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wnload : ham002_1.jpg [332 Kbytes]
A마을 김씨의
지난 6년동안의 작업일수와 백합체취량, 소득ⓒ부안21
계화도 백합아줌마 가계부
엿보기
지난 10월 27일 명동 은행회관 국제회의실에서는 '제2차
한.독 공동 심포지엄-"지속가능한 새만금을 위하여"가 열렸다. 이 심포지엄에서 전북대 함한희 교수(인류학)가 발표한 "새만금지역의 사회문화적
변화" 중 일부를 발췌해 올린다./부안21
<상략>...남성들이 어장에서
고기를 잡는 일이 점점 힘들어질 즈음해서 여성들의 소득이 가계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여성들의 조개 채취로 얻은 소득은
남성들의 어장 소득 보다 안정적이었다. 어장은 계절과 기후에 민감한 영향을 받기 때문에 남성들의 소득은 매우 유동적이다. 또한 여성들의 작업은
남성들의 고기잡이에서처럼 어구를 마련할 필요도 없었다. 조개채취는 맨손어업이라고도 불릴 만큼 별다른 도구나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술습득과 도구구입에 투자되는 비용이 들지 않아서 조개를 캐서 판매하면 그대로 소득이 된다. 여성의 맨손어업의 중요성이 새삼 인식되었고 여성들의
소득이 바로 가족생활을 위한 생계비 및 자녀의 교육비로 지출되었다. 이러한 가족 내의 여성의 지위와 역할의 변화는 마을과 공동체를 위한 여성의
활동을 자극시켰다.
새만금사업이 진행되면서 어민들에게 피해보상금이 지급될 때의 일이었다. 어민들이 가장 혼란에 빠졌던 시기였다.
특히 여성들의 입장은 남성의 경우와는 달랐다. 갯벌을 잃는 것은 지금까지의 수입원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것이어서 여성들이 가지는 위기의식은
더했다. 남성들의 경우 새만금사업으로 어장이 사라지면 더 멀리 나가서 고기를 잡을 수도 있지만, 갯벌이 사라지면 여성들의 경제활동은 완전히
차단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에서는 이러한 사정을 소홀히 하였? 그동안 양식업의 발달로 가계의 주수입원이었던 포패업을 거의 인정하지 않고는
지극히 적은 액수로 보상금을 책정하였다. 현지의 사정에 어두운 피해보상금지급 평가단의 잘못된 판정이 여성덜의 실제적인 경제력을
과소평가하였다.
새만금지역에서 바닷물을 막는 방조제 공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정부는 어민들에게 잠정적으로 어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시어업권을 발부해주었다. 그리하여 방조제공사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어민들은 바다와 갯벌에서 조업을 하고 있다. 방조제공사가 거의 마무리단계인
현재 어민들은 고기잡이를 거의 포기한 채 조개채취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다. 물의 흐름이 느려지면서 갯벌이 높아지고 갯벌에 사는 생물도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예측하기 힘든 현상들이 나타났다. 최근에는 생합조개가 갑자기 대량으로 서식하면서 여성들의 맨손작업이 바빠지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여성들은 1960년대 후반부터 경제적 어업이 활발해지면서 적극적으로 포패업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활동은
여성들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또 가정생활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생계유지 뿐만아니라 자녀들을 고등교육기관에서 교육시킬 수 있는
비용을 댈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만금사업의 영향이 심각해지자 여성들은 갯벌과 바다환경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면서 스스로를 의식화하였다.
생태환경과 경제위기에 대해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내세우면서 더욱 경제활동을 늦추지 않고 있다.
위의 표는 A마을에
살고 있는 김씨(여, 40대)가 1998년부터 2003년까지 6년 동안 갯벌에서 조개를 채취한 양과 소득에 대한 통계이다. 이 통계자료에서 보면
2001년부터 김씨의 작업일수가 늘고 채집양도 많아지고 결과적으로 수입도 증가하였다. 1998년 일년 동안에 183일 작업을 한 반면에
2001년부터는 거의 240일 이상을 갯벌에서 일을 하였다. 작업의 일수가 늘어나면서 소득도 크게 늘어났다. 일년 소득이 700만원 정도였다가
2003년에는 2,000만원을 넘어섰다. 그 이유는 고기가 사라진 자리에 조개류가 늘면서 남성들도 조개를 잡으러 다닌다. 부안 앞 바다에서는
생합이나 동죽, 갯우렁이 잡히고 시장판매 가격도 올랐다.
