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형상 아니라 깨달아야 알 수 있어
예장종경 스님 게송에 대한 의해
부처님 마음 무엇인지 묻는 것은
진법도 진불임을 깨우쳐주기 위함
모든 법 여여해 차별 없음 일깨워
장성 백양사 대웅전 내부에 걸린 주련.
法空非我道非親 樹倒藤枯笑轉新
법공비아도비친 수도등고소전신
風掃止啼黃葉盡 千林全體露天眞
풍소지제황엽진 천림전체로천진
(법공(法空)도 아(我)가 아니요, 도(道)도 친하지 않도다./ 나무가 넘어지고 등나무가 마르니 그 웃음 더욱 새롭도다./ 바람 불어 울음 그치게 한 황엽(黃葉)마저 다 쓸어 버린 곳에/ 온 산 수풀 전체가 천진(天眞)을 드러내도다.)
‘금강경’ 제31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에서 “수보리야, 말한 바와 같이 법상(法相)이란 여래가 설하되 법상이 아니고 그 이름이 법상이니라(須菩提 所言法相者 如來 說卽非法相 是名法相).”라는 가르침에 대하여 ‘금강경오가해’의 송나라 예장종경(豫章宗鏡 904~975) 스님 게송에 대한 의해(義解)를 주련으로 삼았다. 종경 스님은 ‘종경록’ ‘만선동귀집’ 등을 저술한 영명연수(永明延壽) 스님이다.
지견불생분에서는 우리에게 “부처의 마음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되묻는다. 대부분 불자가 불상만 진불(眞佛)로 여기고 진법(眞法)은 멀리하는 경향을 깨트려주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여래가 ‘금강경’을 설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고 자신의 영달이나 죽은 자에게 의례적으로 읽어주는 경으로 취급된다면 이는 경이 아니라 부적경(符籍經)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지견(知見)은 부처님의 견해가 아닌 자신의 견해로 드러내는 알음알이다. 부처님은 친절하게 아견(我見), 인견(人見), 중생견(衆生見), 수자견(壽者見)은 단지 이름이며 여시지 여시견 여시신해(如是知 如是見 如是信解)하여 법상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설하셨다.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에서도 벗어나야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체득할 수 있다.
부처님은 아누다라삼막삼보리, 다시 말해 법상을 설해 모든 중생이 언설에 집착하는 병폐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했다. 모든 법이 본디 여여해 모든 이에게 차별 없음을 일깨워주셨다. 특정한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면 이는 지견이다. 부처님 말씀에만 집착하여 본월(本月)은 보지 못하고 수중월(水中月)만 본다면 본지를 알지 못한다.
공(空)과 비아(非我)가 공상(空相)이지만 이마저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심행(心行)이 멸하면 반야(般若)임을 알아차리는 것이 지견이며 지견도 멸(滅)하는 자리가 참다운 지견이라고 단락지은 것이다. 도(道)와 친하지 않다는 것은 도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집착은 분별을 낳고 분별은 망상의 세계를 펼쳐 무명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나무는 높음을 자랑하므로 사상(四相)을 뽐내 우쭐거리는 것이다. 등나무는 이리저리 얽히기 마련이므로 언구에 스스로 얽매임이다. 나무가 쓰러졌다는 것은 사상이 무너짐이며 등나무가 마름은 문자나 언설에서 벗어남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하라는 것이다. 기러기 그림자가 연못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허공이 무너지지 아니하므로 진여자성 또한 부동하다. 이 도리를 아는 것이 파안미소며 염화미소다.
우는 아이를 달래려 황엽을 돈이라고 해 울음을 그치게 했으니 이는 방편(方便)이다. 부처님께서 베푸신 말씀은 모두 방편과 같으므로 이를 황엽에 비유하였다.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한 황엽도 법풍으로 다 쓸어 없애버려야 비로소 진인(眞人)이 될 수 있음이다.
천림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면 마지막 구절은 저절로 이해할 수 있다. 천림은 ‘다게(茶偈)’의 백초임중일미신(百草林中一味新)에서 백초와 같은 의미로 팔만사천법문을 말한다. 천진(天眞)은 천연스러운 모습이며 불생불멸의 자리, 곧 부처를 뜻한다. 팔만사천법문도 모두 마음으로 귀납된다. 마음은 형상이나 집착하는 대상이 아니라 깨달아야 알 수 있다. 그때 눈앞에 부처가 의젓하게 있으므로 대면즉불(對面卽佛)이라고 한다.
법상 스님 김해 정암사 주지 bbs465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