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개막한 베니스국제영화제(9월 7일 폐막)에서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전쟁터의 러시아인들'(Русские на войне)이 5일 상영됐다. 비경쟁부문에 오른 작품이지만, 우크라이나는 권위있는 국제영화제가 러시아 시각에서 만든 다큐 작품의 상영을 허용한데 대해 거세게 반발했다.
우크라아나 매체 스트라나.ua와 러시아 영화 전문 블로그 등에 따르면 다큐 '전쟁터의 러시아인들'을 제작, 출품한 이는 캐나다에 거주하는 러시아 출신 여성 감독 아나스타샤 트로피모바다. 이 다큐를 찍기 위해 트로피모바는 돈바스 지역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의 최전선에서 7개월간 머물며 다양한 얼굴의 러시아 군인들을 만났다.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다큐 '전쟁터의 러시아인'의 한 장면/영상캡처
그녀는 "러시아에서는 영웅으로, 서방에서는 살인자나 강간범으로, 아주 극단적으로 평가받는 참전 러시아 군인들이 실제로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며 "기존의 고정 관념을 깨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고 말했다.
다큐속 러시아 군인들은 우리와 다른,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한 군인은 "돈을 위해 싸우러 왔다"고 했고, 다른 이는 "애국심 때문에 싸우고 있다"고 했다. 러시아편에서 싸우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한 병사는 2014년 우크라이나 동부 내전(돈바스 내전) 당시, 우크라이나군이 자신의 고향을 폭격했다고 격분했고, 다른 이는 "우크라이나에서 나치와 싸우고 있다"고 믿고 있다.
더 볼 것도 없이 러시아적인 시각에서 만든 우크라이나 전쟁 다큐물이다. 지금까지 서방에 알려진 것과는 다른 영상이다. 우크라이나 측이 반발할 만하다.
트로피모바 감독은 "전쟁이라는 안개를 걷어내고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위한 시도"라고 제작 의도를 설명했다. 나아가 “이 다큐 영화가 전쟁 와중에 파괴된 교량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도와주기 위해 내려주고, 붙잡을 수 있는 밧줄이 되기를 바란다 ”고 했다.
영화속 트로피모바 감독/캡처
상영이 끝난 뒤 그녀는 "내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은, 그들(참전 러시아 군인들)에게도 아끼는 가족이 있고, 유머 감각도 있으며, 이 전쟁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또 촬영하는 7개월간, 우크라이나와 그 동맹국들이 러시아군을 향해 비난하는 전쟁 범죄(민간인 살해나 강간)는 단 한 건도 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베니스국제영화제가 '전쟁터의 러시아인들'의 상영을 허락한 데 대한 우크라이나와 그 동맹국들의 반발은 거세다. 가브리엘리우스 란트베르기스(Gabrielius Landsbergis)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은 소셜 네트워크 엑스(X, 전 트위트)를 통해 "이런 영화가 어떻게 영화제 상영 프로그램에 포함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고, 안드레이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실장은 “문명 세계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부끄럽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 다큐물은 캐나다 토론토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러시아 시각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가 서방 세계의 공분을 불러 일으킨 것은 '전쟁터의 러시아인들'이 처음은 아니다. 전쟁 발발 2주년을 즈음(2024년 2월)해 독일 TV 채널 ZDF와 영국 ITV가 각각 도네츠크주(州) 러시아군 점령지 현장 르포물을 제작, 방영한 바 있다.
ZDF는 러시아가 개전 초기(2022년 5월)에 점령한 도네츠크주 '마리우폴' 르포 기사를 내보냈다가 (서방 중심의) 국제사회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마리우폴을 찾은 ZDF의 아르민 쾨르퍼 특파원은 파괴된 도시를 보여준 뒤 "이제는 거리와 학교, 주거용 건물, 또는 동네 전체가 빠르게 복구되고 있다. 마리우폴은 더 이상 유령 도시가 아니다"고 전했다. 또 "이전에는 극장에서 러시아어로 공연하는 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가 도시를 점령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현지 주민의 발언을 소개했으니, 우크라이나측의 비판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영국의 다큐멘터리 전문기자 션 랑건이 2022년 가울부터 3차례에 걸쳐 러시아가 점령한 돈바스 지역을 찾아가 제작한 다큐 '우크라이나 전쟁: 그 반대편에선(Ukraine's War: The Other Side)'이 전쟁 2주년을 앞둔 2024년 2월 19일 ITV를 통해 방영되자 난리가 났다. 영국 내부에서도 '방영하네 마네' 논란도 적지 않았지만, 결론은 '방영한다'는 쪽으로 났다. 그 이유는 "이 다큐멘터리는 무력 분쟁에 휘말린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독립 저널리즘의 성과물'이라는 주장이 먹혔다.
랑건 기자도 "러시아의 선전에 빠지지 않으면서, '인간의 얼굴'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전쟁 중에 나타난 '인간의 얼굴'을 영상으로 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랑건 기자 등 촬영팀은 방영 후에도 러시아 당국의 '프로파간다'에 이용된 것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다큐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가 서방 언론을 통해 일방적으로 접해온 뉴스와는 '그 반대편에 선' 톤이자 내용이기 때문이다.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영된 '전쟁터의 러시아인들'과 그 톤이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랑건 기자도 르포 서두에서 “우리는 이 전쟁의 한 면만을 계속 보아왔는데, 다른 면을 보고 싶었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시작됐다'는 사실을 넘어 러시아가 점령한 지역에서 현재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는 트로피모바 감독의 발언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다큐 '우크라이나 전쟁: 그 반대편에선' 역시 영국에서 첫 방영된지 한달 뒤인 3월 19일 호주의 ABC TV 채널을 탔다.
다큐 '전쟁터의 러시아인들'이 전하고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전쟁의 조기 종식이다. 러시아 군인들도 전쟁의 무의미함을 이야기하며 하루라도 빨리 끝나기를 기원했다.
군의관 안차르는 "우리 젊은 애들이 여기서 왜 죽어나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자손들이 이 전쟁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욕설), 우리 아이들이 여기에 있는 동안, (의사인) 내가 어디로 갈 수 있겠어요, 어떻게 그들을 두고 여기를 떠날 수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진격 중 상대의 포격에 주춤하며 몸을 피하는 군인/캡처
러시아가 '전쟁 속 인간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우크라이나에게는 큰 불만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의 다리아 자리브나야 보좌관은 “베니스 영화제에서 '전쟁터의 러시아인들'을 상영한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려는 부끄러운 선전 행위"라며 "그들이 매일 저지르는 전쟁 범죄의 진실을 밝히기는커녕, 그들을 '유머가 있는 평범한 인간'으로 묘사했다"고 비판했다.
일각에서는 "러시아 국방부나 연방보안국(FSB)의 똑똑한 관리들의 요청으로 제작된 것 같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에 대한 트로피모바 감독의 답변은 독일의 ZDF 채널과 영국 ITV의 다큐 제작 의도및 방영 취지와 다를 바 없다.
“과정이야 어떻든, 이쪽이든(러시아), 저쪽이든(우크라이나) 지금 전쟁 중이다. 우리가 왜 그 한쪽을 인간으로 보지 말아야 하나? 그들도 사람이다. 나는 평화를 사랑하고, 우리 모두 서로를 인간으로 여기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