이 허물어졌다. 선배도 키가 훌쩍 크고 마른 체형이라서 걷는 모습이 꾸부정했다. 술에 취해야 겨우 입을 여는 나에 비해 선배는 간간이 좌중을 웃게 만들었다.
희한하게도 툭툭 내던지는 말들이 가벼운 농담에 가까우면서 사람의 속을 딱 맞게 짚어내어 어떤 격조마저 느껴졌다. 그렇다고 앞뒤를 재거나 오래 생각해서 빈틈없이 말을 뽑아내는 자기방어의 대화술을 구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를 벗기는 데는 말을 아끼지 않는 편이라 남에게 상처주거나 부담스럽지 않게 공명을 자아내는 화법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그랬다. 선배가 상대의 마음을 여는 힘은 솔직함이었다.
선배는 문단의 오랜 중견으로 나하고는 열 살 차이나 나기 때문에,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위치였다. 또한 굳이 문학단체로 치자면 서로 다른 자리에 몸을 담고 있는 터라 그리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하지만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음을 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 선배 앞에서 헬레레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직접 들은 말이지만, 선배 역시 색깔이 분명하다고 소문난 소장비평가를 이름은 익히 알고 있던 터이나 마주대하고보니 깐깐하다기보다 촌스럽기 짝이 없었다는 점에서 맘에 들었다고 했으니까.
아참, 선배는 나와 성별이 다른 여사님이시다. 그날 우리는 술을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따위 치사빤스랑은 안 논다’면서 우리끼리 결속을 다지기로 했다. 이른바 ‘뼉다구’ 동인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조건은 키가 크고 말라야 할 것, 그럼에도 용가리통뼈여야 할 것. 곧바로 누구누구를 떠올리고는 그날 이후부터 심심하다 싶으면 한적한 근교로 불러내서 술추렴을 하곤 했다. 동시인, 동화작가, 그림책화가, 편집자, 평론가 등 대여섯 명이 정말이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모이는 자리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선배가 인터넷카페를 열었다고 주소를 알려왔다. 카페이름은 ‘주색겸비’고 주인장은 ‘나미모’ 여사였다. 선배답다는 생각으로 이따금 드나들고 있는데, 시인이라 그런지 짤막한 일기처럼 써내려간 그날그날 메모들이 담백한 즐거움을 주었다. 두 딸에 고양이 두 마리와 뒤엉켜 지내는 일상이야기들에는 시인 특유의 여백이 오롯했다. 요새는 일 년에 두 번 얼굴보기도 힘들지만 카페가 있어 흐뭇했다. 방문객 오글오글하고 햇볕 쟁글쟁글하고…….
이 ‘나미모’ 여사가 엽서 한두 개 크기의 화폭에 꽃이랑 고양이 색칠하기를 즐겨하더니, 그래서 시에 그림을 넣어 자기 책을 꾸미기도 하더니, 마침내 작은 전시회를 열게 된 것이다. ‘색에 빠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대놓고 마주하기 부담스러운 제목일 테지만, 동시 쓰는 선배에겐 너무나 잘 어울렸다. 알록달록한 줄무늬에 초록빛 눈을 가진 앙증맞은 고양이그림만 하더라도 어린애처럼 천진하기 짝이 없다. 솔직함은 생기를 북돋고 사람을 편안케 해주는 것이면서 더러운 욕망을 걸러주는 자연의 빛깔인 게다.
순한 귀에 와 닿은 만물의 소리
-이상교 『고양이가 나 대신』
김제곤(아동문학 평론)
1.
1973년 『소년』에 동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30여 년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이상교가 『고양이가 나 대신』(창비, 2009. 12)라는 동시집을 냈다. 이 동시집을 낸 2009년은 그가 육순(六旬)이 , 해다. 육순을 일컬어 이순(耳順)이라 했던가 년간세상 만물의 모든 소리가 귀로 들어와 마음과 통하는 나이, 이순’에 이르러 낸 동시집에는 시인이 숬한 귀로 맞이한 이 세상 만물의 소리가 들어 여 년그는 시집 앞에다이순나의 ‘시론’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머리말을 이렇게 적어 두고 있다.
