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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五章 흑마지낭(黑魔智囊)
①
"휴우우……."
염상호는 두 곳에서 날아온 보고서를 앞에 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뛰는 가슴이 어느 정도 진정됐는지 세게 쥐면 바스러질 듯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보고서를 집어들었다.
쉽게 믿을 수 없는, 그러나 너무도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보고서를 다시
읽는 염상호의 눈가가 떨리는 것을 보면 그의 심장이 아직도 두방망이질 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먼저 손에 든 것은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 분찰에서 올라온 보고였
다.
< 복주분찰 정례 보고 삼신(三信).
일. 수룡방(水龍幇)에 관한 건.
귀수방주의 차남 황영진(黃迎進)이 차기 방주직을 보장한다면 본 방의 식구가
되겠다고 분타주 마위달(馬偉達)에게 제의해 왔으나 마위달이 믿지 못하고
계속 회신을 미루고 있습니다. 귀수문이 아무리 작은 문파라도 복주 일대를
본 방의 수중에 넣으려면 반드시 끌어 들여야 할 문파로 마위달을 재촉하셔야
……. >
< 이. 복주 관영의 동태에 관한 건.
본 방에 협조적이던 도독부 참사(參士)가 이직함에 따라 새로이 부임하는 자
를 포섭하든지 아니면 무리한 대가를 요구해서 접촉을 끊은 순찰사령(巡察使
令)과 다시 접촉하는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속히, 선택해야 할 시급한 문제이니 전주님의 결정이 필요……. >
천천히 보고서를 훑던 염상호의 눈이 멎은 것은 마지막 부분이었다. 하루에도
수백 건의 보고서를 처리하는 그를 떨리게 만든 바로 그 부분.
< 칠. 기타 보고.
본 분찰에서 운영하는 도박장에 단골로 드나드는 자 중에 남해의 섬들을 돌며
약초를 거래하는 약재상의 호위가 있는데 그 자가 취중에 떠든 말이었으나
봉래도 및 남해와 관계된 모든 것을 보고하라는 명에 따라 보고합니다.
그 자가 남해 군봉도(郡蜂島)에 머무는 중에 주막에서 인사불성이 되어 주정
하는 젊은이를 봤는데 군주님이 떠났으니 살 희망이 없다며 떠드는 것을 주위
사람들이 황급히 끌고 갔다고 합니다.
무슨 영문인지 물었으나 원래 주정이 심한 자라 헛소리를 했으니 개의치 말라
고 했다며 남해사람이라고 모두 부지런하고 성실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복주분찰주 배상 >
염상호는 또 다른 보고서를 집어들었다.
여느 종이와 다르게 붉은 물을 들인 종이는 무적세가를 감시하는 특별조직,
혈안대(血眼隊)의 보고서라는 의미였다.
각기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맡은 인물과 분야가 다른 혈안대는 육십갑자(六十
甲子)를 따서 이름을 붙였는데 겉봉의 서명이 경술(庚戌)인 걸 보면 세가의
소작인을 감시하는 술조(戌組)의 칠호(七號)가 올린 보고였다.
떠돌이 약장수로 분해 옥천산 인근 마을을 떠돈 지 사 년째인 그가 의심 없이
세가의 소작인들과 술을 나누는 사이가 된 것은 작년 여름부터였다.
마음이 점점 급해진 염상호는 술조 칠호의 보고 중 핵심이 되는 부분을 찾았
다.
< ……세가에서 화주(火酒)를 담고 있습니다.
어제 비직이 만난 소작인 장가(張哥)에 따르면 세가의 노복 아팔(阿八)이 소
작인들을 찾아다니며 세가에서 술을 빚어야 하는데 가을에 거둔 소출로는 모
자라니 보관하고 있는 조가 있으면 달라고 했답니다.
영문을 물으니 금진후 밑에서 살림을 돕는 아팔의 아비가 금진후에게 술을 담
아 두라는 말을 들었답니다.
