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1일(주일) 낮 설교 - 성령강림 후 제6주 -
선택의 우선순위
( 누가복음 10 : 38~42 )
Ⅰ. 「 설교시간 」
어느 교회에 설교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졸고 있는 장로가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는 설교시간에 그 장로를 바라볼 때마다 힘이 쭈욱 빠짐을 느꼈습니다. 하루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서 그 장로를 조용히 만나 말을 꺼냈습니다. “장로님, 오해는 하지마시고 대답해주시기 바랍니다.” 장로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역력했습니다. “장로님은 어찌하여 설교시간마다 그렇게 조시는 겁니까? 저의 설교가 듣기 싫어서 그러십니까?” 장로는 펄쩍 뛸 듯 놀라서 손을 가로 저으며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목사님 설교하실 때 조는 것은 안심이 되어 그럽니다.” 목사는 장로의 말에 의아해 하며 되물었습니다. “안심이 되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장로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우리 교단의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을 정식으로 졸업하신 유능한 목사님 아니십니까? 게다가 목사님의 설교는 성경적으로나, 교리적으로 항상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이단적인 요소도 없고 불건전한 요소도 없고 잘못된 점이 없습니다.”
“무엇을 지적하려고 해도 지적할 것이 없는 순수한 메시지입니다. 늘 상 옳은 말씀만 하시니 신경 쓸 요소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목사는 한편으로는 무언 가 석연치 않으면서도 자신을 치켜세우는 장로의 말에 흡족해하며 동조했습니다. “그야 그러시겠지요.” 장로는 자신의 직임을 잘 수행했다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결국 우리 교회의 양 떼들은 좋은 꼴만 먹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제 마음은 편안하고 안심이 되니까 저절로 잠이 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맞는 건가요?
예배 중에 설교시간이 가장 깁니다. 보통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할 때는 잘 졸지 않습니다. 그런데 설교시간에 조는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설교시간에 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너무 일에 지쳐 있거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졸기 십상입니다. 이럴 경우 조는 것은 생리적 현상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습관적으로 졸기도 합니다. 설교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시간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합니다.
Ⅱ.
우리는 날마다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시장에 가서 쇼핑을 할 때도 여러 가지 물건 중에 취사선택합니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도 무엇을 먹을지 메뉴를 보고 선택합니다. 선택은 일상생활에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선택을 함에 있어서 나름의 기준이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기준에 따라 선택합니다. 주머니에 돈이 별로 없으면 되도록 싼 물건이나 음식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싸다고 무조건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품질도 고려해서 선택합니다. ‘가성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되도록 가성비가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가성비란 ‘가격 대비 성능이 좋다’는 뜻입니다. 이왕이면 가성비가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건을 구매할 때뿐만 아니라,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지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것부터 해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지 않으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가장 먼저 요구하셨던 것은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는 것” 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길을 가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끌고 한 마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는 ‘마르다’라는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 마음에 들어가시자 마르다는 자기 집으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동생 마리아가 이어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본문에는 동네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베다니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베다니에는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떤 연유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이들 삼남매와 매우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1)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3)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두 자매는 오빠 나사로를 가리켜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삼남매와 예수님의 관계가 보통 친밀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본문에는 마르다의 선택과 마리아의 선택이 나옵니다.
Α. 마르다는 예수님을 우선 잘 대접하기로 결심했습니다(40).
마르다는 두 자매 중 언니입니다(39). 아마도 마르다가 이 집안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르다의 관심은 자기 집에 오신 귀한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 일행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대접할 마음뿐이었습니다. 정신이 온통 음식 장만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미리 준비할 시간이 있었으면 좀 나았을 텐데, 아무 계획 없는 갑작스런 초대와 방문이기에 준비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손님을 잘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은 참 귀한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봉사의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봉사를 ‘디아코니아’라고 하는데, 직분 중에 집사라는 말이 ‘디아코노스’입니다. 디아코노스는 ‘섬기는 자요 일꾼’입니다. 교회 안에서 디아코노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섬기는 일꾼이 있어야 교제도 잘 할 수 있고, 교회도 아름답게 가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의 섬김을 기억하면서 ‘마르다선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마르다는 섬김에 열심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교회에서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약점은 너무 봉사에 신경쓰다보니 봉사는 잘하는데 다른 부분이 약하다는 점입니다. 마르다는 마음이 분주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마르다를 도와주지 않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마리아가 얄미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동생을 보내달라고 부탁드립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40)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리아의 선택이 더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본전도 찾지 못했습니다.