표는 김씨의 수입은 해가 갈수록 증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통계는 가계 전체 수입이 아니라 조개채취 수입에 국한된 것이다. 따라서 김씨의 남편이 어장에서 고기를 잡아서 올린 수입은 이 표에 나타나지
않는다. 2000년도까지는 남편의 소득이 별도로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2001년부터는 가계전체 수입이 주로 포패업에만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표에서는 소득이 증대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민들의 생업활동이 포패업으로 쏠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수입원이
단일화되어서 조개가 감소하거나 소멸되면 어민들은 살기 힘들게 된다.
이러한 예측은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2001년부터
2003년 사이에 부안 앞 바다에서 생합이 갑자기 많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원래 생합은 동죽이나 바지락 보다 서식하는 양도 적고 잡기도 어려워서
값이 비싸다. 그러나 2003년과 2004년에는 생합 값이 폭락하였다. 오염되어가는 갯벌에 생합이 대량으로 서식하는 현상은 일시적이며
어민들에게는 불길한 일이다. ‘뻘이 뒤집혀서 그런다’는 것이다. 나이가 든 어민들은 30여 년 전 계화간척지를 막고 똑같은 일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생합이 갯벌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A’씨의 가정의 경우에서 보듯이
부인이 꾸준히 갯벌에서 조개를 잡아서 생활을 하고 , 또 자녀들의 교육비를 대었다. 그래서 마을 여성들은 갯벌을 잃거나 갯일을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하략>...
[발제문 전문]
새만금지역의 사회문화적 변화
함한희
1. 머리말
새만금지역이란 명칭은 간척사업이 시작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만경강의 만, 김제의 김이 금으로 대치되었고, 만금하게에는 웬지 구태의연해 보여서 만금 앞에 ‘새’자를 넣어서 만든 단어이다. 새만금이란 말과
함께 새만금지역이 탄생된 것이다. 부안, 김제, 옥구, 군산 일대 서해안가 사람들은 자신들이 새만금지역 사람들이 된 것을 뒤에 알게 되었고,
이러한 명칭이 붙으면서부터 이들은 새로운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환경 속에 유입되었다. 따라서 지역주민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새만금사업으로 시작된 새로운 환경에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새만금간척사업으로 지역의 어민들에게는 불가항력으로 다가온
재난과 같은 것이다. 서해안 바다와 해안가에서 어장과 양식장, 그리고 갯벌에서 조개를 캐며 생계를 이어온 어민들에게 어느 날 정부는 바다를 막고
땅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갑작스럽게 생계의 터전을 잃게 된 지역민들은 자신들의 생존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알았던 바다와 갯벌의 소중함을 새삼스럽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상 대대로 고기잡고’‘바다를 파먹고’ 산 어부들은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다른 것으로 쉽게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갑자기 나오게 된 환경문제도 이들에게는 새삼스럽게
느낄 때가 많다. 바닷물의 유통이 되지 않자 해안 생태계가 변화하기 시작하고 또 갯벌이 점점 더 오염되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환경자체보다는 사람들의 생존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도 서로 다른 의견과 주장이 생기면서 마을
공동체는 약화되어갔다. 이 글에서는 새만금사업이 시작된 지 십년이 지난 2000년도 이후에 일어난 이 지역과 지역민의 변화양상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 생태위기에 대한 어민의식의 변화
새만금사업이 중반에 접어들면서 어민들은 자신들의 생존에
대해서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하루아침에 생활의 터전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이들은 바다와 갯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새만금간척사업을 더욱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바다를 파먹고 살았다’라고 하는 표현 속에서 나타나듯이 자연과 인간의 밀접한 상호작용 속에서 생활해 온
어민들로서는 민속지식을 동원하여 간척사업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상호의존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간척사업을 강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또 자신들의 입장은 환경단체들이 주장하는 환경보호론과도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어민들은 갯벌의
무조건적인 보호가 아니라, 바다와 해안가 생태계 먹이사슬을 중시하며 갯벌의 이용가치를 내세웠다. 결국 지역민들은 갯벌과 바다를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인식하는 전통문화를 지키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화도 간척 전,후의 돈지ⓒ부안21
