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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왜 실패하는 가]
제 7장 전환점
- 윌리엄 리의 양말짜는 기계는 그 기술이 획기적이고 엄청난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음에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엘리자베스, 프랑스, 제임스 1세에게 거부당한다.
새로운 혁신은 그로 인해 기득권을 잃게 될 것을 염려한 저항을 반드시 극복해야만 가능하다.
◉ 대헌장 마그나카르타(1215) ; 국왕의 권한이 부분적으로 축소. 25인의 귀족이 감시
- 과세하려면 국왕이 귀족의 자문을 얻어야함.
마그나카르타 이후 최초의 의회 선출
1. 왕과 가까운 엘리트층만이 아니라 다른 이해관계를 폭넓게 대변. 상공업등 다양한 부문에 관련된 소수 귀족은 물론 훗날 상업 및 농업으로 부를 축적한 젠트리라는 신흥하급 귀족까지 포함됨
2. 의원들은 힘을 키우려는 왕실의 노력에 한사코 반기를 들었으며 잉글랜드 내전에 이어 명예혁명에 이르기까지 왕실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중심축.
장미전쟁후
▾ 1485년 튜더왕조. 중앙집권화에 박차. 중앙정부의 힘을 대폭 확대.. 헨리 8세 토머스 크롬웰을 시켜 기초적인 수준의 관료정부 도입. 독립된 제도로서 정부가 설립됨.
정부제도를 중앙에 집중함으로써 처음으로 포용적 정치제도 가능해짐. 폭넓은 대의정치에 대한 요구가 한층 커지는 계기마련
▾ 정치권력의 중앙집권화 과정은 왕과 막료가 권력을 틀어쥐고 사회의 다른 권력 집단을 탄압할 수 있기때문에 절대왕정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나 기초적인 수준이나마 다원주의를 외치는 목소리를 키우기도 한다.
▾정치권력이 갈수록 중앙으로 쏠리고 그런 과정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귀족과 지방 엘리트층은 중앙에 집중된 권력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발언권을 요구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꾸게 된다.
▾정치제도를 둘러싼 변화와 함께 사회의 성격에도 다른 중대한 변화 감지,,, 정치갈등이 확산하면서 군주와 정치 엘리트층에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세력도 확대. 1381년 농민반란을 계기로 잉글랜드 엘리트층은 오랫동안 잇따른 민중반란에 시달림. 왕으로부터 귀족에게만 정치권력이 분배된 것이 아니라 엘리트층에서 민중에게도 권력이 넘어가고 있었다. 절대왕정에 반대하는 광밤위한 연합세력 탄생, 다원주의적 정치제도를 위한 토대마련..
○ 독점법
▾제임스 1세와 챨스 1세는 절대적인 제도로 왕실과 엘리트층이 확실하게 경제를 틀어쥘 수 있기를 바랐다. 1620년 ,제임스 1세와 의회의 갈등 최고조. 국외는 물론 브리튼제도 내의 무역에 대한 통제권을 누가 갖느냐의 문제..1623년 의회..독점법을 통과시킴, 제임스 1세가 국내에서 새로 독점권 부여 못하게 막음..
▾ 찰스1세 1625년 즉위, 1629년 부터 의회소집 거부.
강제대금제도 도입, 해외무역 주력. 부당한 벌금과 수수료 마구 거두어들임. ex)건함세
-전국적인 반발..
▾챨스 1세. 1640년 스코틀랜드와 전쟁중 군자금이 모자라 어쩔 수 없이 의회소집.
1642년 절대주의적 정치제도를 강화해주길 바라는 찰스와 척결을 원하는 의회 사이에 내전 발발. 올리버 크롬웰이 이끈 의회파 승리, 1649년 찰스 1세 처형-올리버 크롬웰의 독재정권으로 바뀜.
▾크롬웰이 죽고 1660년 왕정복고. 찰스 2세 , 제임스 2세 절대왕정 수립 노력. 의회의 단결력이 커짐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고 오렌지공 윌리엄과 메리를 잉글랜드의 공동통치자로 불러들임
- 윌리엄은 절대군주가 아닌 의회가 마련한 입헌 군주하의 왕이 되겠다고 선언.