세가의 창고에 이미 많은 명주가 있는데 조로 만드는 화주 따위가 무슨 필요
냐는 아팔의 물음에 세가의 혈족이나 가신들이 아니라 노복들과 소작인들에게
내릴 술이라는 아비의 대답을 들었으니 아끼지 말고 내놓으라고 했다는 것이
장가의 말입니다.
가둬간 양의 두 배만큼 소작료에서 감해 주고 빚은 술 또한 자기들이 먹게
되었으니 세가에 큰 잔치가 있는 모양이라며 장가는 즐거워했습니다.
……하략……. >
톡, 톡, 톡!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에 염상호의 음성이 얹혀졌다.
"혼사다, 무적세가와 봉래도의 혼사……!"
과도한 표행료도, 무려 열 무리의 표행을 띄운 석백송의 의도도 분명해지는
느낌이었다.
"프흐흣! 혼인으로 봉래도와 화친을 맺으시겠다……? 어림없는 수작! 신부가
어디 숨었든 중원에 있는 이상 반드시 본 방의 수중에 떨어진다. 성질 급한
봉래도의 칼끝이 누구에게로 향하는지 두고 볼까? 프하하핫!"
염상호는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드디어, 무적세가의 목줄기를 지그시 눌러줄 날카로운 비수를 발견한 것이다.
"신부를, 봉래도의 군주를 찾아야 된다!"
마치 천하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대도를 깨우친 듯 황홀한 표정으로 소리친 염
상호는 황급히 뛰쳐나갔다.
"비켜라! 방주님을 뵈어야 한다!"
흑룡전의 경계를 서던 갈천위의 호위대, 혈룡대(血龍隊)의 무사들은 요란하게
달려오는 염상호의 외침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방주를 친견하는 염상호가 방주를 만나는 절차를 모를 리 없
건만 멀리서부터 비키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그 자신이 만들어 번거롭다
는 방주를 설득해 기어이 재가를 얻은 지 십 년이 넘은 절차를 무시하겠다고.
그러나 그들의 목숨이 하나인 이상 예외는 없었다.
방금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더라도 신패를 확인하고 몸수색을 하는 절차를 염
상호라 해도 생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패를 보이시오."
"비키라는 소리가 안 들리느냐?"
"신패를 보이라고 했소."
아무리 지위가 높은 자라도 신패를 확인하기까지는 존칭을 쓰지 않으며 몸수
색을 거부하면 즉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이 그들에겐 있었다.
흉흉한 기색으로 염상호를 둘러싼 경비들은 즉시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이, 이런……!"
어쩔 수 없이 품속을 더듬는 염상호의 체면을 살려준 것은 문안에서 들려오는
갈천위의 음성이었다.
"들여보내라."
무사들은 그제야 허리를 굽혔다.
"염 전주님을 모시겠습니다!"
염상호를 허둥대게 만든 급한 일이 뭔지 궁금할 만도 하건만 무슨 예식을 치
르듯 경건한 자세로 검을 닦고 있던 갈천위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급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
하나 갈천위는 묵천검(墨天劍)과 나누는 속 깊은 대화를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뜻을 거역하고 야망에 방해가 되는 숱한 상대에게 죽음을 안겨준 그의
분신과 지난날 격전의 혈사와 또 앞으로 이룰 천하패업의 웅지에 대해 나누
는 그들만의 대화.
스르르릉!
화적떼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던 흑마방을 부친에게서 물려받아 중원 마도의
팔 할 이상을 장악한 거대세력으로 키운 오늘날까지 언제나 그와 함께 한 애
검이 미끄러지듯 검집 속으로 들어가는 모양이 구름 뒤로 몸을 숨기는 흑룡과
도 같았다.
그제야 입에 물고있던 종이를 뺀 갈천위의 깊은 눈길이 염상호를 향했다.
염상호는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적셨다.
