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는 머 할라꼬 여기 있노
(너는 뭐 하려고 여기 있느냐)
이동민
거실 탁자에 둔 스마트 폰에서 ‘카톡, 카톡’하는 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고요를 흔든다. 뻔한 내용이다 싶어서 흘러보낸다.
은퇴 생활을 한지도 15년쯤 되어가니 할 일이 없으면서도 컴 앞에 죽치고 앉아서 시간이나 죽인다. 시간 죽이기도 싫증나면 그때서야 폰을 열어본다. 노인에게 좋은 말들이라며 폭포처럼 쏟아진다.
‘빈 몸으로 갈텐데 욕심을 버려라.’ ‘건강이 최고다.’ ‘억지로 이기려 하지 말고 한 발 물러서라.’ ‘자녀에게 의존하지 말자.’ 아, 참 아내가 늘상하는 말도 있다. ‘당신 요즘 말이 많아졌데이. 아는 척 하지 말그레이.’이다. 하나 같이 내가 지키지 못하는 말들이라서 나에게 회의를 느끼게 해준다. 때문에 언젠가부터 내게 화두가 되어 있는 이 말을 꺼내서 생각해본다.
“니 머 할라꼬 여기 있노.”
얼마 전에 중3인 손자가 편지를 보냈다.
“제가 한 달 전에 친한 친구와 말다툼을 하고, 지금까지 말도 하지 않고 지냅니다. 나는 그 친구와는 앞으로도 친구로 만나고 싶은데. 내가 먼저 말을 걸려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 할아버지의 지혜를 구한다나. 손자에게 멋 있는 말을 한다면서 ‘나이가 들면 그만큼 지혜가 쌓이니, 아버지의 말을 잘 새겨 들어라’고 한 말이 부메랑이 되어서 무거운 숙제를 짊어지고 와서 나에게 떠안긴다. 지혜로운 방법으로,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난감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자주 듣는 말이 있었다. 내가 먼저 양보하면 평화가 온다나. 그러면 손자더러 ‘너가 먼저 전화해서 미안하다. 라는 말을 하라’고 해야 한다. 손자에게 이 말을 하려니 내키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항상 양보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한다. 이 말이야말로 내가 신주단지처럼 모시면서 지켜온 인생살이의 길잡이였는데, 나는 왜 주저할까.
전화가 왔다. 어제 선생님 병원에서 예방주사를 엉덩이에 맞았는데, 걷지를 못합니다. ‘지금 대학병원에 가고 있습니다.’ 가슴이 철렁했다. 입원이 필요하면 입원을 시키세요. 엉덩이에 놓는 예방주사에서 나타나는 가장 흔한 부작용이다. 대부분이 일시적인 신경마비 현상이지만, 대학병원에 가는 길이라니, 덜컥 겁이 났다. 다음 날까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튿날,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찾아왔다. 아이는 대기실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마음이 놓이면서 긴장이 풀어져 후유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환아의 아버지는 대학병원을 다녀오면서 든 비용이 *만 원인데, 달라고 했다. 내 생각에 얼토당토 않는 요구였다. 흔히 올 수 있는 부작용이고, 아무런 탈도 없는데 돈을 요구하다니. 가슴 속은 부글거렸지만, 나는 빠르게 계산하였다.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인데, 주어버리면 마음 편히 끝나버린다. 세상을 쉽게 살아가는 방법이 아닌가. 그래 내가 양보하자. 이것이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의 방식이다.
나중에 소아과 선생님들의 모임 자리에서 내가 경험하였듯이 예방주사를 맞고 간 아이가 찾아와서 돈을 요구하더라며, 그 선생님은 목소리를 높이면서 화를 풀어내었다. 자기는 아이의 보호자와 대판으로 싸웠다며, 돈이야 몇 푼 되지 않았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도저히 물러설 수 없었다고 했다. 나는 그 선생님이 옳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내가 경험하였던 일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편하게 살려고 자존심을 굽혔다는 것이 심히 부끄러웠다. 이 경험만이 아니다. 내 삶 속에는 이런 일들이 숱하게 많았다. 비록 하루하루가 편하였을지라도 자존심이 뭉개지는 댓가를 치루었다. 편한 삶을 선택하다보니 나는 인생살이에서 소극적이 되었다.
