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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포리 일원 문화공간 조성사업
2023년 10월 완공 31억여원 투입
관광자원 연계 경제 활성화 기대
고성 ‘화진포 셔우드 홀 문화공간’ 조성사업이 추진돼 금강산육로관광 중단,어획부진,제조업 부족 등으로 침체된 고성북부권을 활성화할 경제·관광거점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셔우드 홀 문화공간 조성사업은 거진읍 화포리 606번지 일원에 1274㎡ 규모의 셔우드 홀 기념관을 건립하고 인근에 순례길을 조성하는 것이다.
사업기간은 올해부터 2023년까지이며 도비 17억원 등 31억8500만원의 사업비가 투입된다.이달 중 공공건축 심의를 거쳐 연내 실시설계 착수,건축허가 등 인·허가 협의에 나선다.이어 내년 4월 착공해 2023년 10월 완공할 계획이다.지하 1층,지상 2층 규모의 기념관에는 전시공간,다목적홀,기프트숍,수장고 등이 들어선다.
순례길의 경우 선교사들이 걸었던 김일성별장~응봉~거진 숲길 구간 등에 스토리텔링을 입히고 안내표지판을 설치함은 물론 파고라,의자 등 휴식공간 보강을 통해 구축한다.기념관 개관에 맞춰 순례길도 관광자원화할 방침이다.
이번 사업은 결핵사업의 선구자이며 국내 ‘크리스마스실’의 창시자인 셔우드 홀 선교사에 관한 기념관과 순례길을 조성해 관광객 방문 증가,체류형 관광 정착을 유도하기 위해 추진된다.김일성별장~거진항 해양누리길과의 시너지효과도 기대된다.
김동완 군 관광과장은 “해양박물관·이기붕별장 등 화진포 관광자원,도내 최대 피톤치드 발생지역인 응봉과 셔우드 홀 문화공간을 연계해 차별화된 관광자원을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이동명 ldm@kado.net
화진포의 성 [30]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30] / 삽화 윤광자 화가
2021년 07월 12일(월) 10:23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벚꽃이 만발한 4월, 닥터 셔우드를 태운 배가 출항하였다. 배는 조선으로 가기 전에 일본에 들렸다. 일본은 동화 속 나라 같이 조용했다. 유명하다는 공원을 구경했는데 공원의 모든 것은 상징적인 축소판이었다. 작은 폭포수, 조그만 초원, 반달 같은 다리가 있는 호수, 낡은 벤치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놓여 있고 공원 한켠에 찻집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화로에 끓인 차를 손잡이 없는 찻잔에 받쳐 들고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벚꽃이 피는 계절에 많이 추는 ‘오사카 오도리’라는 민속춤도 구경하였다.
고베에서 우편물을 찾아 배의 정박시간이 길어 공원의 나무벤치에서 편지를 읽기로 하였다. 대부분의 편지는 환영과 격려를 주는 글이었으나 부담이 되는 편지도 있었다.
해주 선교병원에 있는 미국인 펄 런드(Pearl Lund) 간호 원장이 보낸 편지에는 닥터 셔우드 내외가 그곳에 얼마나 필요한 사람이고 모두가 도착할 날만 기다린다는 따뜻한 내용의 편지였다. 그러나 어떤 편지들은 혼란을 주었다. 그중 하나가 셔우드 어머니 닥터 로제타의 편지였다.
어머니는 아들 내외가 당연히 평양연합기독병원(Union Christian Hospital)에 와야 하는데 해주로 가게 된 것은 중대한 실수라고 했다. 아버지를 기념하여 지은 홀 기념병원이 1920년 평양 장로교와 통합하여 평양연합기독병원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아버지와 함께 평양 선교지를 개척하고 병원을 개원하여 많은 어려움을 딛고 섬기신 어머니의 주장은 타당했다.
그러나 임지 선택은 선교회가 한 것이다. 평양 병원은 이미 훌륭한 의료 선교사들로 인해 안정되었기에 셔우드 부부를 의료 사정이 열악한 해주로 보낸 것이다. 해주의 의료선교는 1909년부터 감리교 감독의 책임하에서 운영되었다. 그전에는 장로교 선교사들도 활동하였으니 중복을 피하기도 서로 합의를 하였다.
닥터 아더 노튼이 처음에 조그만 치료소를 개설했는데 환자들이 많아져서 1913년에 루이스 홈즈 노튼 기념병원( Louisa Holmes Norton Memorial Hospital)을 신축하여 발전시켰다. 이 병원은 해주지역 주민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지어졌다. 병상이 30개 정도뿐이라 환자들을 수용하기에는 부족해서 때로는 환자들을 방바닥에 눕히기도 했다.
해주에는 의료시설 이외의 교육시설도 필요했다. 여학교 학생이 100명, 남학교 학생이 280여 명이 있었다. 셔우드도 의사와 교사들이 부족한 해주에 가는 것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머니께 답장을 썼다.