"표물의, 표물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그래? 대체 그게 뭐기에 흑마방의 대마안기무전주가 혈룡대에게 수모를 당할
만큼 급하게 만들었는고?"
당금 최대의 현안이건만 갈천위는 여유가 있었다.
함부로 속을 드러내지 않아야 수하들이 긴장을 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실천
한지 이십 년이었다.
뒤집어보면 갈천위가 드물게 농담까지 던진다는 것은 그만큼 그 역시 애가 탄
다는 반증이었다.
염상호가 그 속을 모를 리 없지만 그렇다고 같이 여유를 부렸다간 자칫 죽음
이었다.
염상호는 다급히 말을 쏟아냈다.
"표물은 봉래도의 군주입니다. 그냥 가는 것도 아니고 무적세가의 소가주와
혼사를 치르러 가는 길입니다. 무적세가와 봉래도가 혼인을 맺는 것입니다!"
"……!"
갈천위가 애써 침묵으로 억누르는 격동의 파장을 읽으며 염상호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그토록 사소한 정보도 놓치지 않도록 마안기무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으며,
또 언뜻 아무것도 아닌 작은 조각을 맞춰 그 뒤에 도사린 엄청난 진실을 밝혀
낸 자신의 능력이.
마음을 가라앉혔는지 갈천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확실한가?"
"비직의 판단으로는 틀림없습니다."
염상호는 복주와 북경에서 온 보고서의 내용과 자신의 의견을 차근차근 설명
했다.
"……해서 현재 세권표국에서 운송하고 있는 문제의 표물은 분명 봉래도의 군
주라는 것이 속하의 결론입니다."
"흐음……. 일이 그렇게 된 거로군."
갈천위는 염상호의 생각에서 허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대책은?"
이미 예상한 질문이었다.
"천하에 산재한 본 방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합니다. 흑마대는 기산에 두되 항
주에서 무적세가에 이르는 모든 길에 본 방의 수하들을 배치하고 천라지망을
펴 비수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비수라니?"
봉래도의 군주를 꽃으로 생각하는지 비수로 생각하는지 데 아무리 갈천위라
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 봉래도의 군주, 무적세가의 숨통을 끊을 비수 말입니다."
"푸흐흐. 어울리는 말이로군."
갈천위의 얼굴에 희미한 만족의 웃음이 번졌다.
"한데 그 비수가 본 방의 목을 위협하게 될 가능성은 없겠는가?"
세간에 알려진 대로 흑마방의 지낭(智囊)은 분명 염상호였다.
하나 그에게 정보를 분석하고 대세를 읽는 능력이 있다면 갈천위는 그런 염상
호의 허점을 집어내는 위인이었다.
갈천위는 송곳처럼 간결한 질문으로 염상호의 꾀 주머니를 열어 젖혔다.
"걱정할 일이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한 번 실마리가 잡히자 염상호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고 입술에는 탄력이 붙
은 듯 했다.
"혼인이 정략으로 이용되는 것은 두 가지 경우입니다. 혈연을 맺고 싶을 정도
로 돈독한 관계이거나 한 집안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불안하고 불편
한 관계! 삼십 년 전 사건 이후 두 집안간의 불화는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니
이번 혼사는 당연히 후자의 경우라 하겠습니다."
과도한 흥분과 자신감.
평소와 달리 갈천위의 반응을 살피지도 않고 염상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마도 본 방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금천후가 오만한 자부심을 굽
히고 혼사를 승낙했겠지요. 하나 무적세가에서 표행료를 지불하고 금진후가
석백송을 만난 것으로 미루어 신부의 안전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무적세가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 아래서 신부에게 변이 생긴다면 간신히 억누른 봉래도의
자부심과 지난 세월 쌓인 원한이 무적세가를 향해 폭발할 것입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갈천위를 올려다보는 염상호의 표
정이 칭찬 받기를 원하는 어린아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두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것을 보면 주인이 던져주는 뼈다귀에 살점이라도 붙어있
기를 기대하는 강아지에 더 가까웠다.