(상략)삼대 강이 있어요. 금강, 만경강, 동진강이 있어요. 어류의 산란장이 하류에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이 있습니다. 염도가 약해요. 거기서 어린 고기가 크기 위해서 올라오는 겁니다. 큰 고기가 그냥 옵니까? 작은 고기들을 잡아먹으면서
올라옵니다. 그게 먹이 사슬인데 산란하기 위해서 멸치 다음에 큰놈 따라오지 그래서 큰 고기까지 옵니다. 알 낳으러. 그 다음에 바다로 가는
겁니다. 알이 깨서, 그런 생태계가 없어지는 겁니다. 민물이 흐르지 않는 곳에, 하류가 사라지면 끝나는 겁니다. 갯벌이 생긴다고 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보면 조금 돋아졌죠. 조수간만차로 고기 잡는 우리 아버지가 정치망을 쳤어요. 거기서 고기를 잡았는데, 지금 갯벌이 생겨난다고 하는데 그게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퇴적층이 쌍여서 만들어지는건데 강물을 막고 토사가 유출되겠냐는 겁니다. 갯벌이 안 생기죠. 정부 거짓말 많이
합니다. (돈지주민 남 54세)
새만금지역 바다생태계는 크게 바뀌었다. 과거에는 여러 종류의 고기들이 서식하던
곳이었으나 어류는 거의 사라지고 패류는 증가하였다. 현재 부안 앞 갯벌에서는 생합과 동죽이 많이 나오고, 김제 앞바다에서는 죽합, 그리고 군산
앞바다에서는 맛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패류의 서식 패턴은 해마다 달라진다. 바다생태계가 불안하여서 생산량을 예측하기 힘들다. 어느 때는
바지락이 많이 서식하다가 요즈음은 생합이 많이 나오고 있다. 생합도 지난 해(2003년)에는 소합이 쏟아져 나오다가 최근(2004년 가을)에는
대합만 나오고 있다. 더구나 방조제가 가까운 곳에서는 조개류가 점점 사리지고 이제는 ‘칙게’라고 부르는 작은 게를 잡아서 가계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칙게가 소득원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것이 이들의 말이다. 어민들은 바다 생태계가 빠르게 변해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3~4년 전에만 해도 새만금 지역 안에서도 소라, 가무락, 노랑조개 등 제법 다양한 종류의 조개가 서식하였으나 이제는 종류나 양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바다를 막아 강물을 흐르지 못하게 하면 강물이 죽고, 또 갯벌도 죽고, 갯벌이 죽으면 조개들이 죽고 그리고 나면 인간이
죽는다.‘고 어민들은 말한다. 평생을 바다에서 산 이들은 누구보다도 현재 갯벌과 바다 밑의 생태적인 변화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다. 이미 바다
속의 생태계는 크게 변화하여 어패류의 종류가 변화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다. 이미 바다 속의 생태계는 크게 변화하여 어패류의 종류가 줄어
생활이 곤란해져 가지만, 아직도 바다와 갯벌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는 갯벌에서 조개를 잡아서 생활을 유지하여 왔고
자녀들의 교육비를 대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갯가를 잃거나 갯일을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황금어장이 칙게밭으로 변한 이 시점에서 이들은
자신들이 경험에 의해서 익혀온 민속지식이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갯벌생산론이나 해수유통론 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 개발사업으로 황폐해 가는
바다와 갯벌을 바라보면서 그곳이 자신들의 생명터라는 것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3. 지역정체성 문제
대두
1) 풍성했던 과거에 대한 인식
새만금 지역 내 어민들 가운덴 계화간척사업 이후에 이미 생태계의 커다란
변화를 경험한 이들이 많다. 1960년대 이후부터 바다의 어종이 줄고 갯벌이 크게 축소되었다. 또한 수문을 통한 물 조절이 시작되자 인근의
양식장의 조개들이 폐사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한 때 호황을 누리던 김 양식업도 새만금사업이 시작되면서 거의 생산이 중단된 상태이다.
바다생태계가 이렇게 변하면서 어민들은 간척사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 환경단체에서 새만금사업의 환경파괴 문제를
제기하기 전부터 지역의 어민들은 이미 바다생태계의 변화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간척사업의 결과 어업이 쇠퇴하자 어민들은 과거를
낭만적으로 회상하기 시작하였다. 과거의 어업이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이 호황을 누렸고 따라서 어민들의 생활도 풍족하였다는 신화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옛날에는 고기가 엄청 났어’ ‘이 앞바다에 괴기가 우글우글 했어요’‘만선 깃발을 꼽은 배들이 돈지항구에 차고 넘쳤어’라는 과장 섞인
이야기를 통해서 이들은 과거의 어업을 현재의 황폐함가 비교한다. 이러한 서술적 전략을 통해서 어민들은 어업이 생계양식으로서 풍요와 풍족함을
보장해 줄 수 있음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이들이 회상하는 과거 어업의 호황이 꼭 소득의 차원에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기의 종류와
양이 많아서 풍성하였고, 고깃배와 사람들이 북적거리던 옛날의 풍경과 풍속을 그리워하는 말이다.