“어머니, 아들 내외가 의사가 되어 부모님이 개척하신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어머니의 큰 기쁨이 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저희 부부를 해주로 보내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운한 마음을 푸시고 저희가 해주에서 귀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어머니는 이 편지를 받은 후 서운한 마음을 돌이키고 아들 내외가 해주에서 귀한 의료 선교사로 쓰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또 한 통의 편지는 해주병원의 닥터 김(김영진)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는 지금 혼자서 힘겹게 해주병원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닥터 노튼이 병원 일을 총괄하다가 세브란스로 갔고 그 후임 닥터 하이디도 2년 밖에 머물지 않았다.
닥터 김은 김창식 씨의 아들이다. 1894년 평양에서 기독교 박해가 있었을 때 그의 아버지 김창식은 초대 기독인으로 감옥에서 고문를 당하며 끝까지 믿음으로 아버지 닥터 홀을 도와 그 역경을 넘겼던 분이다.
그는 1901년 부목사가 되었다. 조선에 최초로 임명된 목사였다. 3년 후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감리교의 구역장이 되어 6년간 영변 구역에서 사역하였다. 마지막으로 맡은 교구가 해주였는데 지금은 은퇴하여 아들 닥터 김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닥터 김은 편지 말미에 이렇게 썼다.
“1890년대에 조선의 북쪽에 하나님을 전하다 순교하신 닥터 월리암 제임스 홀의 아들 셔우드와 조선 최초 김창식 목사의 아들 김영진이 의사가 되어 이제 해주에서 함께 환자들을 치료하게 해 주셔서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조선 북쪽 지방에서 기독교를 개척한 두 사람의 2세들이 합력하여 헌신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다른 편지들은 조언하거나 설득하는 내용들이었다.
“더 넓고 큰 지역을 택하지 않고 왜 조선이라는 좁고 고립된 지역을 택하셨나요?”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의학교 교수진에 합류하시면 좋았을 텐데요.”
“무슨 권한으로 젊은 아내를 그곳 벽지로 끌고 가서 ‘고독의 고통’을 받게 하려는 거요? 아내가 도중에 참지 못하면 임기도 못 채우고 돌아올지도 모르겠네…….”
“아이를 낳게 되면 함께 놀 서양인 친구도 없을 텐데 나중에 아이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부모로서 얼마나 무책임한 일이오?”
셔우드 내외는 일본의 한적한 공원에서 여러 편지를 읽으며 마음을 정리하였다. 지인들의 조언은 이미 결정한 조선 선교사의 길을 돌이키게 할 만큼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문득 40여 년 전, 조선에 초대 의료 선교사로 와서 수많은 핍박을 받으며 믿음의 뿌리를 내린 부모님을 생각했다. 부모님의 대를 이어 조선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을 결정한 것에 대한 아무런 후회가 없었다.
고베에서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탔다. 아버지 제임스 홀은 연안용 기선을 타고 조선에 왔다고 했지만, 셔우드 내외는 일본에서 출발하는 야간 연락선을 타고 조선 해협을 건넜다. 부산에 내려 열차를 타고 서울로 가기로 했다.
조선에 도착하던 날, 새벽에 일어났다. 갑판 위로 올라가니 배가 해안선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고 있었다.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먼 시야에 들어오는 당당한 조선의 해안선을 바라보았다. 셔우드는 가끔, 예로부터 수없이 전쟁에 시달린 요란한 이 땅이 어째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리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동이 틀 무렵 갑판 위에서 장엄한 해안선을 바라보며 그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배는 잔잔한 바다 물결을 가르고 해안의 산들을 행해 접근하고 있었다. 솟아오르는 아침 해가 물결에 반사되어 수면 위에 황금색 넓은 길이 생겼고 마치 그 길은 자신을 위해 펼쳐 져 있는 것 같았다. 멀리 구불구불한 소나무들이 만개한 분홍빛 산 벚꽃과 어울려 정말 아름다웠다. 해안선에 가까이 가자 수면에 반사된 산 벚나무의 꽃 그림자가 바다 위의 황금색 물길과 조화되어 절묘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셔우드는 넋을 잃고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감동은 조선에서 지냈던 소년 시절 추억과 어우러져 색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다. 잠에서 깬 매리언이 셔우드를 찾아 갑판 위로 올라왔는데 그 장엄한 광경이 사라진 뒤였다.
배가 해안선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자 벚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부산이 눈앞에 나타났다. 매리언은 감탄사를 연발하고 새로운 환경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매리언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셔우드도 기뻤다. 매리언이 말했다.
“당신은 부산에 도착하면 조선말로 신나게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나는 조선말을 하나도 할 줄 모르니 간단한 인사말 한마디만 가르쳐 주세요. 그래야 나도 조선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지요.”
나는 너무나 벅찬 마음에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준비성이 많은 매리언에게 장난기가 동해 버렸다.
