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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생디(Gassendi, Pierre) (1592.1.22~1655.10.24) 프로방스 출생. 에크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 이 대학의 신학·철학 교수가 되었으나, 자연과학 연구에 전념하기 위하여 교수직을 사임하고, 1645년에 파리의 콜레주 루아얄의 수학교수가 되었다. 최초의 역작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에 대한 역설적 연구》(24)에서 명백히 밝힌 바와 같이, 사상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 제파(諸派)에 대해 격렬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수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방면의 활약에서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기조로 하였다. 그는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적 원자론(唯物論的原子論)에 입각하여 물질과 독립된 시간과 공간의 존재를 논증하고, 이의 불멸(不滅)을 주장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경험 지식을 모든 인식의 원천이라고 선언하여 R.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형이상학적 개념에 반대하였다. 그가 주장한 원자론은 18세기 프랑스 계몽기의 감각론자(感覺論者)나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에게 큰 영향을 줌으로써 근대원자론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과학자로서는 천체의 관측과 지중해의 수로도(水路圖)작성에 업적을 남겼다. |
가우스(Gauss) (1777 - 1855) 대수학·해석학·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 19세기 최대의 수학자라고 일컬어진다. 수학에
이른바 수학적 엄밀성과 완전성을 도입하여, 수리물리학(數理物理學)으로부터
독립된 순수수학의 길을 개척하여 근대수학을 확립하였다. 한편
물리학, 특히 전자기학(電磁氣學)·천체역학(天體力學)·중력론(重力論)·측지학(測地學)
등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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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루아(Galois) (1811 - 1832) 21세의 적은 나이로 죽은 천재적 수학자로서, "방정식의 대수적 해법"을 해결하였다. 파리 근교에서 태어난 그는 1828년 중학생때 종합 기술대학에 응시하였으나 떨어져 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1829년 방정식에 관한 논문을 프랑스 학술원에 제출했는데, 심사위원이 그의 논문을 잃어버렸으며, 뒤에 <방정식의 일반해에 대하여> 라는 논문을 학술원에 또 제출하였으나, 이번에는 심사위원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논문이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심혈을 기울여 쓴 논문을 두 번이나 잃어버린 그는 매우 화가 치밀어 사범학교에서 정치 활동에 열중하였다. 1830년 콜레라에 걸려 가석방되었으나, 결투 끝에 죽었다. 그는 온갖 불행과 비극이 겹친 가운데서도 놀랄만한 수학적업적을 남겼는데, 그의 업적은 그가 결투하기 전날 밤, 친구 수발레에게 보낸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 중, 오늘날 "군"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이론에 의해 방정식을 대수학적으로 풀 수 있는 조건을 구한 "갈루아의 이론"등이 유명하다. 갈루아의 이론<Galois theory>(-理論) 갈루아에 의해 체계화된 대수학(代數學) 이론. 일반적인 n차방정식은 n?일 때 대수적으로 풀 수 있으나 n?일 때에는 대수적으로 풀리지 않는다. 이 사실을 처음으로 증명한 수학자는 아벨인데, 그는 여기서 유한회(有限回)의 사칙연산(四則演算)과 근호(根號)에 의한 일반적인 풀이의 공식은 존재할 수 없다고만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갈루아는, 아벨과는 독립적으로 갈루아의 이론을 창시하여 그 문제에 결정적인 해답을 제시하였다. 갈루아는 대수방정식의 근(根) 사이의 치환군(置換群)과 수체(數體)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착안하여 대수방정식을 대수적으로 풀기 위한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얻었다. 갈루아의 이 연구는 대수학, 특히 새로운 대수학에의 실마리를 준 이론으로 평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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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Galilei, Galileo) (1564.2.15~1642.1.8) 피사 출생. 피렌체의 시민계급 출신이다. 성과 이름이 비슷한 이유는 장남에게는 성을 겹쳐 쓰는 토스카나 지방의 풍습 때문이다. 1579년 피렌체 교외의 바론브로사수도원 부속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81년 피사대학 의학부에 입학하였는데, 이 무렵 우연히 성당에 걸려 있는 램프가 혼들리는 것을 보고 진자(振子)의 등시성(等時性)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84년 피사대학을 중퇴하고 피렌체에 있던 가족과 합류하였다. 이곳에서 아버지 친구이자 토스카나 궁정수학자인 오스틸리오 리치에게 수학과 과학을 배우면서 대단한 흥미를 느꼈다. 이때 습작(習作)으로 쓴 논문이 인정을 받아 92년 피사대학의 수학강사가 되었고, 같은 해 베네치아의 파도바대학으로 옮겼다. 파도바대학에서는 유클리드기하학과, 천동설(天動說)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가정교사 노릇을 하면서 리치에게 배운 응용수학을 연구하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간단한 군사기술 입문》 《천구론(天球論) 또는 우주지(宇宙誌)》 《축성론(築城論)》 《기계학》은 이 시기의 저서이다. 베네치아의 여성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으며, 파오로 사르피 같은 당대의 뛰어난 학자·귀족 등과 친교를 맺었다. 1604년의 《가속도운동에 관해서》에서 발표한 근대적인 관성법칙(慣性法則)의 개념도 이미 그 전에 사르피에게 보낸 서한에 나타나 있다. 1609년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수 망원경을 만들어 여러 천체에 대하여 획기적인 관측을 하였다. 예를 들면, 당시에는 완전한 구(球)로 믿었던 달에 산과 계곡이 있다는 것, 모든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생각하였는데, 목성(木星)도 그것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10년에 이러한 관측결과를 《별세계의 보고》로 발표하여 커다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해에 교직생활을 그만두고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서 토스카나대공(大公)인 메디치가(家)의 전속학자가 되었다. 그 후로도 천문관측을 계속하여 12∼13년에 태양흑점 발견자의 명예와 그 실체의 구명(究明)을 둘러싸고, 예수회 수도사인 크리스토퍼 샤이너와 논쟁을 벌여, 그 내용을 《태양흑점에 관한 서한》에서 발표하였다. 이 무렵부터 갈릴레이는 자신의 천문관측 결과에 의거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地動說)에 대한 믿음을 굳히는데, 이것이 로마교황청의 반발을 사기 시작하였다. 성서와 지동설과의 모순성에 관하여 제자들에게, 그리고 자신이 섬기는 대공(大公)의 어머니에게 편지형식으로 자기의 생각를 써 보냈는데, 이로 말미암아 로마의 이단심문소로부터 직접 소환되지는 않았지만 재판이 열려, 앞으로 지동설은 일체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제1차 재판). 18년에 3개의 혜성이 나타나자 그 본성(本性)을 둘러싸고 벌어진 심한 논쟁에 휘말리는데, 그 경과를 《황금계량자(黃金計量者)》라는 책으로 23년에 발표하였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지동설과 천동설의 문제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천동설을 주장하는 측의 방법적인 오류를 예리하게 지적하였으며, 우주는 수학문자(數學文字)로 쓰인 책이라는 유명한 말을 함으로써 자기의 수량적(數量的)인 자연과학관을 대담하게 내세웠다. 그 후 숙원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2대 세계체계에 관한 대화:Dia1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tolemaico e copernicaon》의 집필에 힘써, 제1차 재판의 경고에 저촉되지 않는 형식으로 지동설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이 책은 32년 2월에 발간되었지만, 7월에 교황청에 의해 금서목록(禁書目錄)에 올랐으며, 갈릴레이는 로마의 이단심문소의 명령으로 33년 l월에 로마로 소환되었다. 4월부터 심문관으로부터 몇 차례의 신문을 받고, 몇 가지 위법행위가 있었음을 자인하였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심문소 당국이 증거로 제시한 서류 중 몇 가지는 그 진실성이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6월에 판결이 내려졌고, 그는 그것을 받아들여 앞으로는 절대로 이단행위를 않겠다고 서약하였다(제2차 재판). 그 뒤 갈릴레이는 피렌체 교외의 알체토리에 있는 옛집으로 돌아왔는데, 사랑하는 장녀와 시력마저 잃었지만 마지막 대작인 《두 개의 신과학(新科學)에 관한 수학적 논증과 증명:Discorsi e dimonstrazioni mathematiche intorno a due nuove scienze attenenti alla meccanica》의 저술에 힘썼으며, 일단 정리되자 신교국(新敎國)인 네덜란드에서 출판하였다. 이어 속편 집필에 착수하였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죽은 후에는 공적(公的)으로 장례를 치를 수 없었으므로 묘소를 마련하는 일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만년에는, 스승의 전기를 쓴 V.비비아니와, 기압계(氣壓計)에 그 이름을 남긴 물리학자 토리첼리의 두 제자가 그의 신변에 있었다. 갈릴레이의 생애는 르네상스기와 근대와의 과도기에 해당되며, 구시대적인 것과 새로운 것이 그의 생활이나 과학 속에도 공존하고 있었다. 천문학에서는 지동설을 취하면서도 케플러의 업적은 전혀 이해하지 않았고, 물리학에서의 관성법칙을 발견했지만 이것의 정식화(定式化)는 데카르트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도 자유가 주어지는 파도바대학을 떠나 봉건제후(封建諸侯)의 전속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간다운 면은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 뛰어난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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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델<G el, Kurt> (1906.4.28~1978.1.14) 오스트리아 출생. 