◉ 명예혁명.
1689년 ‘권리선언. 여러 가지로 모호했지만 일부 핵심적인 헌정 원리 확립.. 국왕이 함부로 법을 중단하거나 폐지하지 못하며 의회의 동의 없는 과세는 불법.
▾1688년 이후 정부의 권위와 의사결정 권한은 의회에 있었다. 윌리엄이 별다른 저항없이 상당부분 이전의 왕들이 누렸던 권리들을 포기. 이후 정부 정책을 주도한 것은 의회, 의회의 귀족 중에는 무역과 산업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확고한 사유재산권을 집행해야 할 필요성을 느낌. 기꺼이 세금을 올리고 필요하다고 판단한 활동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음,.해군력에 많은 투자
▾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제도의 다원적 성격이 강해지고 있었다는 사실
청원제도. 누구든 의회에 청원할 수 있었고 실제로 청원자가 밀려들었다. 의회가 귀를 기울임. 훨씬 폭넓은 사회집단이 정부의 운영방식에 영향을 줌.
◉ 독점철폐 :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왕을 위한 독점권에 속해 있었다.
▾ 챨스 2세에게 독점권을 하사받은 왕립 아프리카회사- 독점권을 침범한 나이팅게일의 화물 압류. 법원은 이것이 왕실 특혜로 만들어진 독점권을 행사했으므로 불법이라고 판정. 이제 모든 독점권의 존폐여부가 왕이 아닌 의회의 권한에 속하게 됨
▾ 빗발치는 청원 속에 1689년 왕립 아프리카 회사 독점 폐지. 1688년 이후 의회가 경제 제도를 결정하는 새로운 장이 되고 인민의 요구에 전례없이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면서 의회파는 경제 제도 및 정부 정책을 잇따라 개혁해 산업혁명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1694년 잉글랜드 은행을 발족하면서 금융개혁도 시작. 엘리트 층이 아닌 사람도 활발하게 대출을 이용했다.대출이용자 셋중 둘이 엘리트층이 아니었음.
▾ 중앙집권화 과정도 지속. 모든 면에서 정부의 기능과 역량이 확대.
1688년 이전에 의회가 정부에 자원을 몰아주고 더 효율적으로 만드는데 반대한 것은 통제가 불가능했기 때문. 이제 달라짐. 늘어난 소비세에 따라 정부예산도 엄청나게 늘어남. 정부관료의 일하는 행태도 달라짐. .
◉ 산업혁명
독점철폐와 세제, 금융개혁과 사유재산권의 안정으로 혁신가와 기업인에 유리하도록 경제
제도가 근본적으로 개편..
▾운송에 대한 투자.
볼드윈가문 솔워프강에 배를 띄울 수 있게 투자..통행료를 징수할 권리가 바뀔 처지에 놓이자 법에 호소. 승리. 법이 불안정한 사유재산권을 안정시켜줌. 투자가 활발해짐. 직물산업. 독점권과 그 반대를 위한 치열한 청원전쟁이 이어지면서 다원주의로 활발히 나아감
◉가속화되는 기술혁신
1760년에 이르면 다원주의 정책의 모든 요인이 한데 어우러져 상승효과 나기 시작.. 발명품 수 급증,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 더 먼저 프랑스 물리학자 파팽이 1705년 최초의 증기선을 만들었으나 알거지로 생을 마감함.(변화를 두려워한 독일의 기득권층 때문에)
▾ 1780년 제철분야..헨리코트.. 철의 불순물처리에 대한 새로운 기법 연철 대량생산..
혁신에 가속도가 붙음,,,
▾리처드 아크라이트의 수력방적기. 제임스 하그리브스의 다축방적기. 방적혁명이 일어남
18세기 초입 100파운드의 면에서 실을 뽑아내려면 5만 시간
1764년 직조 기계화로 인해 135시간이면 가능.
- 잉글랜드의 직물산업은 산업혁명의 원동력이었을 뿐아니라 세계경제를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음..1780년~1800년 사이 면직물이 주도한 영국의 수출은 두배,, 전체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함, 직물산업의 성장은 온 세계에 날로 부유해질 수 있는 경제성장의 모형을 제공함.
