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역
문혜진
마주 앉아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지금 바깥을 휘젓는
허공의 이빨들
우리가 갈아 치운 변죽들
낮달이 새의 자장으로 풀어질 때
연쇄 부도처럼
푹푹 내려앉는
선로의 열기
어디선가 갈아타야 할 것만 같은데
창밖을 내다봐도 글자는 빠르게 뭉개지고
시위대가 깃발을 들고 객차 안으로 밀려든다
지상의 열기가
이마에 묶인 끈으로 조여 오고
바지 뒷주머니
불룩한 약봉지와 낡은 지갑, 채무 고지서
남자의 다리에 올려진 『전세 지옥』 책 띠지에는
“1991년생인 저자는 전세 사기 피해자로 보낸 820일을 기록해 책을 펴냈다.”
열차는 빠르게 어둠의 터널로 미끄러져 간다
들어오지 마시라고요! 기절할 것 같다고요!
누군가 비명을 지른다
허옇게 질린 얼굴로
납작하게 휘청이다 떠밀리는 사람들
반대편 창문에 휙 지나가는 얼굴이
희끗 텅 빈 시선을 붙든다
마찰 없이 사람들 사이를 뚫고
미끄러지듯 사라진다
고압선, 보이지 않는 불꽃이 정수리 위를 지나간다
지상에서 이미 갈아탔어야 했을지도
잠들어 깨어날 것 같지 않은 어깨를 밀치고
남자가 후다닥
닫히는 출입문으로 튕겨 나간다
열차는 플랫폼에 미끄러지고
폭죽을 가진 남자는
작열하는
열차를 향해 돌진한다
쇠 긁는 소리
우두두 빠진 허공의 이빨들이 나뒹굴며 우물거리고 있었다
마주 앉아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