과연, 갈천위는 염상호를 칭찬했다.
"중요한 사실을 밝혀낸 염 전주의 공이 크다. 계획을 승인하니 봉래도 군주의
행방을 찾는데 주력하라!"
그러나 최소한 염상호 정도 되는 인물을 수족으로 부리는 위인이 갈천위였다.
염상호는 미처 흐뭇한 웃음을 지을 시간도 없이 갈천위의 이어지는 음성에 귀
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 모든 일에 정해진 방향이 없으니 지나친 낙관은 금물이다. 어떤 경우가
닥치더라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기 쉽다."
단호한 음성은 염상호를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렇듯 상황이 명백한데 무슨 준비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첫째, 여인의 규방(閨房)에서 필요한 물건을 준비해라. 어떤 것이든 황제의
딸이라도 쓸 수 없는 극상품(極上品)이라야 한다."
염상호는 갈천위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금방 알아차렸으나 방주의 말
이 끝나지 않았으니 잠자코 있을수 밖에 없었다.
"봉래도에서 무적세가에 책임을 묻기 전에 본 방을 적으로 돌릴 경우에 대한
대비다. 봉래도의 군주가 우리 손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최대의 귀빈으로 모실
것이며 사태의 추이에 따라 적절한 시기를 택해 곱게 봉래도로 돌려보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도 있으니 준비를 해두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하나 갈천위가 두 번째 명령을 내리는 순간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염
상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둘째! 무적세가에서 봉래도의 힘을 빌려 중원 무림을 피로 씻으려 했다는 증
거를 만들어 두어야 한다."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바쁘게 잿빛 눈동자를 굴리는 염상호의 심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갈천위의
말이 이어졌다.
"만에 하나 봉래도와 무적세가의 합공을 받을 경우도 대비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럴 경우 그들은 천하를 발아래 두려는 무림의 공적(公敵)이오. 비록 마도의
길을 걸으나 본 방이야말로 외세와 연수한 패도(覇道)의 무리로부터 천하를
지키려는 중원의 의혼(義魂)이 되어야 한다."
"그런 말을 믿도록 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염상호의 의문은 타당했다.
이미 천하제일가라는 지위를 누리는 무적세가에서 무엇이 아쉬워 그런 일을
벌이겠는가.
무림인이라면 삼척동자도 믿지 않을 소리였다.
하나 누구나 기적이라고 하는 흑마방의 오늘을 만든 갈천위야 말로 자신이 얻
고자 하는 '천하'의 일이 상식으로만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 누가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면 나라도 미친놈의 헛소리라 여길 것
이다. 하나 막상 경외와 공포의 대상인 신비세력 봉래도의 고수들이 분노의
칼을 빼들고 바다를 건너오는 일이 생기면 상황은 달라진다. 공포와 혼란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법. 천하는 극심한 혼란에 빠질 것이고 혼란 중에
는 어떤 소리도 나름의 설득력을 가진다. 그대에게 명을 내리는 이유도 거기
에 있다. 설득력이 있든 없든 일단 그럴듯한 증거들을 만들어 두라는 것이다.
갈천위가 명을 내리는 신분이라면 명을 집행하는 사람은 염상호.
어쩌면 갈천위가 이만큼 설명한 것도 자상한 배려였다.
"명을 받듭니다!"
염상호는 아직도 약간은 멍한 정신을 추스릴 여유를 갖지 못하고 흑룡전을 물
러 나왔다.
늘 한결같이 쥐눈을 반짝이며 점잔을 빼던 마안기무전주가 올 때는 세상을 다
얻은 듯 호들갑을 떨더니 나갈 때는 정반대로 얼이 빠진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이고 가는 모습이 혈룡대의 무사들에게는 의아한 일이었다.
하나 자신을 향한 그들의 의구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염상호는 알지 못할 소리
를 중얼거렸다.
"그리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은 만약일 뿐……. 하나 명령은 따라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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