“(상략) 계화 막기 전에는 엄청 나왔지. 군산보다 컸지. 징을 쳐 징치면 모여라 못 가져오니까 가져다 먹어라. 한 50년 전
쯤에는 그랬어. 40~50년 전... (요즘은 고기를 잡으러 갈 때는) 사람 사서 갈 때도 있고 잘 될 때는 월급제로 두 명씩 뒀고 새만금 둑
막기 전 (계화간척지) 막고 나서 2~3년 뒤에는 엄청 잡혔지. (그때에 비하면) 아예 지금은 폐업정도지. 간조때 물이 빠져 있을 때 저조일 때
고기를 떨어오고 그랬어. 고기 잡는 어구로는 정치망을 하였는데 치어는 빠지는데 큰놈은 안 빠져. 이강망 삼강망도 하고. 이강망은 대구 같은 것
잡고. 삼강망은 불법이지. 치어까지 다 잡아버리니까. 꽃게 그물도 있고. 돈지는 백합양식이 10여년간 유명했고 갑자기 썩어버려서 그만두고 바지락
양식 하고 땅이 돋혀서 인제 새만금으로 더 이상 못하고 조개가 있어도 인제는 폐사되고 묻혀버려. 김도 않고 인제 다 폐업이지.” (계화주민,
남, 50대)
“(상락) 황금밭이었지. 여기(돈지) 앞바다가요. 그때만(계화간척지 막기 전) 해도 지주식 김으로서 아주
알아줬었어요. 부안 김을. 그래가지고, 하여튼 외부에서 보따리상들이 오잖아요. 김 사러. 할머니들이 장사 한 번 해볼라고. 그럼 김 맛을 보면
조미료 타서 가공했다고 그랬거든요. 맛있었어요. 부안 김이. 그때는 백화점 이런데서나 부안김을 만날 수 있었어 하여튼 부안김은 가지고 갔다 하면
김 도매상들이 아주 인기가 좋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부안김 별로 안 하니까. 그러고 인자. 그때가 인자 매립하기 전이니까. 80년대, 70년대
후반. 90년대 초까지는 했었어요. 여기 91년 공사 시작했으니까. 지금도 계속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 분들이 재미를 못 볼 거예요.
(새만금) 이 안에는 지금 고기도 없어요. 지금 현재 이안에서 어장하시는 분들은 아주 소규모로, 할 수 없이, 배운 게 그거니까. 뭐 조그마하게
고기잡는 어구나 설치해놓은 몇 명이고. 나머지는 없어요.” (돈지주민, 남, 60대)
그러나 지역어민들은 과거의
풍요로움이 지난 30년을 사이로 계기적으로 착공된 계화간척공사와 새만금간척공사로 인해서 다 사라지게 되었음을 무척이나 아쉬워한다. 이들은 이 수
산업의 영향을 굳이 구별하여 말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들이 말하는 바다의 변화가 30년 전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10년 전부터 시작된 새만금간척사업의 영향인지를 구별하기 힘들다. 특히 현재 새만금지역으로 선포된 부안 쪽에서는 이 두 사업을
연속선상에서 이해하고 있다. 어민들은 그동안 정부가 어민집단에 대하여 불공정한 정책을 펴왔다고 하는 점을 지적하면서 두 간척사업의 이중
피해자라는 사실을 호소한다.