빈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후, 동대학 강사(1933∼38)로 있었다. 그 동안 과학적 방법 위에 철학의 기초를 세우려고 한 빈 학파에 속하여, 그 후 수학기초론이나 논리학의 방법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많은 ‘괴델의 정리’를 발표하였다. 특히 유명한 것으로는 1931년 발표한 ‘불완전성 정리’인데, 이것은 당시의 H.힐베르트나 B.러셀과 같이 공리적인 방법에만 의존하여 수학의 체계를 세우려는 확신을 좌절시킨 정리이다. 38년 나치스 정권의 박해로 미국으로 이주하여, 프린스턴고등연구소 연구원이 되었다. 주요 저서 논문으로는 《냕er formale unentscheidbare S둻ze der Principia Mathematica und verwandter Systeme》(1931) 《The Consistency of the Axiom of the Choice and of the Generalized Continuum-Hypothesis with the Axioms of Set Theory》(48)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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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Gregory, James>(1638.11~1675.10) 미적분학의 고안에 공헌하였으며, 반사망원경을 발명하여 이것을 저서 《Optica Promota》(1663)에 기재하기도 하였다. 또한, 기하학적 도형의 면적측정에 관한 독자적 방법을 발표하여 호이겐스와 논쟁을 벌였으며, 망원경에 관하여 I.뉴턴과 서신을 교환한 일도 있다. 세인트앤드루스대학(1669)과 에든버러대학(74) 교수를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Geometriae pars universalis》(68) 《Exercitationes geometricae》(68)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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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피어(Napier) (1550 - 1617) 에든버러 근교의 머키스턴 성에서 태어나 13세때 세인트 앤드루스 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 후 프랑스에 유학하였다가 아버지가 죽은 후 1608년에 머키스턴 성으로 돌아와 평생을 그 곳에서 보냈다. 그는 신학,점성술,수학 등을 좋아하였는데 특히 신학에서는 묵시록을 신교의 관점에서 해석한 <성 요한 묵시록 전체에서의 소박한 발견>을 펴냈다. 또한 그는 40여년에 걸친 수학 연구로 산술,대수,삼각법등의 단순화 ,계열화를 꾀했다. 그 중에서 계산의 간편화를 목적으로 한 수학사상 큰 업적은 로그(대수)의 발견이었다. 1616년에는 브리그스와 함께 상용로그표를 만들었으나 계산이 완성하기 전에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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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터 (1832 - 1935) 막스 네터의 딸로 1914년 괴팅겐 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수와 상수, 연산의 관계를 명백히 하여, 일반적인 관념론과 다원수론에 의한 추상대수학을 확립하였다. 즉 이는 고전적 대수기하학의 면목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현재의 추상화된 수학 발전에 공이 크다. |
노이먼 (1903 - 1957) 게임이론이라는 유명한 수학의 한 분야를 발전시킨 미국의 수학자였다(1903 - 1957 ). 그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자라 베를린과 부다페스트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19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33년 이후로는 뉴저지의 프린스턴에 있는 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응용 학문 연구소)에 합류했다. 그는 1937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으며 2차 대전 중에는 The Los Alamos 원자 폭탄 프로젝트에 고문으로 일했다. 1955년 3월에는 미국 원자력 위원회 (U.S. Atomic Energy Commission)의 위원이 되었다. 뉴먼은 세계적으로 뛰어난 수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양자 역학 이론, 특히 연산에 대한 환(ring)의 개념("뉴먼 대수"로 알려져 있다)에 대한 중요한 공헌으로 주목받았다. 또한 주로 통계학과 수치 해석 등의 응용 수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그의 선구자적인 업적은 그를 더욱 빛나게 했다. 그는 또한 초고속 전자 컴퓨터를 고안한 것으로 유명한데 1952년 신축적인 저장 프로그램을 이용한 최초의 컴퓨터, 매니악 I (the Maniac I)을 만들어 냈다. 1956년, 원자력 위원회는 전자 컴퓨터의 고안과 이론에 대한 지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엔리코 페르미 상(The Enrico Fermi Award)을 수여했다. |
뉴우튼 (1642 - 1727) 링컨셔의 울스소프 농가에서 태어나, 1661년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컬리지에 입학하여, 유능한 수학자 발로의 지도를 받았으며, 그는 재학시절에 이미 2항정리를 발견하여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 해 런던에 발생한 페스트가 유행하여 대학이 폐쇄되었기 때문에 그도 고향에 돌아갔다. 그의 위대한 업적의 대부분은 이 시기 1655 - 1656년에 싹튼 것이다. 1657년 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672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뽑혔다. 이에 앞서 1659년 스승 발로의 뒤를 이어 모교 수학과 교수가 되어 광학을 강의하면서, 미적분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새 수학의 발견에 대해 라이프니쯔와의 우선권 문제로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물체 운동 및 만유인력의 기초 법칙을 2대 지주로 하는 이론역학을 세운 것은 그의 저서 <프란키피아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였으므로, 착상이래 20년 후의 일이였다. 그의 이 저서는 근대 과학에 있어서의 이론적 방법의 프로그램을 나타낸 것으로 복수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의 과학상의 뚜렷한 업적은 그 무렵을 경계로 끝났으며, 그 후에는 그것들의 정리, 사회적 활동 그리고 연대기적 또는 신화적 연구 저술에 소비하였다. 1696년 런던으로 이주하여 오래된 친구인 몬다규(재정가)의 권고로 왕립조폐국에 들어갔으며, 3년 후에는 장관에 취임하였고, 1703년에는 왕립협회 회장이 되었는데, 모두 죽을 때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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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Nikomachos> (50~150?) 아라비아의 게라사 출생. 신(新)피타고라스 학파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산술서 《산술입문》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수론(數論)의
기초, 특히 수의 성질과 분류를 취급하고 있다. 중요한 것으로는, 세제곱수는
연속되는 모든 홀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법칙의 발견이 있다.
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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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부 <Darboux, Jean Gaston>(1842.8~1917.2) 파리에서 공부하며 C.에르미트의 지도를 받았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장기간 재직하면서 프랑스의 수학계를 이끌었으며 수학 및 천문학 잡지 《Bulletin des sciences math럐atiques et astronomiques》의 창간에 힘썼다. 19세기 초엽부터 기하학이 걸어온 좌표적·해석적 경향을 계승하여, 해석학과 상미분방정식론 또는 군론 등을 기초로 하여 기하학을 발전시켰으며, 그의 주요 저서인 《일반곡면론강의(一般曲面論講義)》(4권, 1887∼96)는 미분기하학의 명저로 알려져 있다. 곡면론과 미분방정식론의 관련, 도형의 연속적 변형, 가동좌표축(可動座標軸)의 도입, 허원소(虛元素)의 사용, 또 사원좌표(四圓座標), 오구좌표(五球座標)의 도입 등에서 창의성을 발휘하였고, 또 G.F.B.리만에 관한 이해도는 독일의 F.클라인과 비견된다고 한다. 그는 행정적·교육적 수완도 뛰어나 J.H.푸앵카레의 전기도 썼다. |
데데킨트 (1831 - 1916) 팅겐 대학에서 가우스에게 배웠으며, 1854년 이후 괴팅겐 대학 강사, 퓌리히 대학 브라운 시바이크 공업학교 교수를 지냈다. 이데알에의한 대수적 수론의 개척자로 19세기의 대표자가 되었다. 이른바 "데데킨트 집단"이라는 개념에 의하여 무리수론과 자연수론을 전개하고, 연속성을 밝혀 수학해석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발표한 논문으로는 2항방정식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연속과 무리수> <집합론>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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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랑베르<d?lembert, Jean Le Rond>
(1717.11~1783.10) 계몽사조기(啓蒙思潮期)를 대표하는 문인의 한 사람으로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며, 그 종신서기(終身書記)였다. 그는 섭정 오를레앙공(公) 시대에 저명한 살롱을 가진, 사교계의 꽃 드 탕생 후작부인의 사생아로 출생하여, 생후 곧 노트르담 성당 옆의 작은 교회 계단에 버려졌다 한다. 근처에서 살던 유리 직공 달랑베르의 아내가 주워다 길렀다. 그의 이름은 그가 20세 때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그의 친아버지인 데투시 장군이 그를 경제적으로 돌보았고, 죽은 후 거액의 유산을 남겼으며 또 장군의 유력한 친지가 그를 비호하여 23세에 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었다. 12세 때 콜레즈 드 카틀 나시옹에 입학하여 신학·법률·의학을 공부하였으나, 얼마 후 철학·수학·물리학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특히 역학(力學)에서는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주저 《역학론:Trait de dynamique》(1743)은 26세 때 공간(公刊)한 것인데, 그는 이 저서에서 그 당시에 프랑스에서 주류를 이루던 데카르트주의를 배척하고, 물체와 그에서 독립된 공간을 생각하는 뉴턴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또, 물체의 운동을 정역학(靜力學)의 경우와 같은 평형상태(平衡狀態)로 옮겨서 고찰하는 ‘달랑베르의 원리’를 설명하고, 역학의 일반화의 기초를 닦아 해석역학으로의 전개를 마련함으로써 역학발전의 한 단계를 이룩하였다. 이 밖에 세차(歲差)와 장동(章動)의 문제(49), 달의 운동론에 관련된 3체(三體)문제의 연구 등, 천체역학 방면에도 공헌하였다. 사상가로서도 계몽사상가의 중심인물로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였으며, 특히 D.디드로와 공동으로 편집·간행한 《백과전서》는 유명하다. 이 전서에서 수학·물리학·천문학 항목을 집필하였으며, 이 점은 백과전서파의 주장이었던 수학과 자연과학에 역점을 둔 데서 비롯되었으며, 이 《백과전서》의 주류를 이루는 부분이었다. 그가 쓴 서론 속에 이 취지를 강조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동시에 F.베이컨의 사상을 기초로 과학의 기원과 역사적 발전을 고찰하고, 과학의 분류를 시도함으로써 과학편(科學編)에 큰 전망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 입장은 감각적 인식론에 머물러 종교적 견해에는 많은 의문을 제시하면서도 디드로처럼 철저하지도 못해 일종의 물심이원론에 시종하였다. |