“사람들이 아주 놀랄 쉬운 인사말이 있는 데 따라 해 볼래요?”
매리언은 고개를 끄떡거렸다.
“내가 잔나비요. (Nai ga Chan nab-e-o).”-(나는 원숭이입니다.)
매리언은 그 말 뜻도 모르고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이며 문장을 외웠다.
부산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어머니를 만났다. 친구분들과 함께 마중을 나오셨다. 셔우드는 16년 동안 조선을 떠나있어 조선말을 다 잊어버린 게 아닐까 걱정하였는데 사람들을 만나니 소년 시절에 하던 말투로 쉽게 말을 할 수 있었다.
매리언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외롭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그들이 “내가 잔나비요. (Nai ga Chan nab-e-o).”-하고 말하는 매리언의 말을 듣고 모두 웃음을 참느라 애쓰고 있었다.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한 어느 품위 있는 신사가 폭소를 터뜨리자 모두들 박장대소를 했다.
“아뿔사!”
그때서야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저지른 실수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당황했다.
화진포의 성 [31]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31] / 삽화 윤광자 화가
2021년 08월 05일(목) 11:02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로제타는 아들의 유치한 장난을 나무랐다. 셔우드는 변명할 여지가 없어 말장난한 것을 매리언에게 정중히 사과하였다. “내가 잔나비요.(Nai ga Chan nab-e-o).”라고 농담으로 한 말이 셔우드가 메리언에게 가르친 처음이자 마지막 조선말이 되고 말았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어머니는 메리언에게 사교적이고 품위 있는 조선말을 가르쳤다.
교인들은 벚꽃이 만발한 부산에서 두 신혼 의료선교사가 조선에 온 환영파티를 하겠다고 했지만 매리언은 공손하게 말했다.
“저희는 빨리 임지로 가서 일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 때 나이 드신 호주 출신의 선교사가 매리언에게 조언하였다.
“젊은 부인, 지금 당신은 시간을 따지지 않는 동양에 와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동양에서 오래 있고 싶으면 느긋하게 처신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도 제대로 못하고 귀국하게 될 수도 있어요.”
매리언은 실정을 잘 알려 준 선교사에게 감사하며 교인들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벚꽃이 만발한 공원은 환영파티 장소로 알맞은 곳이었다. 꽃향기가 가득한 공원에 미풍이 불어 벚꽃 잎이 눈송이처럼 날렸고 그 정경은 두 사람의 새로운 길을 축하해 주는 것 같았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인상 깊은 아름다운 환영파티였다.
파티가 끝나자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전속력으로 달렸고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보리밭 물결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셔우드는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 내가 조선으로 다시 돌아왔구나! 의료선교사가 되어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곁에 있는 아내에게도 이 벅찬 감정을 표현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매리언은 셔우드의 표정을 보며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살며시 손을 잡았다. 1910년, 14살의 소년이 공부하러 조선을 떠났다가 16년 만에 의료선교사가 되어 아내와 함께 돌아오게 하신 주님의 섭리에 깊이 감사드렸다.
서울역에 내리자 사방에서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잠시 후 인력거를 타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인력거는 대부분 1인용이었는데 로제타는 2인 왕진용을 구입하여 사용했다. 급한 왕진을 가야 할 경우 의사와 간호사가 함께 갈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인력거는 빠른 속도로 남대문은 통과하고 있었다. 메리언은 바깥 풍경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생각보다 건물이 현대식이고 도로가 큰 것에 놀랐다. 레일 위를 지나가는 전차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었고 자리가 비좁아 계단의 손잡이를 잡고 매달려 가는 승객들도 있었다.
그 예전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고 저주의 대상이던 전차를 생각하며 감회가 새로웠다. 전차가 처음 들어왔을 때 조선에 가뭄이 심했다. 점쟁이들은 비가 오지 않는 이유를 이 전차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전차를 거부하고 두려워할 즈음 끔찍한 사고가 발생하였다. 1899년 안개가 자욱한 여름날 아침에 일어났던 사고를 셔우드는 목격하였고 그 끔찍한 사고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조선의 우기는 더위와 습도가 심하다. 가뭄이 끝나고 장마가 오락가락했다. 조선 사람들은 딱딱한 목침을 베고 자는 것을 좋아하였다. 사람들은 더위를 참지 못하고 비가 그친 날 밤에 밖에 나와 쉬다가 전철 레일을 베고 잠이 든 것이다.
