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 전역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9월 13일부터 1943년 5월 13일까지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벌어진 전투로 사막 전투로도 알려졌으며, 이집트를 비롯한 리비아,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 등에서 벌어졌고, 지중해 전역의
일부로 다뤄지고 있다.
미국은 1942년 5월 11일부터 영국을 직접 지원하기 시작했다. 미국 육군은
공식적으로 “북아프리카 전역”을 별개로 다루지 않으나 아래에 서술된 더 소규모 전역으로 나눈다.
이 지역에서 전투는 이탈리아가
영국 점령 지역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탈리아가 끔찍한 역전을 당했을 때, 나치 독일의
에르빈 롬멜
원수(당시 계급은 중장) 아프리카 군단이
이탈리아군을 돕기 위해 파병되었다.
몇 차례 리비아와 이집트를 오가는 공방전 후,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의 영국 연방군이 추축국을 튀니지로 몰아냈다. 1942년 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하는 연합군이 북서 아프리카의
프랑스령 식민지에서 벌인 횃불 작전과
비시 프랑스에
충성하는 비시 프랑스군과 전투 이후 영국 8군과 미국군은 마침내 튀니지 북부에서 독일군 및
이탈리아군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영국의 울트라가
해독한 암호문에서 얻은 정보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연합군의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


















































마지막 3단계인 튀니지 전투는 1942년 11월 17일에 시작되어 1943년 5월 13일에 끝났고,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 1943년 1월 5일, 이탈리아의 보급선을 차단할
목적으로 동부 튀니지의 가베스 만의 스팍스 근처에서 실시된 연합군의 육해공 합동 상륙 작전인
라게세 작전.
- 미국 2 군단의 동부 공격 : 퓨질리스트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1943년 3월 17일에 가프사의 독일군 방어선 공격
3.
1942년 7월, 연합군은 북부 프랑스에 소규모 상륙작전(쇠망치Sledgehammer 작전)을 벌이기로 의견을 모았다가 효과가 적다는 이유로 북아프리카 모로코Morocco, 알제리Algeria와 튀니지의 비시Vichy 프랑스군 영토를 확보한 후에 추축군의 배후를 치기로 했다. 이렇게 북아프리카 해안을 완전히 장악하면 지중해를 통한 해상수송로를 열 수 있었다.
4.
시실리와 튀니지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추축군은 연합군의 상륙(횃불Torch 공세)을 그대로 두고 볼 리가 없었고 연합군은 상륙 즉시 튀니지를 장악해야만 했다.
5.
10월 말 현재, 시실리와 사르디니아Sardinia에는 독일 298대와 이탈리아 574대의 비행기가 있었기 때문에 횃불Torch 상륙지를 동쪽 멀리로 정할 수도 없었고 알제Algiers(알제리 수도)를 상륙지로 선택했다. 프랑스군(자유 프랑스가 아닌 비시)이 어떻게 나올 지를 알 수 없지만 상륙하게 가장 좋은 지점이었다. 알제를 장악하면 상륙군은 추축군이 대응하기 전에, 겨울 우기에 열악한 도로를 따라 1,400km 떨어진 튀니지 진입해야 했다. 그리고 해군과 공군이 추축군의 병력결집을 최대한 막아주어야 했다. 튀니지 작전은 케네스 앤더슨Kenneth Anderson의 영국 제 1군 사령부가 지휘하기로 했다.
7.
11월 8일, 횃불 작전 상륙부대가 알제리(알제와 오랑Oran)와 모로코(카바블랑카)에 상륙했다.
튀니지는 직사각형 형태로 북부와 동부 대부분은 지중해에 접해 있다. 알제리와 맞붙은 서부 국경 대부분은 삼각형 모양의 아틀라스Atlas 산맥이 있어서 몇 군데의 협곡만 막으면 쉽게 방어할 수 있었다.