2) 공동체의식의 확산
새만금지역의 어촌마을에서는 여전히 풍어제가 열린다. A마을의 경우는
대보름행사에서 풍어제를 빠뜨리지 않는다. 2004년도 정월 대보름(2월 5일)에 열린 풍어제는 작년과 비교하여서 외형적으로 커졌고, 참여한
사람들의 수도 많았다. 일년 전(2003년도)에는 올해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십여명 ㅅ돛?어민들이 모여서 고사를 지내고 풍물을 치며
조촐하게 치르었다. 예상치 않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흥겨운 잔치가 된 금년도 대보름행사에는 차린 음식도 많았고, 또 세 어민 단체가 단합해서
만든 행사였다. 마을의 선주회, 이웃한 삼개 마을의 선주연합회, 그리고 선외기회가 모였다. 선주회는 원래는 어장을 가지고 고기잡이를 하는
어민들의 모임이다. 최근에는 어장을 하는 하라들은 극소수여서 선주회가 단독으로는 행사를 하기 힘들었다. 이들도 기껏 배를 타고 나가서 조개나
개불을 잡는 것이 고작이 되었다. 선외기회란 작은 모터보트로 조개류를 캐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나는 2002년도부터 2004년도까지 3차례에
걸쳐서 새만금지역 안에 있는 A마을에서 열리는 대보름행사에 참여하였다. 3년 동안 열린 대보름 행사를 비교해보면 조금씩 달라진 마을 사회와
주민들의 의식을 알게 된다.
2002년 대보름행사에는 외부인들도 마을주민들도 활기찬 모습으로 모여들어 봉수제 및 풍년풍어제를
지냈다. 당시만 해도 새만금사업에 대해서 마을주민들 스스로 적극적인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자신들의 생존권을 찾아야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모임이었다. 이 행사는 마을 청년회를 중심으로 치르어졌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청년회측은 주민으로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노력이
보였다. 그 동안 계화도가 새만금반대추진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자 주민들은 득과 실의 양면을 모두 경험하고 있던 터였다. 득도 있었지만,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커지면서 마을사회가 점차 의존적, 수동적으로 바뀌어갔고, 내부의 갈등도 증폭되어 갔다. 마을사람들 스스로의 목소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반성도 있었다. 이러한 때 열려진 행사였기 대문에 당시의 행사 내용을 들여다보면 여러 곳에서 주민들의 적극적인 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2002년과 2003년의 대보름행사는 달랐다. 주민들의 자치적 움직임이 가장 고조되었던 2002년의 풍년풍어제와는 달리
2003년에는 다소 형식적인 행사로 보였다. 말 그대로 풍년풍어제였지만, 새만금사업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참석자
가운데 한 면담자는 ‘이제 새만금은 지겹다. 반대할 기력도 없다. 안 막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너무 지쳤다.’고 하였다. ‘우리
앞에서는 이제 새만금 말하지도 말아요.’라고 하는 분노의 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마을끼리의 단합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봉수대 위에서는
마을청년회가 주최하는 풍년풍어제가 열렸고, 선착장에서는 선주회가 주최하는 풍어제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당시에는 정부에서 방조제 공사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 공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조개를 캐기 위해서 바다로 나가는 어민들은 공사의 진척 상황을 잘 알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다가 곧 막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부 특히 전라북도에서 새만금사업의 지속적인 추진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때였다.
2004년 올해의 행사는 선착장에서 열리는 풍어제를 중심으로 대보름행사를 진행하였다. 마을 주민들
가운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자진해서 참석하였고, 선주회가 주관하였다. 작년과는 달리 여러 단체에 속한 사람들이 고루 모여서 고사를 지냈다.
상징적으로도 선주회와 선외기회 어민들이 화합을 하였다는 의미로 고사상 두 개를 나란히 붙여놓고 제례를 지냈다. 어민들은 새만금사업의 향방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다만, 막연하게 방조제가 막히지 않았으면 하는 정도의 바램이었다. 그리고 현재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서는 어민들이
스스로 힘을 합해서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어민들은 지지부진하던 삼개 마을 연합회도 새롭게 정비하고, 유명무실한 단체로
남아있었던 선외기회도 모임을 가지고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았다.
4. 여성들의 경제활동과 가족경제의
변화
남성들이 어장에서 고기를 잡는 일이 점점 힘들어질 즈음해서 여성들의 소득이 가계의 주요 수입원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여성들의 조개 채취로 얻은 소득은 남성들의 어장 소득 보다 안정적이었다. 어장은 계절과 기후에 민감한 영향을 받기 때문에 남성들의
소득은 매우 유동적이다. 또한 여성들의 작업은 남성들의 고기잡이에서처럼 어구를 마련할 필요도 없었다. 조개채취는 맨손어업이라고도 불릴 만큼
별다른 도구나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술습득과 도구구입에 투자되는 비용이 들지 않아서 조개를 캐서 판매하면 그대로 소득이 된다.