이런 변신 과정의 요체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새로운 인물이 있어야 가능.
운하→ 도로→ 철도로 발전을 이어감
▾1819년 피털루학살 (사회의 다양한 집단들이 목소리를 냄)
신흥수공업자와 수공업 중심지를 더 이상 정치적으로 배제하기 어려워짐
▾1846년 곡물법 폐지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하거나 실제로 그로부터 타격을 입는 이들도 더 이상 막아낼 재간이 없었음.
◉ 왜 하필 잉글랜드였을까?
독보적이라 할 만큼 포용적인 경제 제도 덕분
- 명예혁명은 사유재산을 합리적으로 강화하고 금융시장을 개선했으며 해외무역에서 정부가 허용한 독점을 와해시키고 산업확장을 가로막는 진입장벽을 제거해 주었다,
- 명예혁명은 헌정질서와 다원주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정권의 탄생을 의미..
- 잉글랜드에서는 의회의 권한이 더 컸으므로 튜더와 스튜어트왕조가 독점권을 수립하기 어려웠다. 그 덕분에 절대왕정을 수립하려는 시도에 극렬히 반대하는 새로운 계층의 상인과 사업가가 탄생할 수 있었다.
- 군주제를 지지하는 세력과 절대왕정에 반대하는 세력 간의 갈등에서 힘의 균형을 뒤흔들어놓은 요인은 아메리카 대륙발견에 따른 무역 기회의 확대였다. 해외무역 및 식민지 경제발달과정에서 잉글랜드 신흥 상인 세력이 대규모로 참여하게 되고 그에 따른 막대한 부의 축적.
- 다양한 이해관계가 저마다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절대왕정에 반대하는 연합세력이 그만큼 강했을 뿐아니라 그 범위도 대단히 넓었다는 뜻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연합세력의 힘은 1670년 휘그당의 창설로 더욱 강해진다. 연합의 이익을 증진할 조직력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명예혁명이후 다원주의가 뿌리내리는 토양이 되어주었다,
8장 발달을 가로막는 장벽
◉중앙집권화의 부재
1443년 독일의 구텐베르크, 인쇄기 발명 –유럽 여러 나라에 빨리 확산됨
▾1485년 오스만제국 술탄. 이슬람교도의 아랍어 인쇄행위 금지
1757년에야 인쇄기 도입,,그러나 제재가 심했음.
인쇄술에 대한 저항은 문맹률, 교육, 경제적 성공에 분명한 영향을 미침.
절대주의 체제란 법이나 다른 집단의 바람을 철저히 무시하는 정권.
19세기 러시아도 인구의 1%정도를 대변하는 귀족층의 지지를 받음. 이런 편협한 집단이 항구적 권력유지를 위해 정치제도를 수립
◉ 산업화를 가로막는 장벽-절대주의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고 사유재산권을 집행할 만한 중앙집권 정부가 없다면 포용적 제도가 싹틀 수 없다.
▾ 중앙집권화를 꺼리는 이유 ; 기존 집권 세력이 중앙집권 정부와 그 정부를 통제하는 세력에 의해 정치권력을 박탈당하는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
중앙집권화과정이 더 극심한 절대주의 체제를 불러오는 상황이 오기도 함.
▾표토르 ; 보야르라는 구 귀족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근대 관료주의 정부와 근대식 군대를 창설하기 위해 상트에 새 수도 건설. 보야르두마 철폐. 완전히 새로운 사회계급 질서인 관리등급표 도입, 근본적으로 차르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교회 왕권에 종속시킴. 중앙집권화과정을 통해 다른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킴. 그의 군사개혁은 전통 친위대인 스트렐치의 반란초래, 여러 봉기들.,..진압..
○ 작지만 중요한 차이
-이사벨라. 아라곤 결혼(아라곤과 카스티야 ); 에스파냐, 유럽 초강대국으로 부상.