그 날은 유난히 아침에 짙은 안개가 차창을 덮고 있어 앞이 잘 안 보였다. 첫 전차가 레일을 베고 자는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레일을 베고 잠자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처참하게 머리를 잘렸다. 안개가 걷히고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분노하며 광폭해져서 전차를 전복시킨 후 불을 질렀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생각은 변하기 마련이다. ‘외국 마귀의 발명품’이라고 두려워하며 저주받던 전차는 이제 조선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도심을 달리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지나는 곳이 동대문인가요? 매리언의 질문에 셔우드는 지난날의 회상에서 깨어났다. 동대문은 남대문만큼 크진 않아도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동대문 옆의 경사진 언덕에 릴리언 해리스(Lillian Harris)기념병원이 있었다. 어머니 닥터 로제타는 이 병원의 원장이었다. 매리언이 다급하게 말했다.
“셔우드, 우리 내려서 걸어가요. 인부들에게 우리를 태운 인력거를 끌고 저 급한 경사를 올라가도록 할 수는 없어요! 너무 힘들 것 같아요.”
셔우드도 그 길을 걸어가고 싶었다. 매리언처럼 인력거꾼에 대한 동정심에서는 아니었다. 어렸을 적 그보다 더 가파른 경사진 곳도 다니는 인력거꾼은 힘이 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원장으로 있는 병원 건물을 멀리서 바라보며 걸어가고 싶었다. 남편을 하늘나라로 보내고도 하나뿐인 아들을 16년간 외국에 보내고 외로움을 달래며 사명감으로 일하신 어머니의 열정이 깃든 병원을 바라보며 걸어가고 싶었다.
가파른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니 병원과 어머니가 사는 셋집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나와서 환영해주었다. 손님들이 떠나자 어머니는 공식적으로 방문해야 할 곳을 설명해 주셨다.
영국 총영사관 하이 드레드를 만나고 영사관에 등록하는 일, 뉴욕에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감리교 감독 하버트 웰치 내외를 비롯해서 윤치호 선생을 찾아뵙는 일 등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만남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선교지인 해주를 속히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로제타도 승낙하였다. 그 당시 해주까지 철도가 연결되지 않아 사리원까지 가서 9명 정도 탈 수 있는 소형버스로 갔다.
강가에 도착하여 사람들은 힘을 모아 차를 밀어 나룻배에 실었고 소 2마리도 태웠다. 소와 같이 배를 타서 불안해하는 매리언에게 뱃사공이 마음을 놓으라고 손짓했다. 오히려 배가 심하게 흔들리면 소들이 자리를 이동하여 무게의 균형을 잡아 준다고 했다. 건장하고 믿음직한 사공들이 강의 급류를 잘 이용하여 배를 목적지까지 정확하게 대었다. 배에서 내려 다시 9인승 버스를 타고 해주 병원에 무사히 도착하여 안도의 숨을 쉬었다.
첫 임지 해주 병원의 간부진과 교인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남학교의 학생들이 일렬로 서서 멋지게 경례를 했다. 환영식이 끝나자 학교 이사회에서 셔우드를 남학교 교장으로 겸직 임명을 하겠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현재의 왁스(V.H.Wacks) 교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곧 이곳을 떠나게 되는데 후임 교장직을 맡을 마땅한 분이 없다는 것이다.
매리언은 명쾌하고 사리가 분명하다.
“영광스러운 직분이지만 우리는 의료선교사로 환자들을 돌보러 이곳에 왔으니 겸직할 경우 병원 일에 지장이 없는지 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사들은 교장을 해도 시간을 소비할 일은 별로 많지 않다며 승낙해 주길 간청했다. 교장직을 할 사람이 없다는데 환영인들 앞에서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시간과 장소가 적합하지 않았다. 셔우드는 교장직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함께 일할 사람을 소개받았다.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김창식 목사의 아들 닥터 김(김영진)이었다. 그는 셔우드의 두 손을 꽉 잡고 악수하며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하였다.
“당신들이 와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나는 이 병원을 혼자 힘으로 지탱할 수 없어 많은 고심 중에 있었습니다. 의학적으로 어려운 일들이 두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닥터 김과 함께 의료선교를 할 수 있게 되어 기쁘고 행운으로 여깁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처음에는 좀 쉬운 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환자 진료가 당신들의 의술로는 쉬운 일임에 틀림이 없을 겁니다.”
두 번째로 소개받은 사람은 제인 바로우(Jane Barlow) 양이었다. 그녀는 깔끔하고 깐깐한 성격의 독신녀였다. 처음 만난 우리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두 분이 주님 사업에 더욱 열중할 수 있도록 자녀를 두지 않아 기쁩니다.”
매리언은 상황에 따라 대응하는 재치가 있다.
“미스 바로우, 그 점이라면 아마도 당신을 실망시켜 드릴지도 모르겠어요.”
뒤에 서 있던 의정 여학교 교장인 벨 오버머(Bell Ovrman) 양이 웃음을 띠고 있었다. 곧 교대할 왁스 목사 부부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왁스 목사는 조선 사람들에게 ‘모터사이클’ 선교사라고 불리고 있었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선교구역을 돌아다녔는데 어린이들을 자주 태워주어 아이들이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왁스 목사는 언덕 위의 커다란 벽돌집을 쓰라고 했지만 셔우드 내외는 여선교사들의 집과 가까운 ‘가운데 집’ 이라 불리는 돌로 지은 오두막집을 택했다. 아름다운 노란색 장미가 집 입구에 만발해 있었다.