나무만 있으란 법은 없다.
꽃만 있으란 법은 없다.
벌레만 있으란 법은 없다.
아이만 있으란 법은 없다.
자전거만 있으란 법은 없다.
노래만 있으란 법은 없다.
이야기만 있으란 법은 없다.
그림만 있으란 법은 없다.
모든 게 다 들어가도 되는 세상!
동시 세상이다.
이 머리말에는 이상교가 지향하는 동시 세계의 일단이, 아니 어쩌면 그 세계 전부가 모두 드러나 있다. 이 짧은 글은 이상교의 동시관을 피력한 말에 다름 아니며, 시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일종의 동시론을 집약한 말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파악한 “동시 세상”의 품은 넓디 넓다. “모든 게 다 들어가도 되는 세상”이다. 이상교는 하나의 ‘선언’과도 같은 이 발언을 통해 동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상투적인 통념들에 일침을 가한다. 그럼으로써 이상교는 ‘아이들이 읽는 시’라는 규정에서 파생되는 동시를 둘러싼 저 완고한 편견들에 맞선다. 동시란 결코 ‘좁은 시’가 아니며 ‘얕은 시’가 아니다. 시인이 보기에 동시만큼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내는 소리를 모두 품어 안을 수 있는 그릇은 없다.
2.
세상 만물의 소리 가운데 이상교는 먼저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이순의 귀로 듣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외부의 목소리가 아니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어느새 시인의 내부로 들어와 한 몸이 되어 있다. 그가 아이와 한 몸이 된 것은 아이들 내면에 이는 미묘한 떨림을 헤아릴 순하고 섬세한 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뚱뚱한 애’
아이들은 나를
그렇게 부른다.
‘뚱’자만 들어도
내 귀는 깜짝 놀란다.
아이들이
‘뚱뚱한 애’ 대신
“임선화!”
불러 주면 좋겠다.
이상교는 어느 자리에선가 “나는 아이들을 위해 동시를 쓴다는 생각을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아요. 나는 나를 위해 써요. 나는 애써 애가 되려 한 적이 없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동시를 쓰는 시인은 반드시 ‘애써서라도’ 아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이런 말은 일종의 의아심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이상교가 말한 이 말을 하나의 역설로 새기고 있다. 이상교 만큼 ‘아이들을 위해 동시를 쓰는 시인’이 없으며 ‘아이가 되어버리는 시인’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그렇게 되려고 ‘애를 쓰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타고난 천성처럼 쉽고도 자연스럽게 행해진다. 아이들을 위해 혹은 아이가 되기 위해 그는 억지를 피우지 않는다. 아이들을 위한 시를 생각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는 아이들을 위한 시를 써낸다. ‘뚱뚱한 애’ 임선화를 그린 시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이상교는 아이를 다만 아이로 내려다보지 않는다. 그에게 아이는 어른인 나와 하나도 다름이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의 아이 되기에는 억지스러움이나 어색함이 개입되지 않는다. 아이를 아이로 대하기 전에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것, 이 단순한 태도야말로 아이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그려내는 비결이다.
고추장을 넣어
호되게 매운
닭발 볶음.
오종종 오종종
서른 개도 넘을
닭발.
뼈를 다 추려 내
걷지 못하는
닭발.
고추장이 너무 매워
걷지 못하는
닭발.
