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2024.2.16.) 말씀 / 사사시 6: 11-16 인생의 가장 큰 축복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12)
여러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떻게 살면 축복받은 인생이 될까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돈 많이 벌고 성공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살다 죽는 것입니까? 아니면 나는 희생하며 살더라도 무엇인가 세상에 많이 기여하며 사는 것입니까? 지나가는 한 세상에서는 어느 것도 온전한 축복은 없습니다.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께 붙잡혀 쓰임받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기준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성공 자나 실패 자나 죽으면 끝입니다. 결국은 일반입니다. 전도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전도서 9:2) 그는 왕으로써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눈이 원하는 대로 다 하고 누려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해 아래 수고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였습니다(전도서 1-2장). 30세의 젊은 나이에 세계를 정복하고 죽은 알렉산더 대왕은 죽을 때 관에 구멍을 뚫어 자신의 손을 밖으로 내어놓으라고 유언했습니다. 인생인 빈손으로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공자자 실패자나 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멋져 보여도 결국은 허무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들려 쓰임받는 자는 다릅니다. 자신의 구원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비록 자신은 부족하고 겉으로 별 볼일 없어도 최상의 열매를 맺으며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나고, 결과도 허무하지 않고 영광스럽습니다. 성경도 그렇게 하나님께 붙들려 귀하게 쓰임을 받은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일강에 버려져 죽을 운명의 노예 자식인 모세, 이새의 일곱째 막내 아들로 무시받던 다윗, 두려워 포즙틀에서 밀을 타작하다 부름부음 받은 기드온, 뽕나무 배양하다가 부름받은 하박국이나, 시골처녀 마리아,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던 어부 베드로 등등 가문이나 족벌이나 세상에 나타낼 것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하나님께 붙잡혀 귀하께 쓰임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후회 없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다갔습니다. 기드온도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11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아직 이스라엘이 건국하기 전이라 왕도 없고, 하나님의 사사들이 다스리던 사사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정착하지 못하고 주변 나라들에 의해서 침략을 받으며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추수를 할 때쯤 되면 주변 강국들이 쳐들어와서 곡식이며 짐승을 약탈해갔습니다. 청년 기드온도 너무 두려워서 소리 없이 하려고 밀을 포도즙틀 안에서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메시지를 전해주셨습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기드온은 이런 갑작스런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가 되기보다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왜 이런 일이 생겼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말한 출애굽의 이적은 어디 있으며, 오늘날 이렇게 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이런한 그에게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시고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그 때 기드온이 다시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고백합니다.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은 므낫세 중에 극히 작고, 아비집은 그 중에서도 제일 작다고 했습니다. 제일 작은 지파 제일 약한 가문에 제일 두려움 많은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느냐는 것입니다. 큰 용사가 자기와는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기드온의 고백과 심정은 오늘날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돌아보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같을 것입니다. ‘나같은 자가 뭘 할 수 있느냐?’ 그래서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릅니다. 저도 제 처지를 보니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문도 학벌도, 재물도, 인간적 능력도 성격도 소심한데다다 선후배 관계도 없고 대학 사년 졸업하고 일단 취업을 해볼까 생각했는데 어디 마땅히 들어갈때가 없었습니다. 이런 내가 과연 목사가될 수 있을까? 그런데 목자가 되겠다고 결심만 했는데 면접도 안보고 합격시켜 주셨습니다. 이름도 빛도 없어는데 ‘큰 용사’라,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중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하신 말슴이 무엇인가 16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내가 너를 붙잡고 쓰겠다는 것입니다. 너의 약하고 부족한 것이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치듯 하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이 틀린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까? 창세기 1장 가라사데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모든 말씀 하실 때마다 다 ‘그대로 되니라’ 하였습니다. 기드온도 마찬가지로 순종만 하면 그대로 큰 용사가 되어 쓰임받는 것입니다.