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전화기
전비담
없어지는 사람처럼 고집을 피우고 싶습니다. 거기엔 구멍이 있어요.
빨갛게 없어지는 고집말예요.
밖에 다녀올 때마다, 나는 가보지도 못하는 까무룩한 나중을 어디서
싸왔는지, 엄마는 한보따리씩 내 방에 풀어놓았습니다. 내 방은 하루종
일 닦아내도 닦이지 않는 나중이 되었습니다.
빨간 전화기 속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거긴 엄마는 평생가도 알 수 없
는 다른 나중이 들어 있어요. 엄마의 치마에선 일어설 때마다, 개수대에
서 헤엄치던 물고기 비늘이 떨어졌어요. 날마다 내 머리끄덩이를 잡고
흔들며. 그렇게 살다간 나중에 빌어먹는 물고기가 될 거야. 그런 말씀 마
세요, 엄마. 나는 물고기가 아니라 없어지는 나중이 될 거예요. 나중이
풍기는 비린내를 미리 지울 거예요.
새벽에 몰래 빨갛고 동그란 전화기로 갔습니다. 나중의 냄새가 몰려와
서 못살겠어. 닦을 수 없는 나중은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오점처럼 부끄러
워요. 신의 권총 같은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면 나는 빨간 결심의 냄
새를 품고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어요. 눈
을 깜빡이며 나는 이제 웅크리고 있을 겁니다. 아무데도 전송되지 않고.
나의 없음을 지킬 거예요.
내가 껴안을 때마다 비늘이 떨어지던 내 딸들과
제때 나를 만나러 오지 않던 하느님과
너무 일찍 내 손목을 놓아버린 손목시계
밥그릇 속에 나중에 이루어질 아멘을 몰아넣어 수도 없이 빌어먹은 아
침식탁
그리고 나의 고집스런 없음을 건드리며
나중에 누가 수화기를 들 것입니다.
《시현실》2015년 여름호 발표
첫댓글 전비담 선생님 좋른시 잘 감상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름 더위에 건강 잘 지키시길요^^
좋으네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탄탄함이 느껴집니다.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힘나게 해주셔서 고맙고 고맙습니다.
동백섬 밤산책은 잘 다녀오셨어요? ^^*
더위에 건강 잘 지키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