데자르그 (1593 - 1662) |
데카르트 (1595 - 16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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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모르간 <de Morgan, Augustus > (1806.6~1871.3) 인도 마두라 출생.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1828년 22세의 나이로 신설된 런던대학 수학 교수에 취임, 명강의로 이름을 떨쳤다. 66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스스로 수학협회를 창설, 초대 회장이 되었다. 수학자로서는 연구 주제를 엄밀한 기초 위에 둘 것을 강조하였고, 특히 집합연산의 기초적 법칙을 발견했는데 이 법칙은 그의 이름을 따서 ‘드모르간의 법칙’이라 한다. 근대적인 대수학(代數學)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특히 논리학적 측면을 개척하여 선각자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확률론에도 공헌하였다. 38년에는 ‘수학적 귀납법’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경험과학과 수학적 증명에서의 귀납법의 차이점을 강조하였다. 기지(機智)가 뛰어난 능변가이자 문장가로서도 유명하여 철학자 W.해밀턴과의 논쟁은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수학·수학사상의 보급에 기여하였고, 산술·초등대수·유클리드기하학 등을 계몽하기 위하여 알기 쉬운 해설로 책을 저술하여 수학교육 혁신에 이바지하였다. 주요저서로는 《산술원론(算術原論)》(1831) 《대수원론(代數原論)》(35) 《대수학의 기초에 관하여》(41,47) 등이 있다. |
디리클리 (1805 - 1859) 뮈랜에서 태어나, 파리등지에서 유학하였다. 후에 귀국하여, 1855년 가우스의 뒤를 이어 괴팅겐 대학 교수가 되었다. 정수론,급수론,대수학 등을 비롯하여 수학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디리클리의 급수","디리클리의 적분"등 그의 이름을 붙인 수학용어들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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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판토스 <Diophantos> (246?~330?) 대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주저 《산수론(算數論) Arithmetica》은 13권 중 6권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주로 1차부터 3차까지의 정방정식과 부정방정식의 문제와 해법이 다루어져 있다. 특히, 해법의 부정해석(不定解析)은 디오판토스의 해석이라고 불린다. 그는 마이너스(-)·미지량(未知量)·상등(相等)·거듭제곱 등의 기호를 조직적으로 채용했다. 그의 《산수론》은 아라비아어(語)로 번역되어 그곳 학자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뒤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 말기에 유럽으로 전파되어 대수학 발달에 공헌했다. 저서 중 ‘주어진 제곱수를 2개의 제곱수로 나누어라’라는 문제는 뒤에 페르마에게 영향을 끼쳐, 페르마의 정리가 되었다고 한다. |
라그랑즈 (1738 - 1813) 이탈리아의 트리노에서
태어나 트리노 왕립군관학교 수학교관이 되었으며, 프리드리히 2세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 학사원 수학부장이 되었다. 그 후 귀국하여 신도량형법
제정 위원장, 에클노르말 대학 교수를 거쳐, 파리 이공 대학 초대 학장이
되었다. 또 나폴레옹 1세때에는 상원의원이 되고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그는 수학에 있어서의 변분학을 수립하고 정수론, 미분방정식론,타원함수론
등에 관한 연구와 역학 및 천문학에 많은 공을 세웠다. 역학에 있어서의
"라그랑즈의 운동방정식"은 유명하다. |
라이프니쯔 (1645 - 1716)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견줄만큼 폭 넓은 연구를 한 학자이다. 20세때에 법학박사가 되었고, 외교관으로서 파리에 갔다. 파리에서 토이겐스에게 수학을 배웠으며, 데카르트나 파르멜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 1686년에는 적은 분량이나 많은 분량을 계산으로 정확히 알아낼수 있게되어, 곡선의 성질이나 도형의 넓이를 쉽게 알 수도 있게 되었는데, 물리학이나 천문학의 발전에 새로운 영향을 미쳤다. 미분적분법은 라이프니쯔의 것이 더 편리하다. 베를린 학사원을 만들고, 유럽 각지에도 학사원을 세울 것을 장려하여 학문의 발전에 힘썼다. |
러셀 (1872 - 1970)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인 그는,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와 모교의 강사가 되었으나, 제 1차 세계 대전때 전쟁을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수학의 기호 기술에 관한 <수리 철학 사설>을 썼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세계 각지로 돌아다니며 철학과 수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대표적인 저서로는 <수학 원리> <수리 철학 서설> <정신의 분석> <서양 철학사>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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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치비타
<Levi-Civita, Tullio>
(1873.3~1941.12) 파도바 출생. 1898년 파도바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18~38년 로마대학 교수를 지냈다.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의 대학교수에게 파시스트당 정부에 대한 선서를 요구하였지만 과학자로서의 양심 때문에 선서를 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스승인 리치와 함께 절대미분학(絶對微分學)을 창시하고 그 결과를 《절대미분학의 방법과 그 응용》(1900)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유클리드공간에서의 평행의 정의를 리만공간으로 확장하였다. 텐서 해석(解析)은 리만기하학의 연구에 적절한 방법이고 아인슈타인에 의한 일반상대성이론, 그리고 중력장의 이론에도 사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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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드 <Recorde, Robert> (1510?~1558) 펨브룩셔의 템비 출생.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옥스퍼드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뒤에 궁정에 초빙되어 에드워드 6세와 메리 1세의 시의(侍醫)가 되었다. 영국에서 최초로 코페르니쿠스설(說)을 이해하고 주장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산술서(算術書) 《제예(諸藝)의 기초》(1540)는 당시 유럽의 수준을 능가하는 것으로서 기호를 사용하였고, 또 교사와 학생의 대화형식으로 썼다. 《기지(機智)의 숫돌:Whetstone of Witte》(1557)은 영국 최초의 대수서(代數書)로서, 이 책에서는 오늘날 많이 쓰이는 등호가 이미 사용되었다. 그 밖에 기하학서인 《지혜로의 길:The Pathway to Knowledge》(51)이 있다. 감옥에서 죽었는데, 투옥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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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바체프스키
<Lobachevsky, Nikolay
Ivanovich> (1792.12~1856.2) 1807년 카잔대학에 들어가 수학을 공부하였다. 학생시절에는 매우 난폭하여 감옥에 들어간 일도 있으나 수학에는 재능이 뛰어났다. 11년 카잔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에 남아 교편을 잡았고, 16년 젊은 나이로 정교수가 되어 수학 외에 천문학·물리학 등도 강의하였다. 그 뒤 대학 도서관장·박물관장을 겸하였고 수학·물리학부장이 되었다가 27년 학장이 되었다. 유클리드기하학의 기초공리를 검토하여 유클리드기하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기하학의 성립 가능성을 상정(想定)하여 26년 카잔 수학·물리학 협회에서 발표하여 헝가리의 J.볼리아이와는 별도로 비유클리드기하학을 창시하였다. 이 연구에 대한 당시의 반응은 냉담하였고 연구 초고(草稿)마저 분실하였으나, 29년 카잔대학 학보에 다시 발표하고 그 구체적 전개에 힘을 기울였다. 그 후 그 성과를 40년 베를린에서 발표한 《평행선 이론의 기하학적 고찰:Geometrische Untersuchungen zur Theorie der Parallellinien》에 집약하여, K.F.가우스를 위시한 수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대수학에서는 《유한의 계산》(34), 수학해석(數學解析)에서는 《3각급수의 소멸》(34) 《무한급수의 수렴성》(41) 《몇몇 적분에 대하여》(52) 등이 있고, 함수의 미분 가능성과 연속성의 구별을 처음으로 지적하고 ‘로바체프스키 방정식’으로 불리는 대수방정식의 수치해법을 행하는 등 폭넓은 연구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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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장드르
<Legendre, Adrien-Marie>