Β. 마리아는 우선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기로 결심했습니다(39).
마르다 입장에서 보면 마리아는 참 얄미웠을 것입니다. 언니 혼자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마리아는 아랑곳없이 예수님 곁에서 주님의 말씀만 듣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언니 사이가 안 좋아서 그런 것이었을까요? 마리아가 아무리 언니보다 어리다한들 언니의 심정을 모를 리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예수님 곁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우선순위는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다 듣고 나서 대접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간에 말씀을 듣지 않으면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심방하러 가정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떤 가정은 말씀을 듣기 위해 준비하고 있고, 어떤 가정은 잘 대접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잘 대접하려는 마음은 참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그 가정에 주어진 말씀에 경청하는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심방예배가 다 끝나기도 전에 미리 나가서 대접할 준비를 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면 뭐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해서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예배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갑자기 심방 가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미 예고된 심방이기에, 미리 준비해놓고 예배와 말씀에 충실해야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애찬을 잘 준비하려는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배에 충실한 것입니다. 예배 시작부터 축도로 끝날 때까지 예배에 집중해야 하고,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언니를 도와주지 않았다고 꾸지람을 받지 않고 오히려 칭찬을 받은 것은, 무엇이 우선순위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배가 우선입니다. 찬송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명심하여 듣는 것이 우선입니다.
Γ.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선순위를 가르쳐주셨습니다(41-42).
42절을 보면,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우선으로 할 것인가를 잘 생각하고 판단해야합니다. 우리는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일요일이나 휴일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성도는 주일이라고 합니다. 주일이란 ‘주의 날’이라는 말입니다. 이 날이 왜 주님의 날일까요? 주일에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 주일을 ‘작은 부활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을 작은 부활절로 지키는 것입니다. 신앙인 중에는 이 날을 주일로 지켜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주일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라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주일은 그냥 일요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일이 있으면, 내 일을 먼저 처리합니다. 어촌계 일도 마찬가지고,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주일이 주일이 되도록 지켜야합니다. 주일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입니다. 그 어느 것도 예배보다 우선일 수 없습니다. 주일에 가장 좋은 일은 예배하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그 편을 택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아처럼 그 편을 택해야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무엇을 우선순위로 정하느냐 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기 정체성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예배를 우선순위에 두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서지 않으면 믿음생활이 제대로 서지 못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것은 먼저 예배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먼저 예배해야합니다.
Ⅲ.
한 마을에 말을 잘 타기로 소문이 난 마부가 있었습니다. 소문을 듣고 어느 날 젊은 무사가 그를 찾아와서, 자신과 말 타기 시합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마부는 그 청을 거절했으나, 젊은 무사가 어찌나 끈질기게 청을 하든지 결국 말 타기 경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하루 종일 말 타기 시합을 하였지만, 모두 마부가 승리했습니다. 젊은 무사는 크게 실망하고 돌아가려고 마부에게 인사했습니다. 그때 마부가 그를 불러 앉혀 놓고 말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말을 잘 타려면 내가 지금 말을 타고 있다거나, 말이 또한 나를 태우고 있다거나 하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아야 하네. 그렇게 해야 사람과 말이 하나가 될 수 있네. 그리고 승리에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되네. 말 경주를 하다보면 내가 앞설 수도 있고 때론 뒤로 처질 수도 있는 것이라네. 그런데 항상 말에게 앞설 것만을 요구하면 어찌 말과 내가 하나 되어 물 흐르듯 달릴 수가 있겠는가?” 젊은 무사는 이 말을 듣고 다시 마부에게 절을 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여자 골프선수 김지현 양은 프로골퍼 데뷔 7년 만에, 그리고 125개 대회 만에 생애 첫 승을 얻게 되었을 때, 인터뷰에서 “우승을 쫓아다녔더니 우승이 달아났다. 오히려 마음을 내려놓았더니 첫 우승이 내게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우리 자신을 주님께 내려놓으면, 우리 인생은 주님과 함께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