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면 金沔 장군(1541~1593)】 「다만, 나라있는 줄 만 알았지,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다.」
김면 金沔 장군(1541~1593),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장.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제자이다. 자는 지해(志海)이고 호는 송암(松菴)이다. 본관은 고령이고 평생을 고령에서 보냈다. 성리학자이며 의병 도대장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의병의 관군화로 경상도의 의병을 총괄하는 위치까지 올라간다. 금산과 개령으로 진주하여 선산의 왜군을 공격하려던 중 갑자기 병사했다. 그는 아래와 같은 말을 남기고 죽었다.
"다만, 나라있는 줄 만 알았지,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다." 只知有國 不知有身(지지유국 부지유신)
1593년 3월 13일,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며 숨을 거뒀다. 만석꾼이라고 불릴 정도의 많은 재산을 의병 활동에 기울이는 바람에 남은 가족들은 문전걸식을 해야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김면은 죽기 전까지 전장에 머물며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가족들을 채 한번 보지도 못했다.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달려가 문안 드리고자 하였으나 정인홍이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고 하므로 면이 드디어 고령에서 군사를 모았다. 김면은 고령은 군세가 작다고 여겨 거창으로 달려갔는데 그때 거창의 선비와 백성이 이미 약간의 군사를 모아 가지고 있다가 합세하였다. 김면은 곽준, 문위, 윤경남, 박정번, 유중룡을 참모로 삼고 박성을 시켜 군량을 모으게 하였다. 4일 - 5일 동안에 군사 2000명이 모였다.
김면은 처음에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중지하였다. 고령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김면은 거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김면은 2,000여명의 대군을 모았다. 그는 명망있는 사족들에게 유사(有司)라는 직책을 맡겼다. 관군과도 협조하는 등 원만하게 의병을 운영했다. 그는 남명 학파라는 학맥과 사상적 기반을 이용하여 의병들을 모았다. 김면은 사족들이 상호간의 중첩적인 통혼을 하여 유대 관계가 강하는 면도 직시하면서 서당이나 향교를 통한 교우 관계 등을 바탕으로하여 백성들을 동원했다. 그는 의병을 지휘하여 거창·고령 등지에서 전투를 벌이고 전과를 거두었다. 또 관군과 연합하는 작전도 많이 벌였는데 적의 선봉을 지례에서 공격한 것이 대표적이다. 김면은 무계에서도 승전했으며, 후에는 성주·금산·개령 부근에서도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임란 다음년인 1593년에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함안 등지를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김면은 왜군을 맞아 학연(學淵)·예천·문경 등지의 전투에서 연전 연승했다. 일본군은 김면을 몹시 두려워하였다고 전해진다. 왜군은 김면과 만나 싸우기를 꺼렸다. 왜군은 김면을 두려워하여 그 반대 급부로 고령의 종친들의 상당수를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 김면은 경상도 북부 지방을 제압하여 일본군의 전라도 침입을 견제하였다.'
1592년 8월 16일, 임란초기 왜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김면, 정인홍이 싸운 전투이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정암진 전투, 웅치 전투, 이치 전투에 이어 우척현에서 거창을 통과여 전라도로 진입하려고 하였다. 이 전투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김면과 정인홍을 만나 크게 패한다. 이 전투를 끝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전라도 진입을 포기한다. 당시 김면 측의 병력은 2,000명이었고 고바야카와 측의 병력은 1,500명이었다. 당시 김면은 매복하여 고개를 넘어오는 적군을 상대로 3면에서 활을 쏴 격멸하였다고 한다.
명종 때 효도와 청렴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선조 즉위 초년 유현(儒賢)을 뽑아 육품직에 승진시켰는데, 조목(趙穆) · 성혼(成渾) · 정구(鄭逑) 등과 함께 유일(遺逸: 학식과 덕망이 높아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학자)로 천거되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지만 역시 사퇴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조종도(趙宗道) · 곽준(郭䞭) · 문위(文緯) 등과 함께 거창과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과 개령 사이에 주둔한 적병 10만과 우지(牛旨)에서 대치하다가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지례(知禮)에서 적의 선봉을 역습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 공으로 합천군수에 제수되었다.
그 뒤 무계(茂溪)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9월에는 첨지사(僉知事)에 임명되고, 11월에는 의병대장의 교서를 받았다. 당시 호남관찰사에게 군사와 군량을 요청했으나 회답이 없자 스스로 무기를 수선하고 병사를 격려하여 전투에 임했으며, 호남과 영남의 의병장들과 함께 4도로 진병하고자 했으나 그 약속이 이행되지 못하자 혼자 군사를 이끌고 고령 · 지례 · 금산 · 의령 등을 수복하였다. 왕이 그 공적을 장하게 여겨 이 군사들에게 근왕(勤王)주1할 것을 명했으나, 백성들이 통곡하며 보호를 청하고 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이 장계를 올리니 본도에 머물러 수호하라는 교서가 내려졌다. 1593년 1월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충청도 · 전라도 의병과 함께 금산에 주둔하며 선산(善山)의 적을 격퇴시킬 준비를 갖추던 도중, 갑자기 병에 걸리자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여러 장수가 그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신창(新倉)까지 돌아온 뒤에야 그의 죽음을 알리니, 군사들이 통곡하고 백성들이 매우 애통해하였다. 관찰사 김성일이 장계를 올려 보고하니, 왕이 애도하며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주2하게 하고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를 명하였다. 강직한 절의를 지니고 있었고, 문장보다 성현의 본지(本旨)주3를 마음에 새기어 실천에 힘썼으며, 특히 이정(二程: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의 글을 좋아하고 본받으려 하였다. 저서로는 『송암실기(松庵實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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