(1752.9~1833.1) 툴루즈 출생. 파리의 종교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775년 파리의 육군사관학교 교수가 되었고, 83년 아카데미 프랑스츠의 회원이 되었다. 또 에콜 폴리테크니크(이공과대학)의 시험관 및 측지감독관 등을 지냈다. 타원적분·오일러 적분 등의 적분학과 유클리드기하학의 기초 및 최소제곱법, 측지학 등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1798∼1830년의 《정수론(整數論):Th럒rie des nombres》에서는 ‘2차 상반법칙’의 공식을 정립하여 그의 이름을 붙인 제곱잉여에 관한 기호(Legendre’s symbol)를 남겼다. 1806년 《최소제곱법에 관하여:Sur la M럗hode des Moindres Quarr럖》에서 ‘최소제곱법’을 K.F.가우스에 앞서 발표하였고, 25∼26년 《타원함수론:Trait des fonctions elliptiques》에서 이른바 퍼텐셜(potential)의 개념으로 불리는 ‘르장드르함수’를 도입한 ‘타원적분’의 분류를 논하고 있는데 이는 19세기에 있어서의 타원함수론 발전의 선구가 되었다. 그의 저서 《적분학 연습》 《타원함수론》 《오일러 적분론》 등은 오랫동안 교과서로서의 권위를 지켜 왔는데 특히 《기하학의 요소들:El럐ents de g럒m럗rie》는 근대적인 초등기하학의 교과서로서 각국어로 번역되었으며, 또한 삼차원 조화함수와 관련되는 구함수(球函數)에 대하여 그의 이름을 붙인 미분방정식은 유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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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Lie, Marius Sophus> (1842.12.12~1899.2.13) 노르드피오르데이드 출생. 크리스티아니아대학(현 오슬로대학)에서 수학한 후, 1869년 독일의 베를린으로 갔다. 그곳에서 F.클라인(1849∼1925)과 친교를 맺고 공동으로 수학연구를 하고 논문도 썼다. 그 후 71년 크리스티아니아대학으로부터 학위를 받고 이듬해에 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73년 연속변환군의 연구를 시작하여 ‘리의 구면기하학(球面幾何學)’을 발견하였으며, 84년 이후 F.엥겔(1821∼96)과 협력하여 변환군 연구를 계속하였다. 86년 클라인의 뒤를 이어 라이프치히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98년까지 강의하였다. 98년에 건강을 해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변환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여 해석적인 형태로 이 운동을 추구하여 기하학적 변환의 이론에 신기원을 이루어 놓은 것과 함께 변환의 일반이론의 기초를 확립함으로서 연속군(連續群)의 이론을 창시하였다. 이 연속군을 리군(群)이라 부르는 것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때문이다. 또한 미분방정식론에의 공헌도 컸다. 저서에는 F.엥겔과의 공저인 《변환군론(變換群論):Theorie der Transformationsgruppen》(3권, 1893)과 G.셰파스와의 공저인 《연속군론(連續群論) 강의》 등이 있다. |
리이만 (1826 - 1866) 유클리드 기하학이 단 하나의 올바른 기하학이라 생각해 왔으나, 19세기가 되자 러시아의 로바체프스키에 의해 이것과는 다른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리이만은 1854년에 <기하학의 바탕이 되는 가설>이란 논문을 발표하여, 유클리드 기하학이나 비유클리드 기하학과는 다른 "리이만 기하학"을 세웠다. 이것은 아인시타인에 의해 상대성 이론이 응용되면서, 그 중요성이 더욱 나타나게 되었다. 그 밖에 고등수학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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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나이크모스
<Menaikhmos>
(?~?) 에우독소스(Eudoxos)의 제자로, 2개의 비례중항(比例中項)의 문제에 관한 해법을 하던 중, 원뿔곡선과 그 성질을 발견하였다. 다만 원뿔곡선은 평면이 원뿔의 모선에 대하여 항상 직각으로 자를 때 생긴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꼭지각이 예각일 때 타원, 직각일 때 포물선, 둔각일 때 쌍곡선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기하학 전체를 보다 완전한 것으로 만든 사람’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기하학 원리의 뜻, 정리와 문제의 구별, 명제의 전환 가능성 등에 관해 광범위하게 논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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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넬라우스 <Menelaus> (?~?)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생. 98년 로마에 천문대를 건립하였다. 저서로, 원의 현에 관한 저작(6권)이 있었다고 하나 없어지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아라비아어·헤브라이어·라틴어 등으로 번역된 《구면학(球面學):Sphaerica)》(3권)이 있다. 이것은 구면삼각형을 취급한 것으로, 유클리드의 평면삼각형에 대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1권에는 구면삼각형의 개념과 정의 등이 있고 제2권은 천문학의 입장에서 구면학을 취급하였으며, 제3권에는 ‘메넬라우스의 정리’를 비롯하여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본》 제6권과 유사한 비례의 제명제(諸命題)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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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주 <Monge, Gaspard/Peluse, Comte de>
(1746.5~1818.7) 본 출생.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 소화(消火) 펌프·측량기 등을 만들었으며, 16세 때 리옹에서 물리학 교사가 되었다. 그 뒤 육군 공병학교 재학 중에 축성(築城)에 관한 문제를 종래의 산술적인 계산으로 풀지 않고 자기가 안출한 기하학적 방법으로 짧은 시간에 풀어 교관으로 발탁되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화법기하학(畵法幾何學)의 기원인데 당시에는 프랑스의 군사기밀로서 15년간이나 공개되지 않았다. 1780년 파리대학에서 수력학(水力學)을 강의하였고, 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후 군수품 생산기술과 조직에 진력하였으며, 새로운 도량형의 제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92년 혁명정부의 해군상(海軍相)이 되었고, 그의 제안으로 94년 에콜 폴리테크니크가 창설되자 그 곳의 중심 멤버로 활동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나폴레옹의 신임과 우대를 받아 이탈리아·이집트 등의 원정에 참가하였으며 이집트에서는 이집트 학회를 창립하였다. 왕정복고 후에는 당국의 손길을 피해야 했고 학사원에서도 추방당하여 실의 속에 세상을 떠났다. 주요저서 《화법기하학:G럒m럗rie descriptive》이 95년 간행되었고, 같은해에 《기하학에의 해석학(解析學)의 응용:Application d’analyse la g럒m럗rie》도 간행되어 오늘날의 적분기하학(積分幾何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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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 <M ius, August Ferdinand> (1790.11~1868.9) 프로이센 출생. 라이프치히·괴팅겐·할레 등지의 여러 대학에서 공부하고, K.F.가우스의 문하생이 되었다. 1815년 라이프치히대학 천문학 교수, 44년 동 대학 천문대장이 되었다. 천문학 이외에도 기하학·역학 등을 연구하여 업적을 남겼다. 기하학에서는 동차좌표(同次座標)의 일종인 중심좌표를 처음으로 도입한 업적으로 유명해졌다. 주요저서로는 《중심해석(重心解析)》(27)이 있다. 사영기하학(射影幾何學)의 기초를 굳혔으며, 직선기하학 연구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면(面)의 표리(表裏)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에 대한 연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뫼비우스의띠 |
민코프스키 (1864 - 1909) 러시아에서 태어나 도이칠란트로 귀화하였다. 쾨니히스베르크, 퓌리히, 괴팅겐 등의 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정수론의 연구로 유명하며, <시간과 공간>이라는 논문은 아인시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기하학에서 수학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4차원의 세계"라는 개념을 이끌어 상대성 이론에 공이 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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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어슈트라스 (1815 - 1897) 베스트팔런 태생으로 중학생 때부터 기하학에 취미를 가졌다.법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본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수학책을 탐독하여 1842년에 <아벨 함수론에 대하여>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왕립 공예 연구소 및 베를린 대학교수등을 지냈으며, 주로 정수론을 연구하여 해석함수의 사상을 전개하였다. 해석수학의 기초를 확립하여, 아벨 이후의 대수학자로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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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라
<Volterra, Vito>
(1860.5.3~1940.10.11) 안코나 출생. 1883년 피사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이어 토리노대학(1893)을 거쳐 로마대학 교수로 취임하였다(1900). 수리물리학의 문제에 관한 업적이 있으며, 탄성이론에서 편미분방정식을 연구하였다. 변분(變分) 문제와 관련하여 N.H.아벨이 만든 방정식을 일반화하고, 이른바 ‘볼테라의 적분방정식’을 연구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해석함수의 다가성(多價性)이 가산적인 데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낸 ‘프앵카레-볼테라의 정리’ 등도 있으며, 현대수학의 중요한 분과인 위상해석학에서 선구적인 공헌을 하였다. |
베르누이(Jacques) (1654 - 1705) 동생 장 베르누이와 함께 라이프니쯔의 영향을 받아 미적분법을 발전시켰다. 그는 또 빈 문법이라는 새 계산 방법을 만들어 내어 근대 수학에 큰 공헌을 하였다. 특히 어떤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계산하는 학문인 "확률론"을 정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확률론>등이 있다. |
베르누이(Jean) (1667 - 1748) 형 작크와 함께 라이프니쯔의 영향을 받아 미적분법을 발전시키는데 노력하였다. 처음 네덜란드의 그로닝겐 대학 교수, 형 작크가 죽은 뒤 바젤 대학 교수가 되었다. 미적분학, 미분 방정식, 최소 강하선 등에 많은 연구를 하였다. 중력의 가속도를 시그마로 표시한 최초의 사람이다. |
베블렌 (1880-1960) 오스왈드는 1880년 아이오와주의 Decorah에서 태어났다. 그는 또한 경제학자인 Thorstein Veblen의 조카이기도 하다. 오스왈드는 기하학과 위상수학에 대한 공로가 특히 두드러진다. 그는 1903년 시카고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1910년에는 프린스턴 대학교의 수학 교수가 되었고 학교를 앞서 가는 수학의 중심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일조를 했다. 1932년, 베블렌은 프린스턴의 응용학문 연구소 (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에서 최초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1950년에 그 곳에서 은퇴한 후 1960년에 사망했다. |