여성의 맨손어업의 중요성이 새삼 인식되었고 여성들의 소득이 바로 가족생활을 위한 생계비 및 자녀의 교육비로 지출되었다. 이러한 가족 내의 여성의
지위와 역할의 변화는 마을과 공동체를 위한 여성의 활동을 자극시켰다.
새만금사업이 진행되면서 어민들에게 피해보상금이 지급될 때의
일이었다. 어민들이 가장 혼란에 빠졌던 시기였다. 특히 여성들의 입장은 남성의 경우와는 달랐다. 갯벌을 잃는 것은 지금까지의 수입원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것이어서 여성들이 가지는 위기의식은 더했다. 남성들의 경우 새만금사업으로 어장이 사라지면 더 멀리 나가서 고기를 잡을 수도 있지만,
갯벌이 사라지면 여성들의 경제활동은 완전히 차단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에서는 이러한 사정을 소홀히 하였다. 그동안 양식업의 발달로 가계의
주수입원이었던 포패업을 거의 인정하지 않고는 지극히 적은 액수로 보상금을 책정하였다. 현지의 사정에 어두운 피해보상금지급 평가단의 잘못된 판정이
여성덜의 실제적인 경제력을 과소평가하였다.
새만금지역에서 바닷물을 막는 방조제 공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정부는 어민들에게 잠정적으로
어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시어업권을 발부해주었다. 그리하여 방조제공사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어민들은 바다와 갯벌에서 조업을 하고 있다.
방조제공사가 거의 마무리단계인 현재 어민들은 고기잡이를 거의 포기한 채 조개채취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다. 물의 흐름이 느려지면서 갯벌이
높아지고 갯벌에 사는 생물도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예측하기 힘든 현상들이 나타났다. 최근에는 생합조개가 갑자기 대량으로
서식하면서 여성들의 맨손작업이 바빠지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여성들은 1960년대 후반부터 경제적 어업이 활발해지면서 적극적으로
포패업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활동은 여성들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또 가정생활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생계유지 뿐만아니라
자녀들을 고등교육기관에서 교육시킬 수 있는 비용을 댈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만금사업의 영향이 심각해지자 여성들은 갯벌과 바다환경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면서 스스로를 의식화하였다. 생태환경과 경제위기에 대해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내세우면서 더욱 경제활동을 늦추지
않고 있다.
<표1>A마을 김씨의 지난 6년동안의 작업일수와 백합체취량,
소득ⓒ부안21
위의 표는 A마을에 살고 있는 김씨(여, 40대)가 1998년부터 2003년까지 6년
동안 갯벌에서 조개를 채취한 양과 소득에 대한 통계이다. 이 통계자료에서 보면 2001년부터 김씨의 작업일수가 늘고 채집양도 많아지고 결과적으로
수입도 증가하였다. 1998년 일년 동안에 183일 작업을 한 반면에 2001년부터는 거의 240일 이상을 갯벌에서 일을 하였다. 작업의 일수가
늘어나면서 소득도 크게 늘어났다. 일년 소득이 700만원 정도였다가 2003년에는 2,000만원을 넘어섰다. 그 이유는 고기가 사라진 자리에
조개류가 늘면서 남성들도 조개를 잡으러 다닌다. 부안 앞 바다에서는 생합이나 동죽, 갯우렁이 잡히고 시장판매 가격도 올랐다.
표1은 김씨의 수입은 해가 갈수록 증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통계는 가계 전체 수입이 아니라 조개채취 수입에 국한된
것이다. 따라서 김씨의 남편이 어장에서 고기를 잡아서 올린 수입은 이 표에 나타나지 않는다. 2000년도까지는 남편의 소득이 별도로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2001년부터는 가계전체 수입이 주로 포패업에만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표에서는 소득이 증대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민들의 생업활동이 포패업으로 쏠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수입원이 단일화되어서 조개가 감소하거나 소멸되면 어민들은 살기
힘들게 된다.
이러한 예측은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2001년부터 2003년 사이에 부안 앞 바다에서 생합이 갑자기 많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원래 생합은 동죽이나 바지락 보다 서식하는 양도 적고 잡기도 어려워서 값이 비싸다. 그러나 2003년과 2004년에는 생합
값이 폭락하였다. 오염되어가는 갯벌에 생합이 대량으로 서식하는 현상은 일시적이며 어민들에게는 불길한 일이다. ‘뻘이 뒤집혀서 그런다’는 것이다.
