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꽃, 영암 답사를 마치고/ 안성환
사단법인 울산문화아카데미 회원 44명은 상반기 마지막 답사로 ‘남도의 꽃’ 영암을 찾아 1박 2일간 뜻깊은 여정을 마쳤다.
남도의 봄은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그 길 위에 선 우리는 단순한 답사자가 아니었다. 역사와 자연, 사람과 예술을 함께 누리는 인문학의 여행자였다. 이번 답사에는 경주이씨 영암문중의 따뜻한 환영과 협찬이 더해졌고, 지난해 우리 아카데미에서 특강을 해주셨던 이영호 교수님께서 직접 찾아와 인사를 전해주셨다. 잊을 수 없는 고마움이다. 또한 영암군청 소속 정희봉 선생님께서 이틀 동안 해설을 맡아 주셨는데, 아담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동감 있는 설명은 듣는 이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유적 하나, 돌 하나에도 이야기를 입히는 해설 덕분에 영암은 더욱 깊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첫째 날, 우리는 왕인박사유적지를 찾았다. 백제의 학자 왕인이 일본에 문화를 전했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지식은 나눌 때 더욱 빛난다는 진리를 일깨워 주었다. 인문학 또한 삶 속에서 나누고 실천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교훈을 되새겼다. 이어 찾은 영암도기박물관에서는 흙이 불을 만나 그릇이 되듯, 사람 역시 시간과 경험 속에서 빚어진다는 사실을 느꼈다. 투박하지만 깊은 멋을 지닌 도기는 겉모습보다 속이 단단한 삶의 가치를 조용히 전하고 있었다.
구림한옥마을에서는 고즈넉한 한옥 사이를 걸으며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평온함을 느꼈다. 빠름보다 머묾이 아름답고, 삶에도 쉼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곳은 말없이 일러주었다. 죽정서원에서는 선현의 숨결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서원은 단순히 글을 읽는 공간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닦는 성찰의 자리였음을 알게되었다.
상대포 역사공원에 이르렀을 때는 다소 피로가 쌓였지만, 옛 포구가 품은 교류와 흐름의 역사는 또 다른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바다가 멈추지 않듯 우리의 삶 또한 흐름 속에 있어야 함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영암의 밤, 별빛 아래 또 하나의 인문학이 펼쳐졌다. 숙소에 모인 우리는 하루의 배움을 내려놓고 서로를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열 명의 회원들이 각자의 끼를 나누는 자리였다. 마술은 신비로움으로 시선을 사로잡았고, 싱글 댄스와 3인조 그룹댄스는 웃음으로 모두를 하나로 묶었다. 부부 애정 놀리는 유쾌한 공감을 이끌어냈고, 성악과 해학송은 품격과 재미를 함께 전했다. 트럼펫 연주는 힘찬 울림으로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며, 민요는 우리의 정서를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시 낭송은 깊은 여운을 남겼고, 하모니카 선율은 그 밤의 감동을 더욱 짙게 물들였다.
그 시간의 본질은 실력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박수와 응원에 있었다. 장기자랑은 누군가를 돋보이게 하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를 빛나게 하는 자리였다. 그 덕분에 어색함은 사라지고, 이름만 알던 사람들은 마음으로 가까워졌다. 그 밤은 단순한 여흥이 아니라 오래도록 기억될 한 편의 아름다운 무대였다.
다음날 새벽 꿈에서 깨어 잠을 설친 끝에, 이른 아침 찬 공기를 가르며 문산재와 양사재를 찾았다. 보수 공사 중인 고요한 재실은 오히려 더 따뜻한 울림을 주었고, 그 앞에서 ‘진짜 공부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되었다. 지금은 좋은 시설과 환경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옛 선비들은 배움에 대한 간절함 하나로 깊은 산중까지 찾아들었다. 바위 굴에 책을 두고 우물물을 마시며 학문에 정진했을 그들의 모습은,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인격을 닦는 공부의 본질을 일깨워 주었다. 결국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참된 배움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나의 영암 답사 둘째 날은 고요한 성찰과 함께 시작되었다.
둘째 날에는 사찰에서 비움과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도갑사의 천년 고찰은 고요함으로 우리를 맞이했고, 우리는 채우기보다 내려놓을 때 삶이 가벼워진다는 ‘비움의 힘’을 배웠다. 이어 찾은 월남사지는 깊은 침묵으로 말을 걸어왔다. 남겨진 터와 석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은 오히려 더 큰 울림이었다. 모든 것은 사라질 수 있어도 그 의미는 남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역사는 결국 기억의 힘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찾은 무위사는 보수 공사로 인해 내부를 충분히 볼 수 없었다. 문화재 보수는 단순한 수리가 아니라 세월을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 목조건축은 비와 바람, 습기와 해충에 약해 시간이 흐를수록 훼손되기 마련이기에 전통 기법으로 정밀하게 보수하여 원형을 유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시에 방문객의 안전을 위한 조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보존’이라는 이름 아래 천년의 시간 속에 스며든 흔적이 희미해지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염려도 남는다. 결국 보수는 지키되 과하지 않고, 손보되 본질을 해치지 않는 균형의 지혜 위에 서야 할 것이다.
이번 영암 답사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면으로 향한 여행이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삶의 방향을 배우고, 예술 속에서 감정을 나누며, 사람 속에서 관계의 소중함을 다시 발견했다. 특히 ‘영암의 밤 문화놀이’는 인문학이 강의실을 넘어 삶 속에서, 웃음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답사는 아는 만큼 보이지만, 사람은 나누는 만큼 가까워진다. 이번 여정은 지식을 넘어 사람을 얻은 시간이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날의 웃음과 박수, 가슴에 남은 울림은 각자의 삶 속에서 오래도록 따뜻한 기억으로 이어질 것이다.
2026년 4월 26일 안성환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