볼짜노 (1781 - 1848) 프라하 태생으로 1805년 프라하 대학 교수가 되었다. 라이프니쯔의 철학을 계승하고, 그의 영구 진리의 사상을 체계화 하였다. 또한 관념론에 반대하여 논리주의의 기초를 쌓았으며, 집합론의 선구자가 되었다. 저서에는 <지식학> <무한의 역사>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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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워딘
<Bradwardine, Thomas>
(1290~1349) 캔터베리 대주교(1348), 에드워드 3세의 교계사(敎誡師) 등을 역임하였으며, 펠라기우스 주의에 대하여 반대입장을 취한 것으로 유명하다. 옥스퍼드의 머튼 학파의 중심이 되어, 운동의 수학적 논구를 진척시켜, 수학적 자연학의 길을 열었다. 역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서서 이를 수정·발전시켰고, 비(比)의 법칙을 대수(對數) 관계로 바꾸어 놓았으며, 아벤파케 등의 ‘내재적 동력(內在的動力)’의 생각을 비판하였다. 저서 《비례론(比例論)》(1328)에서는 운동의 기술에 대수(代數) 관계가 처음으로 쓰였으며, 그의 운동법칙은 참다운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으로서 G.갈릴레이 이전의 역학을 지배하였다. |
비에트 (1543 - 1603) 앙리 4세를 받들면서 에스파니아의 암호를 풀이하였으며, 문자를 조직적으로 사용하여 대수학에 새로운 길을 개척하여 "대수학의 아버지" 로 불린다. 한편, 원에 내접하는 정다각형에서 원주율을 구하고, 무한적 형식으로 표현, 소수점이하 10단위까지 계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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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케
<Chuquet, Nicolas>
(?~?) 파리 출생. 1500년경 르네상스시대에 최초로 대수학서를 집필하였다. 파리대학을 나와 리옹에서 의사로 일했다. 《수의 과학에 있어서의 세 부분:Le triparty en la science des nombres》을 저술했다. 이 책은 3부로 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유리수의 계산을 다루면서 합리적인 계산법과 인도, 아라비아수들을 설명해 놓았다. 2부는 무리수, 3부는 방정식으로, 가장 핵심 부분인 3부는 현대의 대수를 다루고 있다. ‘플러스’, ‘마이너스’라고 말로 표현했던 것을 ‘p ", ‘m’이라는 기호를 사용하였고, 미지수의 거듭제곱에 대한 간편한 표기법을 고안하였다. 또한 명수법의 문제도 해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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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
<Steiner, Jakob>
(1796.3.18~1863.4.1) 벽촌의 빈곤한 농가에서 태어나 14세까지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18세에 대교육가인 페스탈로치를 만나는 행운을 입어 이베르돈의 학교에 들어가 수학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818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 들어갔고, 다시 베를린에 나가서 가정교사와 학교교사로 근무하면서 수학을 연구하다가 A.훔볼트에게 인정받아 베를린공업대학에 자리를 얻었으며, 34년 훔볼트와 K.G.야코비의 추천으로 베를린대학의 기하학 교수가 되었다. 뛰어난 순수기하학자로서, 여러 가지 도형의 상호 관련을 계통적으로 논하여 종합기하학의 체계를 세웠다. ‘쌍대원리(雙對原理)’의 1차변환이나 사영변환(射影變換)에서 전개한 연구는 사영기하학·대수기하학에 크게 공헌하였다. 기하학에 해석적 방법의 도입은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허요소(虛要素)를 채용하는 일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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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빈
<Stevin, Simon>
(1548~1620) 스테비누스라고도 불린다. 벨기에의 브뤼주 출생. 브뤼주 시청에 근무하였으며, 후에 네덜란드 군대의 경리부장이 되었다. 그의 과학적 연구는 여러 방면에 걸친 것이었으며, 문학적·군사적인 양면의 기술자로서도 활약하였고, 특히 축성(築城)기사로서의 명성은 매우 높았다. 1582년 이자 계산표의 서적을 출판하여, 상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얼마 후에 《10분의 1에 관하여:De Thiende》(1585)라는 소책자에서 소수(小數)의 계산에 관한 최초의 조직적인 해설을 하였다. 여기서 소수(십진 분수)의 표기법과 계산법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이것의 사용을 장려하여 계산술 진보에 이바지하였다. 다소 복잡한 이 표기법은 훗날 비에타에 의해서 개량되었는데, 그가 정부에 진언하였던 십진법에 의거한 화폐 및 도량형 제도는 프랑스 혁명에 이르러 겨우 실현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응용 산술》이라는 저서에 간추려져 있다. 그의 최대의 공헌은 역학 분야의 업적으로서, 이른바 아르키메데스적인 정역학(靜力學)은 스테빈에 의하여 대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균형의 원리》(86)에서는 고체의 정역학과 유체의 정역학이 다루어졌으며, 또한 도르래의 이론을 전개하여 가상(假想) 변위의 원리에 이르고 있다. 특히 영구 운동이 불가능한 것을 전제로 하여, 빗면에 관한 균형의 조건을 음미하였고, ‘힘의 평행사변형의 법칙’을 발견한 공적은 매우 크다. 이 밖에 정수압(靜水壓)에서 수압기(水壓機)의 가능성을 예상하였고, 부체(浮體)의 균형을 다루기도 하였다. 훗날 네덜란드의 수륙 영선(營繕) 최고 감독관의 지위에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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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베스터
<Sylvester, James
Joseph> (1814.9~1897.3) 런던 출생. 일찍이 소년기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였으나, 케임브리지대학에서 A.드 모건의 지도를 받고 두각을 나타냈다. 15세에 리버풀 왕립지식보급회에 입회하여 2개의 상을 받았다. 1837년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후, 41년 더블린대학에서 석사(碩士)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에 런던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영국학사원 회원으로도 선출되었다.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장애에 부딛쳐 교수직을 2년 만에 물러났으며,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버지니아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3개월 만에 그만두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갔다. 생명보험회사에 들어가 일하면서부터 수학과는 거리가 멀어졌으며, 46년 런던법학원에 들어가 변호사가 되어 개업을 하였다. 이 때 변호사 A.케일리와 알게 되어, 10년간의 수학 공백기를 끝내고 재차 수학 세계로 되돌아와 케일리와 함께 대수적 불변식론(代數的不變式論)의 전개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행렬(行列)과 대수적 불변식의 기초 이론을 확립하여, 그 후의 과학이론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55년 육군사관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16년간 재직한 후 정년 퇴직하고 시작(詩作)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동안에 저술한 것이 《시(詩)의 법칙》이다. 76년 미국의 존스 홉킨스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부임하였으며, 그 곳에서 《아메리카 수학잡지》를 창간하는 등 수학계에 공헌하였다. 85년 옥스퍼드대학 교수로 초빙되었는데, 그 최초의 강의가 ‘미분불변식(微分不變式)의 이론’이었다. 업적은 불변식론의 개척과 소수분포(素數分布)에 관한 연구가 유명하며, 역학(力學)의 영역에서도 ‘1점의 둘레의 강체(剛體) 운동에 관한 정리’도 있다. 저서에 《The Collected Mathematical Papers of J.J.Sylvester》(4권,1904~12)가 있다. |
아르키메데스 (B.C 287? - 212) 랫대의 이론, 부력의 원리, 구적법 등 수학과 물리학에 큰 업적을 남겨 유클리드, 아폴로니우스와 함께 고대의 3대 수학자로 꼽히는 그는, 시칠리아의 시리쿠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적분학의 전신인 "구적법"을 연구하여 포물선의 넓이와 부피를 구하는 것과, 공과 그 외접하는 원기둥과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원기둥의 부피는 그것에 내접하는 공의 부피의 1.5배이다" 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수학상의 업적으로서 이 밖에도 외접과 내접과의 96각형에서 계산한 "아르키메데스의 원주율"이 있다. 오늘날에 원주율의 값을 3.14로 계산한 것은 바로 이 계산법에 의한 것이다. |
아벨 (1802 - 1829) 오슬로에서 태어나 1823년 크리스티아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1825년 베를린에 유학하였다. 1823년 귀국하여 타원 함수론, 적분 방정식과 5차 방정식의 대수적 불능 문제를 연구하고, 대수함수론의 기본 정리인 "아벨의 정리"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살아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죽은 후에 그 가치가 인정되어, 대수학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에는 <타원 함수의 변령에 관한 일반 문제의 해>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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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슈타인
<Eisenstein, Ferdinand
Gotthold Max> (1823.4.16~1852.10.11) 베를린 출생. 집안이 가난하여, 프로이센 왕실의 비호로 수학을 공부하였다. 젊었을 때부터 재사(才士)로 소문이 나 1847년에 베를린대학 강사가 되었으나 아깝게도 요절하였다. K.J.야코비, P.G.L.디리클레, J.슈타이너 등과 함께 베를린에 수학 전성시대를 형성하여 B.리만 등 준재를 배출하게 하였다. 스승인 K.F.가우스는 그를 아르키메데스, I.뉴턴에 버금가는 위대한 수학자로 꼽았다고 한다. 짧은 생애에 정수론(整數論), 불변식론(不變式論), 타원함수론 등 많은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거듭제곱 잉여에 관한 ‘아이젠슈타인의 상호법칙’, 정수론이나 타원함수론에 쓰이는 ‘아이젠슈타인의 급수’, 유리정계수(有理整係數)의 다항식의 기약성(旣約性)에 관한 ‘아이젠슈타인의 정리’ 등에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붙여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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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니오스 <Apollonios of Perga> (BC