나이가 든 어민들은 30여 년 전 계화간척지를 막고 똑같은 일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생합이 갯벌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A’씨의 가정의 경우에서 보듯이 부인이 꾸준히 갯벌에서 조개를 잡아서 생활을 하고 , 또 자녀들의 교육비를
대었다. 그래서 마을 여성들은 갯벌을 잃거나 갯일을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5. 생태적 규범과 생존권의
혼란
어업은 바다에서 서식하는 동식물을 그대로 획득하여 이용하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의존도가 유독 높다. 자연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어업은 그만큼 불안한 요소도 많다(한상복 1976, 1997 ; 전재경 외, 1997.). 일년이자 계절 별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하기 힘들다. 날씨, 수온 및 기타 예기치 못한 요소들이 어업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어업은 장비, 기술 그리고 지식이
중요한 생산요소로 작용한다. 이동성이 높은 어류는 공유를 원칙으로 하고 있어서 생산을 높이기 위해서 어민들은 장비와 기술 등에 투자를 하게
된다(한상복 1976). 해조류나 조개류는 양식장 허가를 내줌으로써 사유권을 인정하는 경우도 많지만, 바다 속에서 이동하는 어류는 개별적 소유의
경계를 지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원칙적으로는 바다 밑에서 서식하는 어패류는 특정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접근이 제한된 것도
아니다. 수산자원에 접근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노동력이 있고, 장비와 기술이 확보되면 바다나 갯벌에 나가서 고기를 잡고 조개를 캘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어민들은 어로장비를 갖추고 정보를 신속하게 얻기 위해서 요즈음에는 최신식 시설을 배에 갖춘다. 배안에 어류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는 시설이 다 되어있다. 따라서 저마다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는 최첨단의 장비를 갖추려고 한다. 고가의 첨단 장비를 갖추고도
어획고가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민들이 부채를 많이 안게 된다. 어로 장비를 갖추기 우해서 많은 돈을 투자하고 나서 어획고가
작거나 맙묽遂 않은 사고가 나면 그 해는 빚만 지게 되기 때문이다.
새만금사업으로 어장이 줄어들고 어류도 사라지는 상황에서도
어민들은 장비, 기술 그리고 지식을 총동원해서 위기를 넘겨보고자 한다. 기존의 방법으로는 더 이상 어패류를 잡을 수 없게 된 어민들은 새로운
어로기술과 어구를 개발해왔다. 그런가하면 지금까지는 식용으로 잡지 않았던 어종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새만금연안의 어민들은 개불이나 칙게와 같은
어패류를 식용으로 잡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어족들은 기존의 방법으로는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러던 터에 개불을 잡기 시작하면서 ‘뽐뿌(펌푸)식’
이라고 부르는 어로방법이 개발되었다. 펌푸식이란 배에 펌푸시설을 한 후 긴 쇠파이프에 구멍을 내고 고압의 공기를 바다 밑에 불어 넣어 물을 뿜어
올리면 바다 밑에 서식하는 소라나 개불이 위로 뜨게 되어 갯벌 위로 올라온 것을 그물로 잠는 방법을 말한다.
계화도 갯벌에 새로 등장한 어로기구, 칙게(칠게)를 잡기 위해 피브이시 통에 홈을 파
갯벌에 설치해 놓았다. 갯벌에서 놀던 칙게가 저 통속에 들어가면 그 안에 갇히게 된다. 부안의 갯살림 중에서 원래 칙게는 제외되었다. 맛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잡기가 어려운데다 별 소득도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다르다. 칙게는 낙지 미끼로 사용하는데다 전남지역에서는
고급식품으로 치기 때문에 그 수요가 달리다보니 다른 갯것에 비해 소득이 높은 편이다.ⓒ부안21
어민들은
바다생태계가 변화하여 어종이 바뀌는데 따라서 부지런히 어로기술을 개발하여 왔다. 한때는 ‘방배작업’이 유행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뺑뺑이작업’이
새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작업방식은 연안 어민들이 생태계의 변화에 따라서 내놓은 고육지책의 결과다. 어린 물고기(치어)나 조개류까지 다
끌어올리는 이러한 어로방식은 어족자원의 보호를 위해서 정부에서는 금하고 있다. 또한 바다의 바닥을 강제로 뒤집어 놓은 경우도 있어서 바다환경을
해치는 작업이어서 단속의 대상이 된다.