시인은 아이들 목소리를 섬세하게 귀담아 들을 뿐 아니라 하찮은 사물들에게도 귀를 기울일 줄 안다. 우리 동시들은 무성한 잎을 달고 꿋꿋하게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나무와 향기를 내뿜으며 예쁘게 피어있는 꽃들과 꿈틀거리며 붕붕거리며 열심히 땅을 기어 다니거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벌레들을 즐겨 그려왔다. 그것들은 한 마디로 목숨이 붙어 있어 아름다운 것 들이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움을 발산하지만 아이들이 가진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아이들 스스로 가진 생명력과도 상통하는 지점이 있음으로 해서 더더욱 동시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들이 되었다. 그러나 시인은 어찌 동시가 그러한 살아있는 목숨들만을 그리는 데 머무를 수 있겠느냐 새삼스러운 물음을 던진다. ‘동시=세상만물의 소리를 담는 그릇’이라는 그의 시론은 위 시 「닭발 볶음」같은 작품에서 구체화 된다. 구석진 자리에 놓여 있어 잘 보이지 않는 사물의 소리를, 시인은 다만 인간의 자리에서 듣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처지가 되어 듣고 말한다. 그가 그리는 세상은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세계가 아니다. 아이를 인간으로 봄으로써 어른과 아이의 경계를 지우듯이 그는 사람과 사물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위치에 놓고 봄으로써 편협한 자기중심주의에 매몰된 우리의 시야를 넓힌다.
봉숭아,
백일홍,
채송화 모종을 옮겨 심는데
집배원 아저씨가 왔다.
“등기입니다.”
흙손인 채
도장을 들고 나가
우편물을 받아 왔다.
그사이,
심다 둔 모종들을
구경하던 고양이가 대신 옮겨 심느라
코로,
입으로,
수염으로,
발로,
쩔쩔맸다.
이상교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시인이다. 그는 동시로는 물론 동화의 소재로 고양이를 그렸으며 그것도 모자라 그림의 소재로 고양이를 그려왔다. 이상교에게 있어 고양이는 단순한 영물이 아니다. 고양이와 그는 한 집에 기거하는 식구이기 때문이다. 위 시에는 그러한 집안 풍경이 훤히 드러나 있다. 시인이 우편물을 받으러 간 사이 아마도 고양이는 심다 둔 모종들을 이리저 받파헤쳐 놓았던 모양이다. 시인으로서는 귀 풍경일거리를 만든 셈이다. 그러나 시인은 고양이를 탓하 탓하혼내지 않는다. 고양이를 혼내기는커녕 주인 대신 모종을 심기 위해 애썼다고 오히려 대견해 한다. 사물과 인간을 이분법으로 나누어보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는 이 시에서도 역시 오롯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 시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이 있다. 그것은 시 안에 내장된 ‘이야기적 요소’다. 이상교의 동시는 “모두 아름다운 한편의 동화”(심후섭)라 일컬어질 만큼 ‘동화적 세계’가 자주 펼쳐진다. 위 시 「고양이가 대신」은 사실 한 편의 동화라 해도 무방한 서사가 들어 있다. 그 서사는 현실성과 환상성의 조화라는 동화적 특성을 그대로 구비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노래와 이야기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들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하게 된다. 다시 말하거니와 동시는 세상 만물의 소리를 다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런 까닭에 그 소리를 표현하는 방식 또한 어느 한 가지 틀을 고집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시인은 동시 안에서 노래와 이야기를 함께 모색하는 동시에 이른바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인 이미지를 함께 동원하여 인상적인 장면을 이렇게 잡아내기도 한다.
짹!
참새 한 마리가
화살나무와 벚나무가 서 있는
사이,
내 키의 두 배 반 높은 공중을
세게 한 번 꼬집고
달아났다.
짹!
자세히봐도
멍 자국은 생기지 않았다.
참새는 “짹!”이라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나무 사이를 날래게 빠져 날아간다. 참새의 소리와 몸짓이 간결한 몇 마디 시구에 선명히 포착되어 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내 키의 두 배 반 높은 공중을/ 세게 한 번 꼬집”었다는 표현이다. 참새의 짹 하는 소리와 날개짓이 일순 공중을 꼬집는 촉각의 이미지로 전환되어 이 시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더욱 살아있는 시적 장면을 떠올리도록 한다.
불 안 켠
산에서
소쩍새가 혼자 웁니다.
소쩍-
소쩍-
불 안 켠
방에서
할머니가 혼자 듣습니다.