- 딸 후아나 펠리페와 결혼( 신성로마제국 황제 합스부르크왕가 막스밀리안의 아들)
1516년 후아나와 펠리페의 아들 카를로스가 즉위(카스티야와 아라곤. 이베리아와 아메리카 대륙, 네델란드와 프랑콩테) 1519년 막스밀리안 1세가 세상을 떠나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로스 5세로 등극. 엄청난 왕국의 주인. 절대주의 체제 지속,아메리카 대륙의 막대한 귀금속이 절대주의 체제 유지에 기여..
- 사유재산권 불안
카를 5세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금융거상이던 푸거와 벨저가문 제노바가문을 몰락케 함. 돈을 안 갚아서..
- 아메리카 발견이후 이사벨라와 페르디난트는 세비야의 상인길드를 통해 식민지와 에스파냐간 무역 주관, 부의 일정지분 왕실로..식민지와 자유무역은 왕실의 허가없이는 꿈도 못꿈. 따라서 광범위한 상인 계층이 부상하지 못함, 아메리카 대륙 내부간의 무역조차 극심한 규제..멕시코의 상인과 콜롬비아의 상인도 거래할 수 없었음..
- 아리곤과 카스티야의 코르테스는(귀족의회) 주요도시만 대변..15세기에 고작 18개 도시만 대변. 광범위한 사회집단 대변하지 못했기 때문에 절대왕정에 제동을 걸기위해 투쟁하는 다양한 이해집단의 결합체로 발전하지도 못함. 입법활동도 불가능했고 과세와 관련한 권한 역시 제한적
- 카를로스 5세와 펠리페 2세는 비싼 전쟁을 치르느라 그 많은 금은 유입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늘려야 할 형편..1520년 코르테스 소집,, 도시엘리트층은 이를 기회삼아 개혁과 권한 확대 요구,,, 저항운동이 일어났으나,,,,왕실이 진압,
- 16세기 내내 왕실과 코르테스 간의 분쟁 1664년이후 개원 조차 못하다가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고서야 부활.
- 17세기 내내 상업적 성장에 이어 급속한 산업화과정으로 이양하는 잉글랜드와 달리 에스파냐는 제국 전반에 경제적 쇠퇴의 길을 걸음.
● 산업화에 대한 우려
프란츠 1세(1792년~1806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황제, 1835년 죽기 전까지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황제) 뼛속까지 절대주의 통치자. 기본 전략.은 어떠한 변화에도 반대하는 것.
마리아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강력한 중앙집권 정부와 행정체제 수립을 위해 애씀, 그러나 자신들의 행동에는 제한이 가해질 수 없는 정치체제 만들고자 함. 에스파냐 군주보다 견제하기 어려웠으며 정치권력은 극소수에 편중
▾합스부르크 왕가의 경제 제도를 지탱한 것은 여전히 봉건질서와 농노제..
프란츠1세는 산업발달을 위험요소로 봄.. 가난한 노동자가 도시로 몰려들면 절대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자들을 추종할지도 모르기때문. 혁명이 번질까봐 철도의 건설도 반대. 1883년까지도 철 생산의 절반 이상을 목탄에 의존. 세계 제 1차 대전까지도 직물 직조가 완전히 기계화되지 못해 수작업 필요.
● 러시아에 혁명은 없다.
러시아 지배층 역시 창조적 파괴와 산업, 철도를 두려워함.
니콜라이 1세
- 칸크린 (재무장관) 지주,귀족등 전통적인 정치권력의 축을 강화하고 농촌경제 사회를 유지하는데 주력. 국영상업은행을 발전시키자는 제안에 반대하고 상업은행의 자산을 국립대출은행 자금으로 활용. 봉건지주만이 대출받을 자격이 주어짐. 기업이 가져다 쓸 돈이 바닥 남..
니콜라이는 칸크린을 부추겨 산업발전을 더디게 할 구체적 조치를 취하게 함.
- 이전까지만 해도 신기술을 전시하고 기술적용을 장려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개최하던 여러 가지 산업전시회도 금지..
- 모스크바에 지을 수 있는 공장의 수 통제하는 법 발효, 면직, 모직 방적공장과 제철소의 건설 금지. 철도 건설 막음. 철도개발에 대한 언론 논의 자체를 검열. 크림전쟁에 패하고부터 재고..
