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표행은 순조로웠다.
마애령을 넘어 북서로 방향을 잡은 지 이틀이 지났지만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날씨마저 도움을 주려는지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길을 가자면 슬며시 눈이
감길 정도였다.
하나 일행의 분위기는 어딘가 무겁게 느껴졌다.
정체를 감추고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야 한다는 중압감도 이유가 되겠으나 그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일행을 감싸고 있는 무거운 분위기의 원인은 무너진 성터에서의 참극이었다.
일상적으로 필요한 대화는 끊이지 않고 가끔씩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기도 했
지만 정작 가장 큰 사건인 당성진 얘기는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다.
일행에게 생긴 최초의 금기(禁忌).
어떤 의미에서건 누구에게나 적지 않은 상처로 남은 아픈 기억을 꺼내지 않는
것.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약속한 적도 없는데 자연스럽게 생긴 금기였다.
아마도 그대로 묻어둔 채 시간이 흐르면 아픔도 가셔지리라 기대하는 줄도 몰
랐다.
하나 그들에게는 또 다른 충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휘성 금산진(錦傘鎭).
항주를 떠난 후 처음 만나는 큰 고을이었다.
항주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규모이나 제법 번듯한 주루와 객잔이 심심지 않게
눈에 뜨일 만큼 오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시진이었다.
해질 무렵 금산진에 들어선 사군명 일행은 길가에 나와 손님을 부르는 점원들
에게 표적이 되었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헤어졌던 먼 친척이라도 만나듯 반가운 음성.
사군명의 시선이 어느새 말고삐를 잡아끄는 음성의 주인에게 향했다.
반가운 음성과는 달리 전혀 모르는 얼굴.
팔에 수건을 걸치고 있는 영악스런 꼬맹이가 고급스런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사군명 일행에게서 돈 냄새를 맡았는지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호들갑을 떠
는 것이다.
"금산진에서 저희 태영루(泰榮樓)만큼 정갈하고 음식 잘하는 집이 있으면 제
손에 장을 지지겠습니다요. 후원의 객실 또한 어느 부잣집 안방 못지 않게 꾸
몄으니 손님들같이 지체 높으신 분들에게는 아주 적격이지요."
세파에 단련되어 자갈처럼 반들거리는 꼬맹이에게 어쩐지 서글픔을 느낀 사군
명의 눈짓을 받은 고승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금산진에 여러 차례 들린 적이 있는 고승후가 점원의 말이 거짓이 아님
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안내하게."
"예, 예! 물론입지요!"
당성진에서 죽어간 이십여 명의 얼굴을 아직도 잊지 못하는 그들이 휴식을 위
해 찾아가는 태영루에는 또 다른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줄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 대령했습니다."
여러 개의 큰 접시를 솜씨 좋게 가져온 점원은 탁자에 음식을 내려놓으면서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나운 인상이긴 해도 흔치 않은 미모를 지닌 시비를 거느린 여인이 여전히
면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수년간 객잔에서 굴러먹은 그의 직감은 면사 여인
이 이제껏 보지 못한 미모를 지녔으리라 알려왔지만 그의 안력이 면사를 뚫을
정도가 되지 못하니 도무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얼쩡거리지 말고 술이나 더 가져오너라!"
주렴이 드리워진 벽 쪽 탁자에 자리한 면사 여인을 호위하듯 바로 앞 탁자에
둘러앉은 사내 중의 하나가 점원의 아쉬움을 깨끗이 날려 버리게 만들었다.
괜한 미련을 품느니 재빠르게 움직여 몇 푼 건지는 것이 훨씬 실속 있다는 것
을 깨달은 것이다.
"예, 예! 알았습니다요."
후원에 짐을 풀고 객청에 들어서자마자 술을 찾은 왕충삼을 사군명도 굳이 말
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군영이 있는 터라 수시로 관군이 왕래하는 시진에서 별다른
위험이 닥칠 것 같지 않은 까닭이었다.
오히려 주의를 준 것은 고승후였다.
"취하지는 말게. 뭐든 적당한 게 좋지만 특히 술이 과하면 화를 부르게 되네.
"알겠소. 알겠으니 잔소리 좀 그만 하시구려."
반갑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 건 투덜거리는 왕충삼에게 고승후가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던 순간이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고형 아니신가!"
일제히 고개를 돌린 일행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은 두 손을 벌리고 환한 웃음
을 짓고 있었다.
장검을 멘 어깨가 덕 벌어진 당당한 체구의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고승후도
반가운 인사를 던졌다.
"여기에서 황보형을 볼 줄은 몰랐소이다."
황보장운(皇甫長運)은 제남(濟南)의 명문 황보검가(皇甫劍家) 사람으로 당대
가주 황보장휘(皇甫長輝)의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비슷한 연배인 두 사람이 젊었던 시절, 견문을 넓히기 위해 강호로 나온 황보
장운이 녹림도와 싸움을 벌이던 표행을 만난 것이 처음 인연이었다.
