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역시 미감이 특별하셨고, ‘여자도 평생 공부하면서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며 딸 셋 모두 미대에 가라고 권하실 정도로 깨인 분이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담배쌈지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아버지는 김윤선씨가 계속 관심을 보이자 “너한테 갈 물건이었구나”라며 선뜻 내주셨다. 처음에는 담배쌈지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가르쳐주는 선생님도, 남아 있는 문헌도 없었다. 크고 작은 박물관과 골동품상을 쫓아다니며 찾아낸 누비로 만든 소품들이 스승이었다. 천과 천 사이에 한지가 들어간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아버지였는데, 한지를 어떻게 꼬아야 그렇게 심지가 단단한지 터득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학에서 공예를 전공한 후 염색을 해왔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파라핀 냄새가 너무 심해 계속할 수가 없더라고요. 딸아이를 낳고부터 본격적으로 이 일을 했습니다. ‘아이 혼수용품이라 생각하고 만들자’는 마음도 있었지요.”

오랜 시간이 걸려 재현한 담배쌈지를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해 입선했는데 ‘사라져가던 우리 물건을 되살렸다’며 환영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매년 꼬박꼬박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했다. 1997년에는 누비주머니로 문화재보호재단 이사장상, 2005년에는 누비안경집으로 한국무형문화재기능보존협회 이사장상을 수상했다. ‘색실누비’는 일반 누비와 구분하기 위해 1998년 첫 개인전 때 유희경 복식문화연구원장이 붙여준 이름이다.
“매번 새로운 물건을 선보이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어요. 그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색실누비는 안에 솜을 넣고 한 가지 실을 사용해 홈질로 줄지어 누비는 일반 누비와는 소재와 바느질 기법에서 구분된다. 여러 가지 색깔의 실을 사용해 골과 골의 간격이 2㎜, 바늘땀은 1.5㎜가 넘지 않도록 촘촘하고 정교하게 온박음질을 한다. 천과 천 사이에 한지를 꼬아 만든 끈이나 면끈을 넣어 입체적인 조형미가 돋보이는데, 한지는 통풍성과 습도조절이 뛰어나 담배나 부시같이 습도에 민감한 물건을 보관하는 쌈지를 만들기에 적당하다.

현재 전하고 있는 색실누비는 잘게 썬 살담배나 잎담배를 넣어 다니던 담배쌈지, 불을 붙이는 부싯돌과 부시, 부싯깃 등을 넣고 다니던 부시쌈지, 가족들의 종이 버선본을 접어 보관하던 누비 버선본집, 안경집 등이 있다.
“예전에는 주부들이 집에 있는 한지, 수를 놓다 남은 색실을 활용해 만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작은 물건 하나를 만드는 데도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씩 걸리는 작업이지요. 서툴면 서툰 대로 한땀 한땀 공들인 시간과 정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색실누비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만든 작품을 보면 ‘지금은 저렇게 만들지 못하지’라는 생각에 더 애착이 갑니다.”

그는 담배쌈지와 침을 한꺼번에 보이게 보관하는 침 쌈지, 바늘집, 두루주머니, 귀주머니, 별낭, 필낭 버선본집, 안경집 등 옛 물건들을 재현할 뿐 아니라, 현대생활의 쓰임새에 맞춰 새로운 물건도 내놓았다. 옛날 방식으로 짠 명주나 무명, 모시에 홍화, 쑥, 양파, 치자 등으로 천연 염색을 하는 등 끊임없이 소재를 실험하고, 전통문양을 연구해 현대감각에 맞게 재창조한다. 서로 다른 성질의 바탕천들을 덧대 과감하게 면 분할을 하기도 하고, 한 작품 안에 들어가는 한지 끈의 굵기를 달리하거나 굵기가 조금씩 다른 색실로 입체감을 더욱 살리기도 한다. 그가 만드는 색실누비 작품은 그저 과거를 따르는 게 아니라 현대의 미감과 쓰임새에 맞게 진화해가고 있다. 세모시나 명주에 그림을 그리듯 색실로 문양을 넣은 이브닝백, 세밀한 누비의 멋을 느끼게 하는 브로치도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공항 면세점과 아원공방 등에서 팔리고 있다.

“딸 셋 중 언니는 동양화, 저는 공예를 전공했는데, 동생은 물리학과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결국 대학 졸업 후 금속공예를 다시 했지요. 브로치는 동생과 협업해서 만든 작품이에요. 제 일을 많이 돕고 있지요.”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독일・미국・인도 등에서도 전시초청을 받을 정도로 세계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최근에는 ‘한산모시명품전’에 출품, 모시옷에 누비 단추를 달아 보였고, 9월 6일부터 11월 3일까지 열리는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는 허달재 작가의 매화그림을 모티프로 한 브로치를 선보인다. 역시 동생과의 합작이다. 그가 요즘 작품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마음을 기울이는 일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정성을 기울여 누비바느질을 하던 옛 여인들처럼 누구든 색실누비를 할 수 있도록 보급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동안 그가 고생고생해서 만들어온 작품들이 교본이 된다.

“제 것을 보고, 저를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라는 거지요. 가르치면서 ‘더 마음을 비워야겠다. 내려놓아야겠다’는 것을 깨달아요. 한국문화의집 등 외부에서 단기과정을 가르치기도 하고, 공방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하는데, 하루 종일 함께 바느질을 하다 보면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들이 하나 둘 나오지요. 각자 어려움을 겪는 일도 이야기하는데,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정리되는 것 같아요. 한땀 한땀 바느질을 하면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정화되니까요.”
경쟁적으로 ‘더 빨리’ 가려는 시대. 정성을 다해 한땀 한땀 바느질하는 것이 사실은 수양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