소쩍-
소쩍-
이 시는 우리 동시에서 흔히 보아오던 대구를 차용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 대구가 기계적인 말 만들기나 상투적인 관습으로 인식되지 않는 시다. “불 안 켠 산”과 “불 안 켠 방”에서 “소쩍새는 혼자” 울고, “할머니는 혼자” 듣는다. “불 안 켠”에서 느껴지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의 저 외롭고 고즈넉한 이미지는 2연, 4연의 “소쩍-, 소쩍-”이라는 새 울음소리의 반복에 의해 배가되고 있다. 그러나 소쩍새와 할머니는 각기 고립되어 있는 존재라고 볼 수는 없다. 할머니에겐 울음소리를 들려주는 소쩍새가 있고, 소쩍새에게는 자신의 울음을 들어주는 할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둘은 따로 고립되어 있는 처지이면서도 또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2연과 4연에서 반복되는 소쩍새 울음은 두 존재의 외로움을 부각시키는 장치일뿐더러 외로운 두 존재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매개체 구실을 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시에도 역시 사람과 자연은 둘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3.
동시집 『고양이가 나 대신』은 시인이 이순의 나이에 맞이한 세상 만물의 소리를 옮겨 적은 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 그가 확인시켜준 그의 ‘순한 귀’는 사실 그가 이순의 나이에 새삼스럽게 갖게 된 귀가 아니다. 그의 시는 언제나 어디에든 깃든 동시를 맞이하기 위해 열려 있었고, 그는 그 동시를 맞이하기 위해 때로는 할머니로 때로는 아이로 때로는 고양이로, 다람쥐로, 실잠자리로, 노랑 맨드라미로, 참새로 자유자재 변신을 감행하던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 변신을 시도할 수 있었기에 그는 어른과 아이 사이에 혹은 사람과 동물, 인간과 사물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경계를 스스럼없이 넘나들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순의 나이에 다다랐으므로 그런 행보는 더욱 넓어지고 깊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의 순한 귀가 새롭게 맞이할 세상 만물의 소리들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약력: 아동문학평론가. 인하대에서 아동문학을 공부했으며 현재 「윤석중 연구」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평론집 『아동문학의 현실과 꿈』(창비 2003)을 냈다.
춤출게, 가지 마!
이 상 교
1954년 무렵의 서울 동대문 밖 주택가. 골목을 조금만 벗어나면 명아주 따위의 풀이 그득 나있는 빈 터였다. 그렇다고 단순한 빈 터는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으므로 포탄 떨어진 자리가 한길이 넘게 패여 있었으며, 장마 때면 팬 구덩이에 빗물이 구덩이 반 넘게 고여 있곤 했다.
그 무렵, 놀 곳이 마땅치 않았던 다섯 여섯 살 또래의 우리는 명아주 풀이 그득 나있는 포탄 떨어진 근처 아니면 조금 더 나아가 방공호에 놀러가곤 했다.
방공호는 낭떠러지처럼 깎인 곳에 파여 있었는데, 사변 때 피난민들이 폭격을 피해 숨어 있었던 곳이라고 했다. 전쟁이 끝난 방공호에는 할머니 한 분이 살고 있었는데 6.25 사변 통에 가족을 잃고 혼자 사는, 지금 기억하기로 일흔이 채 안된 연세 쯤의 할머니셨다.
언젠가 아이들을 쫓아 할머니가 사는 방공호에 들어가 보게 되었는데, 어린 눈에도 생각 밖으로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쪽진 머리의 단정한 모습이셨는데 어느 해 추운 겨울, 쓸쓸히 돌아가시고 말았다.
식량이 모자랐던 때여서 엄마는 명아주를 뜯어 쌀 한 움큼을 넣어 명아주 죽을 쑤어 주곤 했으므로 나는 이따금 어머니가 시키지 않아도 명아주를 한줌 뜯어 집으로 들고 가곤 했다. 또래의 몇이 그랬는데 선자는 그런 아이들 가운데 한 아이였다.
선자.
성이 뭐였는지 기억에도 없는 선자는 같은 골목 대각선 방향의 집에 살았을 듯 싶다. 선자는 큰 키의 나에 비해 키가 많이 작고 얼굴이 동그랗고 터질 듯 빵빵했다.