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사사기 7장을 보면 300 용사만으로 메뚜기떼 같은 아말렉 군대를 섬멸하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쟁은 단지 부족 간에, 나라 간 국가 간에 실리를 따지는 그런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고 영적이 터가 세워지는 중요한 전쟁이었고 여기에 기드온은 하나님 말씀대로 큰 용사가 되어 백성을 구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도 연약하고 부족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이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얼마던지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똑똑하고 강하다고 자랑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약하다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인생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혀 쓰임 받는 인생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29살에 제주도로 가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첫 제자 다섯명을 키웠는데 그중에 안드레 목자는 첫 조상으로 소감발표 때마다 자신도 목사님처럼 스텝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조마가 목자는 마음이 여리고 순하였습니다. 소감발표하면서 제 앞에서 가정이야기를 하면 눈물을 짰습니다. 제가 6년 사역을 마치고 청계로 오게 되었을 때 후계자를 세워야 하는데 저는 적극적이고 대보도 있는 안드레가 목자 적임이라고 생각하고 추천하였는데 광주의 이여호수아 목자님은 마가가 내면성이 있다고 마가를 추천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보기와 달리 아주 성실하게 역사를 잘 섬기는 것입니다. 이번 전국 학생 수양회 경주에서 열렸는데 대학생들 20여명을 훈련하여 합창하는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너무 제자양성을 잘 하는 것을 보고 사라사모에게 양이고 제자이지만 존경스럽게까지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면 약하고 소시민적인 사람도 용사로 쓰임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세기 성녀로 불리우는 테레사는 ‘소박한 기적’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우리 주님이 쥐고 있는 몽당연필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연필을 자를 수도 있고 깎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무언가 쓰고 싶으면 쓰시고 그리고 싶으면 그리실겁니다. 멋진 그림을 보거나 감동적인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미술 도구나 연필을 칭찬하지 않고 그것을 사용해서 작품을 만든 사람에 대하여 감탄합니다. 온갖 명예와 영광이 영원히 우리 주 하나님께 함께 하기를!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까? 그들은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되지 않았다단 말입니까? 그럴리가요. 가난한 사람들도 인간이고 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구하나 거들떠 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는 바로 그 일을 하라고 저를 사용하셨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자신을 보잘것없는 몽당연필이라 하였습니다. 키가 150cm 정도 단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신 영적 거인입니다. 그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 역시 큰 일은 못하고 인도 캘거다 거리에서 죽어가는 한 사람을 데려다 보살피는 일부터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몽당연필 같은 자를 들어 쓰실 때 20세기 성녀라 불리울 만큼 큰 일을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 자신이 작고 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우리를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철부지 아이의 손에 있으면 부러져 못 쓰는 몽당연필이 될 수도 있고, 훌륭한 문학가의 손에 잡히면 한강처럼 노벨평화상을 받는 문학작품을 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부름받아 기드온처럼 쓰임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특별한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받는 사람들은 작은 것부터 겸손히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전 세계 160여개국 1억명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사랑받고 있는 작가 파울로 코넬료의 글에도 연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할머니가 연필로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어린 손자가 다가와서 묻습니다. “할머니 무슨 이야기를 쓰고 계세요” 할머니는 쓰던 손길을 멈추고 손자에게 대답합니다. “그래 너에 대한 이야기란다. 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쓰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쓰고 있는 이 연필이란다. 이 할머니는 네가 커서 이 연필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할머니! 하지만 늘 보던 연필이랑 다를게 하나도 없는데요!” “그건 네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거란다. 연필에는 다섯 가지 특징이 있지. 그걸 네 것으로 할 수 있다면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게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연필로 다섯가지 인생의 귀한 교훈을 말해주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누군가에게 붙들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연필은 제 스스로 가치보다 누군가에 붙잡혀 쓰여지는가에 그 가치가 결정됩니다. 