262?~BC 200?) 소아시아의 페르가에서 태어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하였다. 저서 《원뿔곡선론[圓錐曲線論]》 8권은 고대 최고의 과학서 중 하나이다. 오늘날까지 최초의 4권은 그리스어(語)로, 다음 3권은 아랍어로 남아 있으나, 최후의 한 권은 일실되었다. 원을 밑변으로 하는 원뿔이라면 어떤 것이든 3개의 마디점[切面]이 생긴다고 하는 정의를 세웠다. 그리고 이 마디점들에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포물선·쌍곡선·타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의 일반화는 방법론상의 진보를 가져 왔고, 원뿔곡선으로 일괄하여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원뿔곡선의 특질과 응용은 그에 의하여 거의 마무리지어졌다. 또 행성(行星)의 운동에 관하여 ‘주전원설(週轉圓說)’과 ‘편심원설(偏心圓說)’도 처음으로 주창하였다. 이 밖에 ‘아폴로니우스의 원’도 유명하다. 아폴로니오스의원 <Apollonios, circle of>(-圓) 두 정점(定點)에 이르는 거리의 비가 일정한 값(단, 1은 아니다)을
가지면서 운동하는 점의 자취. 지금 [그림]에서 정점을 각각 A, B라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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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토스테네스
<Eratosthenes>
(BC 273?~BC 192?) 큐레네 출생. BC 244년경에 아테네에서 이집트로 옮겨 BC 235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왕실 부속학술연구소의 도서관원이 되었다. 소수(素數)를 발견하는 방법으로서, 에라토스테네스의 체(코스키콘)를 고안하고, 정입방체(正立方體)의 배가(倍加)문제를 푸는 기구(器具:메소라본)를 발명하였다. 같은 자오선 위에 있다고 생각되었던 시에네(현재의 Aswan)와 메로웨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여, 해시계로 지구 둘레의 길이를 처음으로 계산하였다. 그 결과 약 4만 5000 km(정확한 거리는 약 4만 km)라는 근사값을 얻었다. 저서 《지리학:Geographica》(3권)에는 지리학사·수리지리학(數理地理學) 및 각국 지지(地誌)와 지도 작성의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지리상의 위치를 위도·경도로 표시한 것은 그가 처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별의 목록을 포함한 논문도 썼고, 사학(史學)이나 언어학에 관한 저술도 남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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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트 <Hermite, Charles> (1822.12~1901.1) 로렌주 디유즈 출생.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수학계를 이끈 거장으로서, 대수학(代數學)·해석학(解析學)의 분야에서 큰 공헌을 남겼고, 수론(數論)·불변식론(不變式論)·공변식론(共變式論)·정적분론(定積分論)·방정식론·타원함수론(楕圓函數論) 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낭시에서 파리로 유학하여, 앙리 4세 중학에서 유명한 고등학교인 루이 르 그랑(Louis le Grand)으로 진학했으나 학교의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20세 때 파리 이공과대학에 진학했으나, 1년만에 그만두고 수학 연구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갔다. J.L.라그랑주의 수치방정식의 논문과 가우스의 《정수론(整數論) 연구》로 대수학을 공부했다. 그 후, 《신수학 연보(新數學年報)》 창간호에 실린 <5차방정식의 대수적 해법(代數的解法)>으로 독창성을 보였으며 이어 아벨함수로 관심을 돌려 K.G.J.야코비 등의 지우(知遇)를 얻어, 이 문제에 관한 그의 뛰어난 업적이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파리 이공과대학과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 34세에 학사원 회원, 이어서 에콜 노르말(1869) 및 소르본대학(70) 교수가 되어, 퇴직할 때까지 27년간 교직에 종사하였다. 그 동안 보렐, H.푸앵카레 등 많은 준재(俊才)를 기르고, 또 저작으로 수학계에 공헌하였다. 그의 아벨함수에 관한 최초의 이론은, 가우스의 수론(數論)의 기초 위에서 전개되었지만, 이것은 일찍이 가우스가 좌절하고, 아이젠슈타인이 착수한 일반적인 2차 형식의 수론적 연구에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형식의 이론’이 진척되어 ‘에르미트형식’의 연구가 되었지만, 이것은 그 후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量子力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대수적(代數的) 불변식론은 최고의 업적이라고 평가되며, 또 일반 5차방정식을 타원함수로 푸는 해법은 대수학·해석학에 새로운 분야를 열어, 푸앵카레의 보형(保型) 함수에 인계(引繼)되는 것이다. 그 밖에, 자연로그 한계(限界)의 초월성 증명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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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독소스
<Eudoxos> (BC408?~BC355?) 소아시아의 쿠니도스 출생. 피타고라스학파의 대학자인 아르큐타스에게서 기하학을, 의학은 테오메돈에게서, 철학은 플라톤에게서 배웠다. 아테네에서 연구하고 있다가 추방당하여, BC 381년 플라톤과 함께 이집트로 가서 1년 4개월을 지낸 후 귀국길에 플라톤과 작별하고 큐지코스에 머물러 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당시의 여러 가지 수학상의 대문제를 연구하였으며, 주어진 정육면체의 2배의 부피를 가진 정육면체를 작도하는 문제(立方倍積問題)를 독자적인 방법으로 풀어서 무리수(無理數)에도 적용되는 일반 비례론을 세웠다. 또한 문제의 철저 검토법(method of exhaustion)에 의하여 평면기하학과 입체기하학의 여러 문제를 엄밀하게 증명하였다. 그의 업적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 제5권에 정리되어 있다. 천문학 연구와 관련하여 구면상(球面上)의 곡선의 문제도 연구했다. 황금분할(黃金分割)의 이론을 발전시켜 각뿔과 원뿔의 체적에 관한 제정리를 증명하였고, 원의 넓이는 그 반지름의 제곱에 비례한다고 하였다. 천문학에서는 동심천구설(同心天球說)을 주장하여 과학적 우주상(宇宙像)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 설은 행성·달·태양의 불규칙한 운동을 지구를 중심으로 한 27개의 천구의 회전운동의 결합으로 해명하려고 한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채용되었다. |
오일러 (1707 - 1783) 바젤 대학의 베르누이 밑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배우고 나서, 러시아의 피테스부르그 학사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쳤다. 후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 학사원에서 교편을 잡다가, 다시 피테스부르그에 돌아와 그곳에서 죽었다. 수학의 천재인 그는, 천문의 계산을 자기가 생각해 낸 방법으로 하였다. 그 후, 병으로 장님이 되었으나 죽기까지 연구를 그치지 않았으며, 그 무렵의 연구로 오일러가 관계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삼각 함수의 기호 사인(Sin), 코사인(Cos), 탄젠트(Tan)와 허수의 기호 i, 자연 대수의 밑수 e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사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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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레드
<Oughtred, William>
(1574.3.5~1660.6.30) 수학 교수를 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저서 《수학의 열쇠:Clavis Mathematicae》(1631)에서 산술과 대수를 논하여 영국의 수학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책은 수학기호의 역사상 중요한 것이며, 17세기 말경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수학기호의 ∼, 곱셈의 ×는 이 책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스위스의 뷔르기 방법을 개량한 생략 곱셈(오트레드 방법)을 안출했고, 또 계산자의 발명자로도 알려져 있다. 1657년의 《삼각법:Trigonometry》에서는 평면 및 구면(球面) 삼각법을 다루었고 sin, tan, sec의 기호를 사용하였다. |
유클리드 (Euclid) (B.C 330~275) : 그리스의 수학자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에우클레이데스(Eucleides)라고도 하며 유클리드 기하학의 대성자이다.그의 일생에 관해서는 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게 수학을 가르쳤다는 것 외에는 확실한 것이 없다. 그의 저서 몇 가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합리적인 방법으로 그리스 수학을 간추려서 전개한 <기하학 원본>(13권)이다. 이 책은 논리적인 사고력을 단련하는 데에는 그보다 좋은 책이 없다고 할 정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하학의 규범이 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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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휘 (劉徽/?~?) 경력은 확실하지 않으나 한대(漢代)에 완성된 《구장산술(九章算術)》에 주석을 가하였으며, 《해도산경(海島算經)》을 저작하였다. 《구장산술주(九章算術註)》는 단순한 주석서에 그치지 않고 수학자로서의 진가를 발휘한 귀중한 자료서였다. 그는 여기서 원주율(圓周率)을 산출함에 있어 무한등비급수의 극한치를 구하는 방법과 유사한 추리방법을 적용하여 근사치를 구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 여러 가지 모양[形]의 부피를 구하는 데도 뛰어난 기하학적 직관과 극한을 구하는 방법을 이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