닥터 김과 간호원장 런드양의 안내를 받으며 병원을 둘러보았다. 작은 2층 건물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나 의약품과 의료기구들이 많이 부족하였다. 3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입원실은 응급환자들이 많아 늘 자리가 모자란다고 한다. 매리언은 외과 닥터라 수술실에 관심이 많았다. 수술실이 어두워 세밀한 수술을 하려면 조명이 많이 미흡했다.
왜래 환자 대기실은 환자들이 도착하기 전 이른 아침에는 병원 직원들의 예배 장소로 쓰고 있었다. 환자들이 도착하면 전도사들이 환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마음을 위로해 주는 일을 하도록 했다. 병의 치료는 마음의 치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닥터 노튼(A. H. Norton) 의 세심한 치료방침을 알 수 있었다.
병원을 살펴보고 매리언은 조선어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다. 환자들의 아픈 부분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환자들과 의사소통이 필요했다.
병원이 낮 설고 여러모로 안정되지 않아 어려운 일들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해주에서의 의료선교사의 길을 하나님께서 맡아달라고 기도하였다. 새 임지에 대한 두려움도 크고 그들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마음이 평안해지고 알 수 없는 힘과 기쁨이 밀려왔다.
화진포의 성 [32]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32] / 삽화 윤광자 화가
2021년 08월 25일(수) 10:47 [강원고성신문]
ⓒ 강원고성신문
조선으로 초기에 온 선교사들은 조선어를 혼자 공부해야 했다. 먼저 온 선배 선교사들에게 배우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독학이 많았다. 1919년 신교복음연합회에서 단기간의 ‘조선어교육과정’을 개설하여 봄가을에 각각 2개월간 조선어 학습시간을 마련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3년 과정이었으며 선교사들은 임무를 시작하기 전에 의무적으로 첫 학기를 마쳐야 했다.
셔우드 홀은 아내 매리언과 조선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을 조선에서 보냈으므로 조선어(한글) 배우는 일은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어렸을 때 한 말은 ‘아이들의 말’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도 어릴 적 어머니를 방문했던 점잖은 분들께 버릇없게 말해서 그들을 대경실색하게 했을 것이다.
조선말은 어른들에게 ‘앉으십시오!’ 라고 경어를 써하는데 ‘앉아라!’ 라고 말한 것이다. 중간 정도의 경칭인 ‘앉으세요!’ 라고 말했어도 좋았을 것을. 그들은 아마도 서양의 야만스런 아이들이 어찌 조선 아이들처럼 경어를 쓸 줄 알겠느냐며 눈 감아 주었을 것이다.
어릴 적 기억나는 일로 한 번은 조선의 양반이 셔우드에게 경어를 쓰지 않는다고 야단을 쳤다. 셔우드는 오히려 이렇게 항의했다.
“나에게 경어를 써주면 내가 경어를 더 잘 배울 수 있지 않겠어요?”
이미 습관으로 굳은 말투를 고치는 것은 새로 배우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다.
몇 주가 지나자 매리언은 한글의 자음 모음을 깨우치고 언어 구사력을 경쾌하게 하며 셔우드를 앞질러 가더니 품위 있는 말로 충고해 주기까지 했다.
그들에게는 아펜셀러와 언더우드 같은 뛰어난 선생님들이 계셨다. 신중하고도 능숙하게 가르쳐주었고, 학자이며 조선말 교과서를 쓴 찰리 샤우어(Charlie Sauer) 선교사는 많은 조언을 해 주었다.
“어떤 조선인 선생이 영어가 부족하여 기묘한 영어로 통역이나 번역을 하더라도 절대로 웃지 마세요. 웃게 되면 그 사람의 체면을 깎는 것이 됩니다. 체면을 손상당한다는 것은 자존심을 상하는 일이 되고 상대방이 마음을 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조선인 선생님이 강의를 하는 시간이면 웃지 않으려고 마음을 무장하고 교실에 들어갔다. 조선어학교 교장인 쿤즈(E. W. Koons) 박사는 서울 경신학교의 교장이었다. 그는 도표와 재미있는 사례를 들어서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가르치는 재능이 있는 훌륭한 선생님이셨다.