● 선적금지..
송왕조시절 수많은 기술혁신으로 세계 주도. 시계, 나침반, 화약, 종이, 지폐, 도자기, 화로, 주철을 만드는 용광로 등 유럽보다 먼저 발명. 물레와 수력도 유럽과 비슷한 시기에 독자적으로 개발. 또한 수세기 동안 능력 본위의 관료체계를 갖춘 중앙집권 정부 들어섬.
- 하지만 중국 역시 절대주의 체제가 군림했고 송 왕조 하의 성장도 착취제도를 기반으로 한 것..
- 지배층 이외의 다른 집단을 대변하는 의회 또는 코르테스같은 정치적 대의기구가 존재하지 않았고 상인의 지위는 늘 불안했으며 송왕조의 위대한 발명품들도 시장의 인센티브가 아닌 정부의 장려나 명령에 따른 것. 상용화된 발명품 거의 없음..
- 명. 청 왕조; 변화를 거부하고 안정을 추구..
명의 영락제 때 정부가 후원하는 해외무역 대대적으로 재개. 이후 폐쇄. 1436년 에는 바다에 띄울 선박건조 자체가 불법.
- 1661년 청의 강희제 배트남 저장성에 이르는 해안 일대의 주민을 내륙으로 강제이주 . 1693년까지 해안을 통한 운항 전면 금지. 중국의 해외무역 발달 방해
● 프레스트존의 절대주의,,
에티오피아-절대주의 체제의 완벽한 사례.
다원주의 제도는 찾아볼 수 없고 황제의 권력에 대한 견제나 제약도 없었다. 신성한 통치권 주장. 시바의 후손으로 여겨짐.
- 모든 땅이 왕의 소유. 왕이 죽으면 모든 땅은 모조리 왕실 소유. 현재 땅을 가진 자가 숨을 거두면 다시 왕실 소유..
- 19세기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화가 시작될 때 독립왕국이던 에티오피아. 테오드로스 2세는 중앙 집권화된 관료제와 사법부, 전국을 장악하고 유럽인과 맞설 수 있는 군대를 창설하는 등 정부의 근대화 작업에 착수..
- 이 군대가 메넬리크 2세 시절 이탈리아와 맞서 싸워 독립을 40년간 더 유지하기도 함.
후에 쿠데타가 일어나 정권이 교체됐지만 착취적인 정권. 더욱 가난하고 황폐해 짐..
● 소말리아 사회의 특수성
19세기 초에만 해도 아프리카엔 최소한의 법과 질서를 유지할 만한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지역이 수두룩..
역사적으로 소말리아를 지배한 것은 6개 부족..(힘의 균형으로 중앙집권정부가 들어서지못함)
- 디야지급집단.(씨족내의 단위) ; 집단의 일원을 살해한 댓가를 지급하는 보상금으로 디야지급 집단은 이 디야를 지급하고 수금하는 가까운 친족들로 구성,
- 소말리야 씨족과 디야지급집단은 역사적으로 희소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한시도 싸우지않은 적이 없다. 지도자와 연장자도 실질적인 권한이 별로 없고 성인 남성은 누구나 발언권이 셌다. 정치권력이 넓게 분산되어 있음..성문법이나 경찰 사법체계라고 할만한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음..
- 비공식적인 법을 도출하는 큰 틀은 –히어
P345
- 혈부와 혈수; 집단의 일원을 살해한 댓가로 치루어야 하는 보상금
- 혈수; 씨족의 일원이 다른 씨족의 일원에게 피해를 당하면 소속 씨족의 일원이 가해 씨족에 복수할 권리와 의무를 갖는 관습적인 제도...(맨날 싸움만 하다가 죽지않을까?)
- 소말리아는 정치권력이 언뜻 다원주의적으로 비칠 정도로 폭넓게 분배되어 있었지만 사유재산권은 고사하고 질서유지를 강제할 중앙집권 정부가 없었기 때문에 포용적 제도로 이어지지못함..
-타갈리(남수단 구릉지대); 문자사용 거부. 더욱 착쥐당할까 봐. 지배층은 문자로 기록을 남기면 번복이 어려울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