돌아보면, 어릴 때 다른 아이와 싸운 일은 거의 없었다. 옆집의 도동 할매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우리 **는 양반이데,’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나를 즐겁게 해주었을까. 아닌 듯하다. 학교에서 덩치가 큰 아이가 집적거리면 나는 뒷걸음질 했다. 그날 밤에는 나는 그때 유행하던 태권도 유단자가 되어서 나를 괴롭히던 친구를 박살을 내버리는 상상을 한다. 그때도 이불킥이나 하면서 나는 자존심을 지키려 코피가 터지기보다는 편한 길을 선택하였다.
중년이 되어서 취미 생활을 한다면서, 수필공부를 하고, 문학모임에 들어갔다. 모임에서 나는 신입이고, 글쓰기도 많이 모자라는 처지였다. 합평회를 할 때는 유난히도 내가 더 많은 비판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모른다고 내 자존심을 뭉갠다 싶어서 속으로는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겉으로는 ‘예, 예, 잘 배웠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든가. 나는 수필 이론서를 사모았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거의 100권 쯤이었으리라. 그 뒤에 유난히도 나를 많이 비판하였던 선배 수필가님에게 내가 공부하였던 수필이론을 들고나와 치받았다. 그 선생님은 화가 돋친 나의 반박에 되받지 못하고 쩔쩔 맸다. 그때 느낀 쾌감은 정말 신비로웠다. 왜냐면 나는 그때 후로 문학이론 공부를 했다. 내가 자존심을 지키면서 쾌감을 맛보는 방법을 찾았다고 할까. 은퇴를 한 후로는 물러서지 않으려 더 많이 공부한다.
아내가 잔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노년이 된 후로는 내가 말이 많아졌나 보다. 더구나 노인이 버려야 하는 것들을 나열한 금언집에는 ‘척심을 버려라’가 있었다. 나는 많은 공부를 하였다고 생각하니까, 아는 척 하는 척심도 더 많이 쌓였었나 보다.
내가 손자에게 한 발 양보하여, 먼저 전화하라고 선 듯 말하지 않는데는 나의 겉과 속이 달랐던 지난날의 갈등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편함을 찾아서 자꾸 물러서다 보면 인생살이가 소극적으로 되어 버린다. 나는 내가 그렇게 살았었고, 그 삶이 내면으로는 불만을 키우는 방법이라서 좋지 않더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더욱이 그런 방법으로 새상을 사는 것은 모험심을 발휘하여 적극적으로 인생을 개척하면서 사는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소극적으로 살면서 가슴 속으로는 얼마나 많은 분노가 이글거렸던가. 그게 좋은 삶일까. 나는 내 인생살이와는 다르게,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내 손자가 삶을 소극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수필모임에 나가서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인 방법을 선택하였음으로 자존심도 회복하였고 ------. 그래서 손자에게 나처럼 물러서면서 사는 법을 말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에 나는 또 아는 척하느라 말이 많다는 따가운 질책을 받았다. 내가 힘들게 찾았던 삶의 방법이 도전받은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내가 한 말이 생각난다. ‘당신 요즘 아는 척 하고, 말이 많아졌어.” 그걸 버리고 지금 다시 다른 길을 찾으려 헤메야 할까.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내 마음을 들여다 본다.
”니는 머 할라꼬 여기 있노.“
첫댓글 수필 이야기가 우리들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학장님의 글은 쉬우면서도 촌철살인입니다.
더위 잘 나십시오.
학장님 글 재밌고도 진솔하여 공감 크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