이렇게 훌륭한 선생님들께 조선어를 배우고 있던 기간에 조선은 역사적인 격동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씨 왕조의 27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순종황제가 1926년 4월 25일 서거했다. 국장은 조선의 관습에 따라 보름 정도의 기일이 지난 후 장례를 치른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애국자들이 이 기간에 예전 고종 승하 시 일어났던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같은 운동을 또 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고종황제는 일본인들의 압박이 심해지자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국제평화회의’에 비밀리에 세 사람의 밀사를 파견하였다. 일본이 물러가게 해달라는 청원이 거절되자 밀사 가운데 한 사람인 ‘이 준’이 세계대표들 앞에서 배를 갈라 자결을 하였다. 이에 경악한 일본 관리들은 1907년 7월 19일, 왕위를 순종에게 강제로 양위시켰다. 그리고 조선을 일본에 합병시킬 음모를 꾀하였다. 그 후 1910년 8월 22일 공식적으로 조선을 일본에 합병시켜 이 씨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조선의 애국자들은 오백 년 이어온 나라를 되찾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 웰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발표했다. 국가의 자기결정권을 중시하고 경계를 재정립하여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고 평화롭고 상호적인 관계를 증진하자는 이 원칙에 조선의 애국자들은 힘을 얻었다. 이 기회에 전 세계에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강압정책을 알려서 국제적인 비난 여론을 일으키게 하여 일본이 조선을 포기하게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33명의 조선 애국자들이 비밀리에 독립선언문을 만들어 서명하고 인쇄하여 조선 방방곡곡에 돌려 고종임금의 장례식 며칠 전인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민중 앞에서 낭독하였다. 그 33인은 기독교인 16명, 천도교인 15명, 불교 계통이 2명이었다. 이 선언은 전 세계를 향한 부르짖음이었다.
“조선은 독립국가로서 자유권이 있으며 일본에 부당하게 합병되었다.”라는 사실을 알리는 부르짖음이었다. 이 선언서는 주요 열강의 정부들에게 발송되었고 조선의 각 지방에서도 그 지역 지도자들에 의해 낭송되었다.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던지 남녀노소, 아이 어른 모두 거리에 나와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 소리가 거리에 진동하고 일본에 의해 금지되었던 태극기가 거리에 나부꼈다.
이에 경악한 일본 관리들은 33인을 체포하라고 통고하였고 비폭력 평화적인 시위였음에도 일본은 무자비한 보복을 하여 많은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죽였다. 이 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되고 죽임을 당했다. 조선 민중들은 처음으로 기독교인들도 조선의 애국자라는 것을 인식했다.
이 독립 시위는 비록 완전한 자유를 찾지는 못했지만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책을 바꾸게 했다. 사이토 마토코가 조선 총독에 임명되었는데 그의 정책은 전임자들보다 부드럽고 회유적이었으며 주 관심사가 교육이었다. 그가 처음에 조선으로 올 때는 학교가 250개 정도였는데, 다섯 배 정도가 늘어났고 신학문의 열기가 조선에 퍼지게 되었다.
순종황제 장례식 날 일본은 지난번 같은 시위가 일어날까 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중에 듣게 되었지만 실제로 1919년 고종 승하 시 만세운동과 비슷하게 학생들이 배일선언 인쇄물을 준비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준비했었는데 일본 경찰들이 사전에 철저하게 제압하여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순종 왕의 장례행렬은 웅장했다. 일본 경찰은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동안에 거리에 나오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시위가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셔우드 부부는 어머니가 근무하는 동대문 부근의 높은 병원 마당에서 동대문을 지나 왕가의 묘지 금곡으로 가는 긴 장례행렬을 모두 구경할 수 있었다.
맨 앞에 기마 경찰이 나타났다. 검은 정복을 입고 칼을 들고 줄을 서서 걸어갔다. 그 뒤로 군경들이 말을 타고 따르고 만장을 든 많은 사람들이 따라갔다. 악귀를 쫓아낸다는 무시무시한 가면을 쓴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고 순종황제의 시신을 실은 거대한 붉은 상여가 지나갔다. 맨 앞에서 베로 만든 뾰족한 모자를 쓰고 곡을 선창하는 사람이 있고 호곡하는 사람들이 상여 양편에 늘어서서 ‘아이고, 아이고’를 연방하며 울면서 걸어갔다.
관은 서로 교차하는 나무 장대들 위에 안치되어 있었고 장대에 연결된 끈들을 어깨에 걸치고 190여 명의 사람들이 무겁고 큰 왕의 상여를 질서 정연하게 운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상여의 전면과 후면에 올라가서 종을 흔들며 운구하는 사람들의 걸음에 박자를 맞춰 주었다. 그 다음으로 왕가의 여자들이 가마를 타고 따르고 가마 뒤를 왕실의 친척들, 정부 요인들이 인력거를 타고 따르고 있었다. 이 장례의 행렬은 무려 2킬로미터나 되었다.
셔우드 부부는 조선어학교를 다니느라 임지 해주에 가기 전에 조선 왕조 마지막 왕의 장례식을 볼 수있는 특별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매리언에게 많은 소재를 제공해 주었다. 왕가의 거창한 장례식, 옛 전통의 화려함의 마지막을 눈으로 확인하고 자료를 남길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드디어 조선어학교의 첫 학기가 끝났다. 공부는 힘들었으나 오랫동안 우정과 의료선교정보를 나눌 수 있었고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서 기뻤다. 임지로 떠나기 전, 셔우드 내외는 어머니를 모시고 미국영사관 뜰에서 열린 서울 여성클럽의 연례파티에 참석하였다.