카르다노 (1501 - 1576) : 이탈리아의 수학자 파비아 태생으로 파두아 대학에서 의학을 배우고 수학을 연구, 1544년 밀라노 대학 기하학 교수, 1558년 파비아 볼로냐 대학 의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방정식의 이론을 개척하여 무근, 허근과 제수와의 관계등도 연구하였다. 그의 저서 <이르스 아그냐>로서 2차,3차 방정식을 풀었고, 3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은 "카르다노의 공식"으로 불린다. 저서에는 <산술> <물리학> <천문>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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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토어 <Cantor, Moritz Benedikt> (1829~1920) 만하임 출생. 1877년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가 되었다. 저서 《수학사(數學史):Vorlesungen 웑er Geschichte der Mathematik》(1880∼1908)는 그가 친필로 쓰고 감수(監修)한 고대에서 18세기까지의 제1~3권과 9인의 수학사가가 집필한 제4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수학사의 저서로 알려졌다. 이 밖에 《수학사론집(數學史論集):Abhandlungen zur Geschichte der Mathematik》(1877∼1912)을 편집·창간하였다. |
코시 (1789 - 1857) 19세기 전반 프랑스 수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도이칠란트의 가우스와 함께 현대수학의 근원을 이루어 "현대 수학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기술 학교와 토목 학교를 졸업하고 토목 기사가 되어, 군영의 요새등에 관련된 일을 보며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1816년 학술원 회원과 모교의 교수가 되었으며, 1830년대 2월 혁명으로 제2 공화국이 수립되자, 소르본느 대학 교수로서 죽을때까지 근무했다. 그는 함수에 대해 현대적인 정의를 내렸으며, 연속성을 정의하고, 또 함수의 복소수 함수론과 방정식론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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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페르니쿠스
<Copernicus, Nicolaus>
(1473.2~1543.5) 비수아강(江) 근처 토루인 출생. 10세에 아버지를 잃고 외삼촌인 바체르로데 신부 밑에서 자랐다. 1491년 신부가 되기 위해 입학한 크라코프대학에서 철학교수인 불제프스키에게서 수학과 천문학 강의를 들었는데, 이때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천동설)과 알폰소항성목록 사이의 불일치를 알게 되었다. 당시의 천문학에는 교회력(敎會曆)의 시정과 항해력의 개량이라는 두 개의 큰 문제가 미해결로 있었다. 교회력은 율리우스력을 오랫동안 사용한 까닭에 달력에서 춘분(春分) 등의 절기가 실제보다 10일 정도 늦게 와서 제례일(祭禮日)과 계절이 부합하지 않는 종교적 권위에 관계된 문제가 있었다. 한편, 항해력은 원양항해자가 천문항법(天文航法)을 이용할 때, 천동설을 근거로 계산한 천체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항해에 심각한 위협을 미친다는 문제였다. 코페르니쿠스는 96년에 외삼촌의 도움으로 이탈리아에 유학, 볼로냐대학에서 그리스어를 공부한 다음, 그리스 철학과 천문학을 공부하였다. 또한 97년 3월 9일에는 황소자리 뙷걋 알데바란이 달에 가려지는 성식(星蝕)을 관측하기도 하였다. 이 해에 모국의 프라우엔부르크성당 평의원이라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1500년에는 로마의 성탄절 행사에 참사회원(參事會員)으로 참석하였고, 약 1년간 로마에 체류하며 수학·천문학에 관한 강연을 하였다. 이듬해에 귀국하여 다시 이탈리아 유학허가를 받아, 파도바대학에서 의학과 교회법을 익히고, 1506년 두 가지 학위를 받아 귀국하였다. 귀국 후, 외삼촌이 본당신부로 있는 하일스베르크에서 빈민들에게 의술을 베풀어 큰 명성을 얻었다. 12년에 외삼촌이 죽자, 그 뒤를 이어 프라우엔부르크성당의 신부로 취임하였다. 그때부터 야간에 옥상의 망성대(望星臺)에서 스스로 만든 측각기(測角器)를 이용하여 천체관측을 시작하였다. 관측은 정밀하지는 않았으나, 이론가로서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행성계(行星系)의 개념을 구축해 나가기에는 충분했다. 14년에 파울 주교로부터 교회력의 개정심의를 위한 종교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청받았지만 거절하였는데, 교황청 공인교리인 천동설(天動說)에 이의를 다는 것을 피하려 한 것으로 짐작된다. 16년 엘름란드교구 회계감사역 겸 알렌슈타인교회 평의원이 되어 전임하였고, 20년 프라우엔부르크 대교구장으로 귀임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지동설(地動說)을 착안하고 그것을 확신하게 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의 저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전4권)는 25∼30년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다만 출판을 주저한 것은 종교적으로 이단자가 된다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는 <천체의 운동과 그 배열에 관한 주해서>라는 논문을 자비로 출판하여 일부 천문학자들에게 배포하였다. 그 가운데 1부가 교황 클레멘트 7세에게도 전달되어, 36년에는 쇤베르크주교로부터 본책의 출판을 권유받기도 하였다. 그가 본책 출판의 뜻을 굳힌 직접적인 동기는 독일의 젊은 수학자 G.J.레티쿠스의 권유 때문이었다. 레티쿠스는 39년에 코페르니쿠스로부터 1년 정도 직접 가르침을 받고, 스승의 생각을 출판할 것을 간청하였다. 원고가 레티쿠스의 손을 거쳐 세계 최초의 뉘른베르크 활판인쇄소로 넘어간 것은 42년이며, 이 책의 인쇄견본이 코페르니쿠스에게 전달된 것은 이듬해 5월 24일 그가 임종하는 자리에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뉘른베르크에서는 M.루터 등의 반대로 출판되지 못하고, 라이프치히에서 A.오시안더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지동설의 전거(典據)로서, J.케플러, G.갈릴레이, I.뉴턴 등의 후계자를 낳았으며 근대 과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지동설에서 유의하여야 할 점은 그가 생각한 태양계의 모습이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태양계와는 다르다는 점(그는 행성의 궤도를 원으로 보고, 운동의 불규칙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周轉圓을 사용했다)과, 지구의 공전과 자전의 증거를 하나도 밝혀내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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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 <Thales> (BC 624?~BC 546?) 7현인(七賢人)의 제1인자이며, 밀레토스학파의 시조이다.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 밀레토스 출생. 페니키아인의 혈통이며, 당초에는 상인으로 재산을 모아 이집트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배웠다. BC 585년 5월 28일의 일식(日蝕)을 예언하였는데, 그것은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적 지식에 의했던 듯하다. 그는 이집트의 경험적·실용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최초의 기하학을 확립하였다. ‘원(圓)은 지름에 의해서 2등분된다’, ‘2등변삼각형의 두 밑각의 크기는 같다’, ‘두 직선이 교차할 때 그 맞꼭지각의 크기는 같다’ 등의 정리(定理)는 그가 발견한 것이다. 또, 닮은꼴을 이용하여 해안에서 해상에 있는 배[船]까지의 거리를 측정하였고, 자석(磁石)이 금속을 끌어당기는 작용도 그의 발견으로 전한다. 또한 만물의 근원을 추구한 철학의 창시자이며 그 근원은 ‘물’이라고 하였다(형이상학). 물은 생명을 위하여 불가결한 것이며, 또 물이 고체·액체·기체라는 3가지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에서 그렇게 추정한 듯하다(물활론). 변화하는 만물에 일관하는 본질적인 것을 문제로 한 점에 그의 불후의 공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대지(大地)는 둥근 편평상(扁平狀)이며 물 위에 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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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 <Taylor, Brook>(1685~1731) 미들섹스주(州) 에드먼턴 출생.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712년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고, 14∼18년에는 간사(幹事)의 일을 맡아보았다. 미분학에서 유명한 ‘테일러의 정리(이것을 급수로 전개한 것이 테일러 급수이다)’를 저서 《증분법(增分法):Methodus Incrementorum directa et inversa》(15)에서 밝혔는데, 테일러의 도출(導出)로는 급수의 수렴성(收斂性)에 관한 고찰이 불충분하였다. 그 후, C.매클로린이 무한급수의 고찰로 이것을 재정식화하여 그 저서에 기술함으로써(1742), 흔히 ‘매클로린의 정리(또는 급수)’로도 불린다. 그 진정한 의의는 L.오일러가 《미분학(微分學)》(55)에 응용하여 알려지게 되었으며, 또 J.L.라그랑주가 이에 잉여항(剩餘項)을 추가하고 A.코시가 다시 증명하였다. |
파스칼(Pascal) (1623~1662) 프랑스의 사상가,수학자,물리학자,종교철학자 클레르몽에서 사법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수학,물리학을 공부하고 16세에는 <원추 곡선시론>을 발표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뒤 "파스칼의 원리"를 발견하였으며 "유체의 평형"등의 여러 가지 현상을 증명하고 "확률의 이론"을 밝히는 등 과학과 수학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654년에는 인생 문제로 고민을 하다가 수도원에 들어가 성경과 아우구스티누스를 연구하며 인간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그의 명상록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저서로는 <수삼각형론>,<크리스트 교의 변증론>,<사이클로이드 일반론>등이 있다. |
페르마 (1601 - 1665) 법률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었으나 틈틈이 수학을 연구하였다. 정수론과 확률론을 연구하여 "페르마의 정리"를 발견하였다. 또 광선은 극소 시간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를 진행한다는 "페르마의 원리"를 주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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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아노
<Peano, Giuseppe>
(1858~1932) 직관(直觀)에 얽매이지 않고 기하학을 건설하겠다는 기하학의 공리화(公理化)를 시도하여, 정의(定義)·공리·미정의어(未定義語)의 선택과 채용을 확립하여 일종의 수학적 논리학을 의도, 후에 드디어 D.힐베르트의 《기하학의 기초:Grundlagen der Geometrie》(1899)로 결실을 맺었다. 1889년의 결합의 공리와 순서의 공리에 관한 연구는 유명하며, 90년 토리노대학 교수가 되었다. 저서 《수학공식안(數學公式案):Formulario Mathematico》(5권, 1895∼1905)는 ‘페아노의 기호’로 쓰여졌으며, ‘페아노의 공리’가 서술되어 있다. 기호논리학의 개척자로도 꼽힌다. 이 밖에 코시 문제의 해(解)와 조르당곡선에 관한 연구 등 불변식론·미분방정식론에도 공헌하였다. 일종의 국제어인 ‘굴절 없는 라틴어(Latino sine flexione)’를 창안하기도 하였다(1903). |