다섯 명의 표사들 중 유일하게 자신과 비슷한 나이이고 사람됨이 점잖은 고승
후에게 호감을 느낀 황보장운이 기꺼이 목적지까지 동행해 주었고, 명가의 자
제답지 않게 의외로 소탈하고 의기가 넘치는 황보장운의 제의로 두 사람은 교
분을 맺게 된 것이다.
이후 제남을 들리는 길이면 반드시 만나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우정을 쌓아온
오랜 벗을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쳤으니 고승후의 얼굴에 화색이 돌 법도 했다
그러나, 고승후가 반가운 벗을 일행에게 인사시키려던 순간.
황보장운은 뜻밖의 말을 던졌다.
"참으로 다행이외다. 세권표국의 표사들이 무참히 당했다는 소리를 듣고 혹
고형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했거늘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게됐
으니 말이오."
"그게 무슨……?"
고승후뿐 아니라 일행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니, 모르셨소? 나도 도중에 들었는데 악불당과 또 다른 무리에게 세권표국
의 표행이 몰살당했다는 거요. 둘이나 당했는데 표풍일수 하지철과 번운수 구
정이 이끌던 표행이라지 아마. 안 그래도 일전에 고형이 표풍일수와 같은 조
라고 해서 난 고형도 변을 당한 줄로만 알았지 뭐요?"
순간, 구정과 같은 조에 속했던 팽상문의 안색이 변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나려는 것을 사군명이 남모르게 붙잡았다.
그리고는 태연히 말문을 열었다.
"세권표국이면 먼저 일하시던 곳 아닙니까?"
당성진의 사건 이후 더욱 자신의 책임을 실감하고 있는 사군명이 일행에게 주
의를 준 것이다.
그 역시 가슴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지만 표행의 비밀은 반드시 지켜야했다.
하지철, 구정과 함께 간 동료들은 물론이요 그의 손에 죽은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말뜻을 알아챈 고승후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가다듬었다.
"허험…… 그렇지. 석 달 전만 해도 생사를 함께 하던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니 믿을 수가 없구먼."
반가움이 커서인지 원래 성격이 대범해서인지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한 황보
장운은 태평스럽게 무릎을 쳤다.
"죽은 사람들에겐 안됐소 만 고형이 역시 천운이 따르는 사람이로구려. 십여
년 간 승승장구하던 세권표국에 그런 변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으며 하필 그
직전에 고형이 떠났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외다. 하하핫!"
속 모르고 대소를 터뜨린 황보장운은 그제야 일행을 돌아보며 고승후에게 물
었다.
"이분들은 누군지……?"
고승후는 항주를 떠날 때부터 입을 맞춘 대로 설명했다.
"표국을 그만 두고 항주 인근의 부호 척가장(戚家莊)에 몸을 담게 되었소. 나
처럼 모두 척가장의 식솔들인데 그 댁 손녀 분을 북경 외가댁까지 모시라는
명을 받고 가는 중이외다."
황보장운이 알리는 없지만 실제로 항주 교외에 사업을 그만두고 은퇴한 척연
구(戚演邱)라는 부호가 있기는 있었다.
그다지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지 않는 고승후의 몇 안 되는 오랜 친구에게 거
짓말을 하는 심사가 편할 리는 없지만 달리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말이 길어지면 그만큼 거짓말도 많아지겠기에 고승후는 황보장운의 일로 화제
를 돌렸다.
"한데 황보형은 어딜 가시는 길이었소?"
"곳곳의 친구들이나 만나려고 집을 나섰소 만 소림에서 악불당을 친다는 소식
을 듣고 적은 힘이나마 보태려 가던 길이었지. 이제야 무사한 줄 알았지만 고
형도 사고를 당한 줄 알고 있었으니 놈들을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지, 암!"
친구를 좋아하고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활달한 성품을 지닌 황보장운답다는
생각에 고승후는 새삼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황보장운의 눈가에 스친 쓸쓸한 기색을 고승후는 미처 보지 못했다.
"그랬구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당장 따라나서야겠지만 매인 몸이다 보니……
."
"괘념치 마시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니 무슨 상관이
있겠소."
유서 깊은 무림명가의 후손과 일개 표사가 교분을 맺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말끝을 흐리며 일행을 돌아보는 고승후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황보
장운은 흔쾌히 대답하고 자리를 피해 주었다.
"나는 길 건너 객잔에 여장을 풀었소. 일행이 있으시니 지금은 그냥 가겠소
만 이따가 꼭 들리시오. 죽은 줄 알았던 벗을 다시 만났으니 오늘 밤 그냥 넘
어가지는 않으리다. 하하핫!"
가볍게 포권하고 돌아서 나가는 황보장운의 모습이 사라지자 일행은 일시에
말을 잊었다.
이미 길을 나서기 전부터 예상했던 일이라 해도 동료들이 처참히 당했다는 소
식은 그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만약 사군명이 그들을 택하지 않았다면 그들 중 몇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
니었을 것이고 그들이 문제의 표물을 호송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어 나가는 순
간에는 당장 그들에게 닥칠 운명이었다.
첫댓글 기다리던 글이 빨리 올라와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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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없지만 좀 빨리 읽고 싶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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