여름철이 시작되는 계절이었으므로 대화는 자연히 여름 휴가지를 정하는 일에 집중되었다. 사람들은 셔우드에게도 휴가장소를 추천해 주었는데 서쪽 ‘소래해변’과 동해안 ‘원산해변’을 추천했다.
그러나 아직 휴가를 즐길만한 여유는 없었다. 어서 해주로 가서 병원의 상황을 파악하고 힘겹게 준비한 의료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하고 싶었다. 그러나 셔우드는 해주에 가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아내 매리언에게 자신이 태어난 서울의 집을 보여주고 싶었다.
화진포의 성 [33]
-닥터 홀 가의 감동적인 의료선교 이야기
황연옥 작가의 전기소설(傳記小說) 연재 [33] / 삽화 윤광자 화가
2021년 09월 06일(월) 11:46 [강원고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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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우드, 네가 태어난 집이 있던 자리에 신식 건물이 들어선다는 소문을 들었어! 다음에 가 본다고 미루다가 어쩌면 생가를 못 볼 수도 있어.”
어느 날, 어머니의 말을 듣고 셔우드는 아내와 서둘러 생가를 찾아갔다.
집은 그리 크지 않았다. 오래된 한옥이었으나 편안하였고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기와지붕의 끝이 하늘을 향했는데 그 선이 고아해 보였다. 천장 가운데 커다란 나무 대들보가 있고 대들보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지붕을 받쳐주는 나무 기둥 서까래를 경사지게 눕혀서 겉으로 드러나게 했다. 집을 몸이라고 생각한다면 서까래는 척추에 붙어있는 갈비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셔우드는 자신이 태어난 방과 아버지 닥터 홀이 돌아가셨다는 방도 구경했다. 이 집은 아버지가 태어난 캐나다의 통나무집과 비슷하게 만든 동양식 가옥이다. 선교사 생활 초기에 불편을 감수하며 이 집에 살면서 조선을 위해 헌신했을 부모님의 젊은 날들이 머릿속에 그려져 셔우드는 가슴이 먹먹했다.
부모님은 신혼인 노블 목사 내외와 함께 이 집에서 살았고 노블 목사의 딸이 태어날 때도 이 집에서 어머니가 출산을 도왔다고 한다. 청일 전쟁의 발발로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날 저녁에 딸이 태어난 것이다.
셔우드는 소년 시절부터 노블 목사의 부인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인은 두 아이를 아주 어릴 때 잃었는데도 슬픔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의연한 모습과 후덕한 인격에 많은 힘을 얻었던 일이 기억났다.
“해주로 가기 전에 노블 목사님 내외분을 한 번 찾아뵙시다.”
생가를 다녀오면서 두 사람은 노블 목사 댁을 방문했다. 부인은 외출 중이었고 노블 목사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메리언은 선교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을 말씀해 달라고 하였다.
“돈이란 선교사가 되기 전까지는 개인 생활에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당신들의 생활에서 선교 사업을 위한 자금 외에는 돈이 차지하는 가치는 점점 작아질 것입니다. 모든 선교사들의 기본 급료는 같아요. 두 사람은 의사이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선교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급료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미국에서 전문의로 살아간다면 호화로운 생활을 하겠지만 어쩌면 이제는 미국 친구들이 보내주는 헌 옷도 고맙게 받아야 합니다.”
노블 목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경청하는 셔우드 부부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낮은 자세로 있을 때 병든 사람들이 치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가까워지게 할 수 있습니다. 진실하고 정직한 선교사가 되는 길은 항상 기도하며 처음 마음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태도입니다. 선교 사업이란 하나님을 위한 일이고 봉사하는 것이며 개인의 야심을 위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런 가운데 진정한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노블 목사는 이 밖에도 선교사들이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토록 진지한 조언은 선교사로 첫발을 내딛는 셔우드 부부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두 사람은 담대하게 선교지로 갈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1926년 6월 29일, 제물포에서 해주행 기선을 탔다. 배는 험한 해안선을 따라 아름다운 섬 사이를 들락날락하며 항해했다.