푸리에 (1768 - 1830) 오세르에서 태어나, 1795년 파리 공과 대학 교수가 되었다. 1798년 나폴레옹 1세의 이집트 원정에 문화 공작 대간부로 종군했으며, 1802년 이제르 지사가 되어 활약하였다. 그 동안 고체내에 있어서의 열의 운동에 관한 이론을 연구, 유명한 "푸리에 급수"를 발표하여 근대 수학, 물리학에 큰 변혁을 일으켰다. 저서로는 <고체중의 열전도 이론>을 비롯하여 1829년에 써낸 <열 분석론>이 있고, 수학에는 방정식론의 연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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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보나치
<Fibonacci, Leonardo>
(1170?~1250?) 피사 출생. 피사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도 불린다. 아라비아에서 발달한 수학을 섭렵하여 이를 정리·소개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여러 나라의 수학을 부흥시킨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아버지가 아프리카 북안(北岸) 부지항(港)의 피사의 상무관장(商務館長)으로 있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수판(數板)에 의한 계산법을 배우고 또한 이슬람교 학교에서 인도 기수법(記數法)을 익혔다고 한다. 그 후 이집트·시리아·그리스·시칠리아 등지를 여행하여 갖가지 계산법을 습득한 다음 피사로 돌아와, 1202년 《주판서(珠板書)》를 저술하였다. 15장으로 된 이 책은 아라비아의 산술 및 대수(代數) 지식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의 수학서의 결정판으로서 그 후 수세기 동안 유럽 여러 나라에서의 수학원전(數學原典) 구실을 하였다. 기하학에 대한 저서 《기하학의 실용》(1220)에서는 유클리드를 소개하고 몇 가지 정리를 증명하기도 하였다. |
피타고라스 (B.C 582 - 497 ) : 그리스의 수학자 시므스의 명문에서 태어났다. 귀족주의적 경향때문에 고향을 떠나게 되어 남 이탈리아의 코르토니로 건너가, 거기서 일종의 종교 단체를 만들고, 남 이탈리아 귀족주의 당파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파의 압박을 받고, 메타폰 타운으로 도망쳐 거기서 죽었다. 그의 교도는 그 후에도 남 이탈리아에서 서기전 4세기 말까지 성공하였는데 그의 교단은 밀의 종교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므로, 그와 그의 제자들의 업적을 구별하기가 힘드나 영혼의 불멸과 윤회 등을 믿어 정신을 깨끗하게 하고, 영원한 진리를 가르치는 수단으로 수학과 음악을 중요시 하였다. 또 그는, 만물은 수와의 관계에 따라 질서있는 코스모스 그 기체 속에 질서와 조화를 지니는 우주 또는 세계를 만든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은 천체의 운동에도, 거문고 줄의 길이에도, 기술에도 모든 수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수학은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단위 1을 나타내는 어떤 크기의 점의 배열에 의해 성립되며 기하학적인 형태로 실재한다는 것이었다. 세계는 이 수와 그 비례에 의해 성립되는 법칙으로 일관된, 조화있는 존재로서, 뒤에는 정의는 4, 결혼은 5, 영혼은 6 이라는 수와 그 관계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였다. 그런 수학을, 실용을 떠나 연구하게 되었으므로, 그 방면에서는 커다란 업적을 남겼으며, 수학을 참 과학으로까지 끌어 올렸다. 수론으로는 형상수, 완전수, 우애수, 수의 비례의 연구가 있다. 기하학으로는 유명한 "피타고라스 정리", 삼각형의 내각의 합의 정리, 면적의 응용, 정 5각형의 작도 등을 증명 또는 발견하였다. 천문학에서는 지구의 구상을 믿어 일종의 지동설을 주창하였다. 음악도 수의 비례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음악에 사용되는 음의 높이를 정하는데 있어서 수학적인 비율에 의하여 나누는 것을 고안하여, 모노트으드( 일현금 )의 현의 길이를 2:3의 비율로 분할함에 따라 완전 5도의 음정을 열었으며, 이 5도를 중복해 가는 방법을 취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얻은 음계를 "피타고라스 음계"라고 한다. 그와 그 일파의 이와 같은 수학적, 천문학적 지식은, 최근의 연구에 의해 오리엔트의 과학적 문명의 바탕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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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 <Harriot, Thomas> (1560~1621)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후, 월터 롤리경(卿)의 수학 가정교사가 되었다가 그 인연으로 1585년 미국으로 가서 측량사가 되었다. 천문학자로서는 G.갈릴레이와 거의 같은 때에 망원경을 이용한 천체관측을 시작하여 목성(木星)의 위성을 관측하였으며, 태양의 흑점을 발견하고 물질의 밀도와 굴절률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고찰을 하였다. 특히 유명한 것은 수학 영역에서의 방정식 연구인데, 인수분해를 이용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한다. 또 근(根)과 계수와의 관계를 정식화(定式化)하고, 부등기호를 도입하는 등 방정식의 해법을 포함하는 대수학의 근대적 정식화에 공헌하였다. 저서에 《해석학의 실제》(1631) 등이 있으며 영국 최초의 대수학자로 꼽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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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턴 <Hamilton, William Rowan> (1805~1865) 아일랜드 더블린 출생.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통하였다. 백부(伯父)의 외국어 교육으로 13세 때에 이미 10여 가지 외국어를 익혔다고 한다. 수학에 흥미를 가지고 뉴턴·라그랑주·라플라스 등의 저서를 읽어, 대학 입학 당시에는 이미 수학을 거의 통달하였으며, 또 광학계(光學系)에 관한 뛰어난 이론과 아이디어를 창안하였다. 1824년 더블린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 27년 재학 중인 칼리지의 천문학 교수로 선임되었으며, 던싱 천문대장을 겸하였다. 이듬해 《광선계의 이론》 제1부를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해밀턴의 특성함수(特性函數)를 도입한 것으로, 광학계에 대한 일반적인 대수적 이론을 세운 것이며, 기하광학(幾何光學)의 기초이론이었고, 후년의 역학이론을 출발시키는 기본이 되었다. 이어 원뿔굴절[圓錐屈折]을 예견하였는데(1832), 이것은 H.로이드에 의하여 실증되었다. 그 무렵부터 광학을 도입한 역학의 모든 분야에 이를 확장시키려는 시도에서 특성함수를 사용한 빛의 전파(傳播)와 질점(質點)의 운동을 통일, 34년 변분원리(變分原理)라고 하여 ‘해밀턴의 원리’를 확립하였다. 또한 ‘해밀턴의 정준운동(正準運動) 방정식’을 수립함으로써, 해석역학(解析力學)의 기초를 확립하기도 하였다. 한편, ‘4차원법’을 착상하여 그 이론의 전개에 노력하였고, 이론물리학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유용성을 밝히려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의하여 대수계(代數系)에 대한 다양한 길이 열렸고, 그 후의 대수학 및 물리학에 대한 응용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워즈워스·콜리지 등과도 교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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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베르트 <Hilbert, David> (1862.1.23~1943.2.14) 쾨니히스베르크 출생. 현대수학의 여러 분야를 창시하여 크게 발전시켰다.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을 졸업한 뒤 이 대학의 강사를 거쳐 1893년 교수가 되었다. 95년 괴팅겐대학으로 옮겨, A.후르비츠, H.민코프스키와 함께 괴팅겐대학을 세계 수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힐베르트의 학풍을 찾아 우수한 수학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만년에는 나치스의 박해를 받았지만 전혀 굽히지 않았고, 괴팅겐에서 죽었다. 업적은 수학의 거의 모든 부문에 미치고 있으나, 특히 대수적 정수론(代數的整數論)의 연구, 불변식론(不變式論)의 연구, 기하학의 기초확립, 수학의 과제로서의 몇몇 문제의 제시, 적분방정식론의 연구와 힐베르트공간론의 창설, 공리주의수학기초론(公理主義數學基礎論)의 전개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저서 《기하학의 기초》(1899)에서 제시한 공리계(公理系)에 의한 기하학의 이론 구성 문제는 그가 1900년 파리의 수학자회의에서 행한 수학의 전망에 관한 강연과 함께 수학에서의 공리주의의 방향을 자리잡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어 준 획기적인 것이었다. |
호퍼 (1906-1992) 그레이스 호퍼는 뉴욕에서 태어나 Vassar대학과 예일 대학교에서 교육받았다. Vassar에서 수학 부교수였던 호퍼는 1943년 해군에 합류했다.그녀는 하버드 대학교에 있는 Howard Aiken 전산 연구소에서 최초의 대형 U.S.컴퓨터인 Mark 1의 프로그래머로서, 전기 컴퓨터의 선구자로서 일했다. 1950년에서 1960년에 걸쳐 Eckert - Mauchly Computer Corporation에서의 그녀의 업적이 알려지면서 호퍼는 최초의 컴파일러를 발명해 냈다. 이 컴파일러는 영어를 기계어로 컴퓨터에 대한 명령을 번역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녀는 Flow - Matic 프로그래밍 언어와 일반 상업 중심 언어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경영과 프로그래머를 오가며 컴퓨터에 대한 산업과 사업에서 흑자를 보았다. 그녀는 미국 해군 연구소에서 퇴임했으나 컴퓨터 프로그램과 언어를 표준화하는 해군의 프로그램의 감독을 위하여 다시 기용되기도 했다. 1973년 그녀는 영국 회의 특별 조치로 해군대령이 되었으며 1983년에는 해군 소장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호퍼는 1986년 해군에서 전역하여 Digital Equipment Corporation (디지털 장치 회사)의 수석 고문으로서 봉사했다. 그 후 1992년에 타계했다. |
힙포크라테스 (B.C 450 - 400) : 그리스의 수학자 활모양의 넓이와 입방체의 부피를 연구하였다. 그는 원의 넓이가 그 지름의 평방에 비례하는 일월형의 정리 "힙포크라테스의 일월형"을 만들었다. 그는 또한 <기하학 원론>이란 교과서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선구가 되었다. 그 밖에 학제 개선과 문자기호의 사용을 보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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