사람도 누군가가 붙들어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 누군가의 최고의 존재에 붙잡혀 쓰여질 때 최고의 가치 존재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존재가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나님이 당신 뜻대로 나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좋은 기계 몇 천 만원 기계라도 사람에게 붙잡히지 않으면 고철덩이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붙들려야 귀하게 쓰임 받는 인생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한 세상에 쾌락을 누리며 살다가 끝나는 소모품과 같은 인생으로 끝나게 됩니다. 니체는 이런 인간을 두가지 인간 유형중에 종말형 인간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결코 버려진 몽당연필 처럼 뒹굴다가 버려지는 종말 형 인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는 가끔 쓰던 걸 멈추고 연필을 깎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깎여지지 않은 연필은 쓸 수가 없는 것처럼 단련되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어디에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에게 깎아내는 고통의 시간들을 주시기도 하는데 당장은 좀 아파도 그것은 더 예리하게 쓰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 고통의 시간 어둔밤이 왔을 때 그 아픔을 잘 견뎌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귀하게 쓰임맏을 수 있습니다. 이따금은 더 예리해지고 성숙해지기 위해서 연단의 과정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 시련이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자기 성찰의 기회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연필에는 실수를 지울 수 있도록 지우개가 달려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르게 쓰려고 해도 때로는 잘못 쓰여 질 수가 있습니다. 그 때 지우개가 필요합니다. 사람도 때로는 잘해보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큰 실수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잘못을 저지르고 실수를 했다 해도 그 자리 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면 안 됩니다. 설령 실수와 잘못이 있었다 해도 반성하고 뉘우치고 다시 시작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다시 시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십지가에 보혈이 그 지우개 아닙니까? 휜 눈보다 깨끗하게 양털보다 희게 씻어주시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렇게 가끔 실수도 하고 잘 못 할 때 겸손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주께 나아가면 됩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언제나 새로운 시작입니다. 네 번째는 연필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 안에 든 심이라는 것입니다. 겉모양이 화려하고 보기 좋아도 심이 약해서 쉽게 부러진다면 누가 그 연필을 좋아하겠습니까? 외피는 계속 깍아내고 결국 쓰는 것은 심입니다. 볼펜도 살 때 외피보다 잉크가 부드럽게 잘 나가는가 살펴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모가 화려하고 겉모양 스펙이 좋아도 그 사람이 인격이나 성품이 잘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쓰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내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도 치장이 아니라 내면의 성숙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묵상하고 독서를 하고 사랑으로 실천하면서 거룩한 인성과 영성을 가꾸어 나가는데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맨몸으로 승부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연필은 항상 흔적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말하고 행하는 모든 일 모든 삶에 흔적을 남긴다는 걸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 늘 의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다음 사람이 보고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연필이 지나간 자리에는 쓸데 없는 낙서도 있고, 그림도 있고, 유명인의 싸인도 있고 시 수필 소설, 중대한 계약도 남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자취는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것도 있고 어떤 연필 자욱은 몇 천 만원, 몇 억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말씀이 남기도 합니다. 사람이 지나간 자리 어떤 모양이던 자취가 남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취를 남겨야겠습니까? 서산 대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뒤에 누가 따라올지 모르니 눈 길을 걸어도 바르게 걸으라! <답설야> 눈덮힌 들판을 걸어갈 때 / 이리저리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 뒷 사람의이정표가 되리리 결론적으로 인생은 누구가 똑같습니다. 태어나서 병들고 늙고 죽고... 건강 능력 지혜 거기가 거기입니다. 나중에 다 달라서 버려지는 몽당연필 같은 존재가 됩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옛날 어린 시절에는 이런 몽당연필을 시용하였습니다. 너무 작아서 볼펜껍데기에 끼워서 쓰기도 하였고, 연필심이 안 좋으면 침을 묻혀서 쓰기도 하였습니다. 운동회나 소풍이 가면 연필 몇 자루를 상으로 받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 달리기도 하였습니다. 몽당연필 그 자체로 가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누가 붙잡고 쓰는가에 따라서 결과는 상상을 못할 정도로 차이가나게 됩니다. 그런 몽당연필과 같은 존재인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 붙들려 쓰임 받는다면 그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면 누구나 귀한 존재가 됩니다. 예레미아는 하나님이 자신의 부르심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1:5) 저와 여러분 모두 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하나님께 붙잡혀 쓰임 받는 가장 축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