해주에 도착하자 닥터 김은 홀 내외가 이 도시의 중요한 관리들을 방문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방문하는 분마다 환대를 해주었다. 특히 황해도 박 지사는 소년 시절의 셔우드를 알고 있다며 반가워하였다. 일본인 경찰국장 사사키는 아내가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어 외로워하는데 메리언이 자신의 아내와 좋은 친구가 되어주길 부탁하였다. 그들을 사귀며 우정을 쌓았고 이 우정은 선교 사업뿐만 아니라 셔우드가 훗날 어려움을 당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아직 짐을 채 풀기도 전인데 산부인과 병동에서 긴급히 메리언을 찾는 기별이 왔다. 메리언은 재빨리 청진기를 들고 달려갔다. 산기가 있는 임산부가 분만을 못하고 있었다. 태아가 잘못 나오고 있었다. 아기가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한 메리언은 태아를 바로잡아 무사히 분만시켰다. 사내아이였다. 그 아이가 아들인 것은 메리언의 공로가 아닌데도 마치 메리언이 아들을 만들어 낸 것처럼 가족들은 고마워했다.
“서양에서 온 여자 의사가 아기를 잘 받아낸대요. 받는 아이마다 거의 아들이라네요!”
이러한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메리언은 아기를 낳는 곳마다 불려 다니느라 밤잠을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기들은 주로 한밤중에 태어나는 아이가 많았다.
셔우드는 학교 일로 긴급 연락을 받았다. 남학교 교장직을 맡고 있는 그에게 교무부장이 와서 무단결근을 자주 하는 근무 태만한 교사를 당장 파면시켜 달라고 하였다. 집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교사를 파면시켜야 한다는 것은 정말 꺼림칙한 일이었다. 학교까지 천천히 걸어가며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며 지혜를 주시길 기도했다. 처음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교장으로서의 역량이 평가될 것이다.
교무실에 들어서자 무거운 분위기로 꽉 차 있었다. 교무주임의 얼굴은 화가 난 표정이었고 당사자 김 교사는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좋은 결말을 내리기란 몹시 힘들다.
“이런 분위기에서 새 교장을 대면하는 것은 별로 좋은 것 같지 않네요. 우선 차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셔우드는 부드러운 이야기를 하며 교무부장의 가족 상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는 아내와 네 명의 아들이 있다고 하였다. “그렇군요. 다복하시네요.” 하고 치하를 했다. 다음은 파면 대상인 교사의 가족 상황을 물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슬픔을 억제하기가 힘들어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얼마 전에 아내가 폐병으로 죽었습니다. 지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같은 병에 걸렸는데 아이를 간호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최근에 결근을 자주 했습니다.”
“그렇다면 교무주임에게 어째서 그런 사정을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교무부장은 얼굴색이 조금 변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고조되었던 감정들이 수그러들고 모두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김 교사가 말을 이어갔다.
“교장선생님, 남쪽 사람들이 문둥병을 수치로 생각하는 것처럼(당시 남쪽 지방에는 나병환자가 많았다.) 북쪽 사람들은 폐병에 걸린 것을 수치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안 식구들이 폐병에 걸려도 비밀로 하고 남에게 말을 할 수 없답니다.”
셔우드는 닥터 김에게 직원의 자녀이니 김 교사의 아들을 특별 병동에 입원시켜 주길 부탁했다. 닥터 김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병원 방침이 폐결핵 환자를 받을 수는 없지만 그 아이를 비어 있는 격리병동에 입원시키겠다고 하였다. 모두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김 교사의 얼굴은 기쁨과 안도감으로 빛났으며 교무부장의 체면도 살아났다. 셔우드는 힘든 학교의 첫 번째 난관을 성공적으로 잘 통과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셔우드는 석유 등잔 앞에 앉아서 몇 사람의 지인들에게 간절한 편지를 썼다. 낮에 있었던 교사의 아들 같은 폐결핵 환자들을 위한 작은 병동을 지을 수 있는 자금을 모금하는 호소의 편지였다. 첫 번째의 업무가 자신이 늘 생각하던 폐결핵 환자를 위한 결핵요양소와 연관된 일이었지만 결핵요양소를 짓는 일은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음날 매리언과 함께 병원으로 출근했다. 난치병 환자부터 회진을 시작하였다. 첫날의 회진에서 의사로서의 많은 역량과 전문성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셔우드 부부는 청진기를 꺼내며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주님, 환자들의 병을 오진하지 않게 해 주시고 이 청진기로 환자의 병세를 정확하게 판단하게 도와주옵소서!”
셔우드 부부는 자신들을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들을 대할 때마다 문득 직업상의 고독함을 느꼈다. 환자의 생명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고 여기에는 물어볼 선생님도 없고 의논할 의사들도 없다. 의료 기구도 충분하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환자들의 생사 여부가 그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에 작은 공포감이 밀려왔다. 이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따뜻한 소리가 있었다.
‘너희는 지금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도와주시고 함께 계시지 않느냐. 두려워하지 말거라!’
그 순간 셔우드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마음에 평안이 오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메리언의 얼굴에도 평안이 찾아왔다. 환자가 너무나 많아 메리언은 여자 환자와 어린이들을 맡았고 셔우드는 남자 환자를 맡았다.
어느 날, 밖이 소란해서 나가보니 호랑이에게 물려 심하게 다친 응급환자가 들것에 실려 왔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