새만금지역의 어민들은 해양경찰의 눈을 피해서 이러한 불법어구를 이용하여서 어패류를 잡는다.
이 때 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라는 생각을 한다. 얼마 전까지는 바다의 환경과 어족 자원 보호 등을 거론하면서 피해왔던
작업방법이었다. 그러던 이들도 하나 둘 ‘뽐뿌배’와 ‘방배’를 이용하여 어패류를 잡고 있다. 옳지 않은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존논리가
앞서고 있는 것이다.
어민들은 스스로 조개잡이 방식을 4단계로 구분한다.
<표2>현재(2004년 10월) 어민들이 조개잡이를 분류한
방법ⓒ부안21
새만금사업이 속속 진행되면서 어민들은 생업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보면 새만금사업은 ‘옳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만큼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이러한 의식구조에서 어민들은 자신들의 기술개발을 정당화한다. 새로 개발된 조업방법이 옳은 것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생태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는 ‘옳지 않은 것’이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변하였고,
마을사회에서는 생태적 규범을 지키는 일과 생존을 우선해야 하는 두 입장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7.
맺는말
새만금사업은 산업화, 경제개발 그리고 고도성장을 중요한 국가전략으로 내세우던 시대가 만들어낸 대규모 국책사업이다.
이 사업은 기획단계에서부터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관련 엘리트들이 국익이나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워 왔으며, 막상 지역민들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국책사업으로 추진되는 대규모 국토개발사업은 국가의 이익 앞에서는 어떤 것도 희생되어야 함을 마땅하게 여기고 또 그러한
가치관이 정당화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개발을 둘러싸고 국가와 지역민들은 서로가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갈들의 소지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국가 우선주의적 가치를 창조하면서 반강제적으로 국민들을 통제하여 왔다. 새만금사업의 경우도 국책사업으로서 국가가 국익을 앞세우면
이견을 내세우는 일이 쉽지 않았다.
새만금사업이 지역의 어민들에게 준 영향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이들의 생활근거지를 빼앗아간
것이다. 방조제 공사가 진척되어 이 지역의 생태계에서는 예측하기 힘든 변화가 일어났다. 해수의 유통이 되지 않자, 어족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패류들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비정상적인 서식을 하여서 수십 년 동안 어업에 종사해온 어민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어민들은 생존에 위협을
느끼게 되자 어민사회와 문화의 보존을 위해서 과거를 새롭게 보기 시작하였다. 또 갯벌과 바다와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새만금사업이래로 어민들은 타 지역이나 타 직종으로 바꿀 생각은커녕 오히려 어업과 마을사회에 대한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어촌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노력이 나타나고 있다. 마을의 각종 행사를 중심으로 화합과 단결을 강조하고 있다.
새만금사업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지역 어민들에게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채 생활의 근거지를 빼앗아 버린 일이다. 이들은 황폐한 바다환경에 대처하기 위해서 ‘옳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바다환경에 맞는 기술을 개발해 내고 있다. 그것은 불법적인 것이어서 어민들은 경찰의 눈을 피해서 조업을 하고
있다. 생태환경을 지키기 위한 어민사회 내부의 규범적 질서가 무너지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일은 애초에 시작되지 말았어야
할 ‘옳지 않은’ 새만금사업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민들은 먼저 생태적 규범을 깨뜨린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정부라고 생각한다. 십여 년이 지난
현재 새만금사업은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새만금간척사업의 주체들이 주목해야 하는 가장 시급한 일은 지역민들의 삶이 파괴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또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여러 층의 집단들 사이의 문화적 차이를 좁히는 일도 중요하다. 새만금간척사업은 시대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 안에서 대안이 만들어져야 하고, 이 과정에서 지역민들의 입장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간척이나 개발을 둘러싼 문화적인 갈등을 해결하는 일이 선결과제라는 뜻이다. 특히 지역민들이 지니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지역의 여건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표류하고 있는 새만금간척사업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고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다. 누대에 걸쳐서 생활하여온 바다와 그들의 생활방식, 가치관을 한꺼번에 버리거나 바꾸도록 강요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개발 방향이 아님을 인식할 때 진정한 의미의 ‘지속가능한 발전’이 이룩된다고 본다.
2004년 10월 27일 제2차 한.독 공동 심포지엄("지속가능한 새만금을
위하여")에서 함한희 교수ⓒ부안2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