튀니지는 횃불 작전군을 막아내기 좋은 지형이었다. 그리고 수심이 깊은 2개의 항구를 가지고 있어서 시실리의 수송선이 밤에 들어와서 숨어있다가 다시 밤에 돌아갈 수 있었다. 히틀러는 튀니지를 최소 몇 개월에서 최대 몇 년은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군은 11월 10일에 연합군과의 전투를 중지하면서 튀니지는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인 상태가 되었고 연합군과 추축군의 경주가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충분한 병력이 없는데다가 추축군의 공습을 우려해 튀니지 상륙을 고려하지 않았다. 겨우 2개 여단에 약간의 기갑전력뿐이었지만 신속하게 진격한다면 비교적 적은 피해로 튀니지를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한 앤더슨은 아직 바다에 있던 제36 보병여단을 급히 투입했다.
튀니지 정부는 눈치를 보며 양쪽 모두에게 비행장을 개방했다.11월 9일, 튀니스(튀니지의 수도)에 40대의 독일항공기가 도착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이튿날 항공정찰에서는 100대의 비행기가 발견되었다. 11월 말이 되자 3개 독일군 사단 (제10 전차사단 포함)과 2개 이탈리아 사단이 보강되었다. 11월 17일, 새로 편제된 90군단 사령관 발터 네링Walter Nehring(아래 사진 오른쪽)이 도착했다.
비록 롬멜이 알제리에서 동진한 미군과 리비아에서 서진한 영국군 사이에 포위되었으나 1942년 12월 일련의 방어 작전으로 연합군을 저지하기 위해 애썼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미국
2군단을
상대로 한 카세린 통로 고개 전투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롬멜은 병력과 장비가 부족했으며 롬멜이 지원 요청을 위해 베를린에 갔다가 히틀러의
명령으로 본국에 남게 되고, 대신에 1942년에 튀니지로
파견된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대장이 지휘권을 인수하여 독일군을 지휘했다.
그렇지만 튀니지의 프랑스군 지휘관 바레Barre는 이탈리아군을 믿지 않고 산맥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테베르스소우크Tebersouk에서 마자즈 알 바브Majaz al Bab까지 방어선을 펼치고 어느 누구도 통과시키지 말라고 명령했다.
알제리에서 튀니지로 통하는 도로를 두 곳이 있었다. 연합군은 2개의 도로를 따라 진격한 후에 비제르테Bizerte와 튀니스를 점령할 계획이었다. 11월 11일,영국 제36 보병여단은 베자이아Bejaia에 무혈입성했지만 보급문제로 진격속도가 늦었다. 제3 강하대대가 공수작전으로 보네Bone 비행장을 점령했고 12일에는 6코만도 부대가 항구를 점령했다. 15일에는 36여단 선봉대가 테바르카Tebarka까지 진격했고 18일에 처음으로 추축군과 전투를 벌였다.
훨씬 남쪽에서는 15일에 미군 강하대대가 아무런 피해없이 내린 후에 이틀 만에 가프사Gafsa 비행장을 노렸다
하지만 결국 영국 8군이 마레트 방어선의 추축군 방어선을 돌파한 이후, 연합군은 아프리카에서 추축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1943년 5월 13일 추축군의 항복을 받았다. 이때 독일군 12만 5000명을 포함한 27만 5000명의
추축국 병력이 항복했는데 이 엄청난 병력 손실은 추축군의 군사력을 크게 감소시켰다
튀니지 전역은 튀니지에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철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징벌 작전(Operation Retribution)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작전은 1943년 5월 7일에 시작되었고, 튀니지에서
시칠리아와 이탈리아로 철수하려는 독일군 함대를 공격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653명이 탈출한 반면, 897명이 해상에서 포로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고 상당수 인원이 익사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튀지니 캠페인은 2차대전
북아프리카 전선 중 튀니지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전투를 말한다. 연합군 주력은 영국군이었고 미군과 프랑스군이
보조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독일과 이탈리아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시작되었지만 연합군의 막대한 공급과
수적 우위로 추축군은 회복할 수 없는 패배로 몰렸다. 23만 명 이상의 독일과 이탈리아 병사가 포로로
잡혔고 전설적인 아프리카 군단Afrika Korps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