나는 눈을 뜨기 바쁘게 여섯 살 동갑나이인 선자를 부르기 위해 밖으로 달려나갔다. 선자는 유난히 작은 눈에 빵빵한 뺨은 언제 보아도 가칠가칠 터져 있었고 누런 코를 달고 다녀, 터질 듯한 뺨이 콧물로인 듯 빤질빤질했다.
나는 선자를 집으로 곧잘 불러 들였다. 엄마들끼리도 친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선자는 거의 종일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나는 선자가 놀던 중간에 저희 집으로 돌아가는 불상사를 없이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놀거리를 개발해야 했으며 그 애를 기쁘게, 싫증내지 않게 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야 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선자는 노는 일에 쉬이 싫증을 내고 자주 돌아가겠노라고 했다. 그때마다 나는 소꿉놀이 아니면 귀신놀이 따위를 제안해서 두어 시간 을 더 놀곤 했다.
나는 점차 놀거리를 생각해내는 일에 천재가 되어갔는데 그런데도 선자는 전과 달리 걸핏하면 집으로 돌아가겠노라고 했다.
“벌써 가려고?”
“많이 놀았잖아.”
“더 놀다 가.”
“아니, 집에 갈 거야.”
선자는 마침내 터질 듯 빵빵한 얼굴에 울쌍을 지었다.
“내가 노래 부를게, 가지 마.”
나는 방 윗목에 차렷 자세를 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처럼 노래를 불러 가는 걸 말린 것이 서너 차례는 되었을 거였다.
“그래도 갈 거야.”
그날따라 선자는 돌아가기를 고집했다.
“노래 부를게, 자기 마.”
“아니, 집에 갈 거야.”
“춤출게, 가지 마.”
선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곧 춤출 준비를 서둘렀다.
전부터도 이따금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 그 때면 머리에 검정 고깔 모양의 벙거지를 써야 했다.
고깔 벙거지는 엄마가 검정 무명 헝겊을 떠다 마름질을 해 재봉질로 만들어준 것인데, 내 눈에 퍽 예쁘게 보였다. 벙거지 끝이 봉곳하고 끈이 달려있어 턱 밑에 매게 되어 있었다. 주름이 접혀 있지는 않았지만 둥그렇게 펼쳐져 어깨를 감싸는 짧은 망토 모양이 퍽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내 엄마가 꺼내다 준 고깔 벙거지를 쓰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팔을 같은 모양으로 흔들어 대면 선자가 지루해 할지 모르므로 가끔 어깨를 들썩이고 턱도 까불어야 했다. 깡충깡충 들뛰기도 하고, 빙글빙글 돌며 손가락 끝을 까닥였다. 눈을 스르르 감았다 뜨고 빙긋빙긋 웃어 보였다 슬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선자를 기다리다 못해 데리러 온 선자 엄마와 선자, 그리고 엄마. 그 셋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온 마음을 다 기울여 춤을 추었다.
그런 선자가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집에 놀러오지 않았다. 나는 또 선자를 부르러 가지 않았다.
선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선자는 죽고 만 것이었다. 노는 일에 빠진 나는 선자가 앓는 동안, 명아주 잎에 반짝이며 내리는 햇빛이 찐 감자 껌질를 벗겼을 때 보얗게 뿜어져 나오던 분 같아, 혼자 뇌었다.
‘노래 부를 게 가지 마. 춤 출게 가지 마.’
선자는 그처럼 가지 못하도록 말렸건만 뿌리치고는 종내 가고야 말았다. 엄마는 뒤에 선자가 요즘으로 말하면 백혈병으로 숨진 것 아니었는지 하고 말씀하시곤 했다.
선자. 눈을 감고 오래 기다리노라면 떠오를 듯도 싶은 얼굴이다. (*)
첫댓글 주색겸비 회원끼리만. 퍼 옮기지 말아주시길. ^^*
ㅎ.ㅎ...
쌤의 시는 정말 재밌습니다~~읽으면서 자꾸만 웃음짓게 만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