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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5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화요일. - 조급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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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5. 사순 제5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조급증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오늘은 여러분께 양해를 구하고
오늘 전례에서 좀 벗어나는 주제로 나눔을 하겠습니다.
벗어나는 주제란 <조급증>인데 이것을 주제로 삼은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이 주제로 나눔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급증을 먼저 사전에서 찾아봤더니 '참을성이 없이 매우
급하게 구는 증세'라고 나와 있었는데 그러나 왜 급하게 구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아서 제 나름대로 그 이유에서부터 종류까지 생각해봤습니다.
첫 번째로 떠오른 것은 미리미리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찻시간이 11시이고 그래서 10시부터 천천히 준비해 나가도 되는데
괜히 9시부터 마음이 분주하고 불안하여 미리 떠나야지만 안심이 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런 조급증은 그 사람의 심리적인 문제일 뿐
그리 나쁜 것은 아니고 죄라고까지 할 수는 없는 것인데
저의 경우 이런 면에서는 아주 느긋합니다.
그리고 일의 경우도 원하는 결과를 빨리 얻지 못해도 느긋한 편입니다.
언젠가 될 거라는 믿음과 희망이 있기 때문이고,
설사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는 다릅니다.
사람에 대해서는 조급증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옛날에 양성 책임자로 있을 때는
제가 양성하는 형제들이 빨리 원하는대로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는 마치 씨를 뿌리고는 언제 싹이 돋나 매일 살피고,
싹이 나면 빨리 쑥쑥 크기를 바라며 물을 자주 주는데
생각만큼 빨리 크지 않으면 억지로 키를 늘리기라도 할듯이
물을 너무 많이 줘 오히려 뿌리를 썩게 만드는 것과 같지요.
그러니까 저는 사람 욕심이 있는 것이고,
좋게 얘기하면 돈 욕심이나 일 욕심보다 사람 욕심이 있는 것이며,
저의 보람이 부나 일의 성취보다 훌륭한 사람을 만드는 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사람은 욕심의 대상이 되면 안 되고
심할 경우 이것은 돈 욕심이나 일 욕심보다 더 나쁩니다.
욕심으로 사람을 소유하려고 드는 것이고
그 때문에 사람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봤듯이 욕심이 조급증을 유발하고
조급증은 사람마다 자기 성장의 때가 있는데
내가 그 성장의 때를 억지로 앞당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나쁜 조급증은, 이런 표현이 적합한지 모르지만,
영적인 조급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겸손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때를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오늘 민수기의 사람들처럼 자기의 때를 하느님께 들이대며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불평하고 불만하는 것입니다.
일에 대해서건 사람에 대해서건 다 하느님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봄이 되면 싹이 트고 여름이 돼야 자라며 가을이 돼야 열매 맺듯
다 그 때가 있는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때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봄이라고 모든 나무가 똑같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지 않고,
각기 자기의 봄 곧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자기의 때가 있듯이
일이나 사람도 다 그것의 때가 있고 그것의 때가 하느님의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의 때를 하느님께 들이댑니까?
하느님의 때를 공순히 기다립니까?
우리 각자 조급증과 관하여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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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5. 사순 제5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1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와 지향✝️
2022년 4월 5일 화요일
✝️ 1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신적 지혜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또다시 그들의 세속적이고 육적인 마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당신께서 육을 취하지 않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사악함과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1성인 / 영적 글 묵상✝️
말씀의 불꽃(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에 관한 이야기 / 프랑스와 까생제나-트레베디
대성당을 위한 돌 하나
그대가 거룩한 독서에 몰두할 때에. 그대를 초월하고 모든 측면에서 그대를 능가하는 한 작업 속에 그대가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수많은 노동자의 무리 속의 한 노동자로 공사장 안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말이다. 과연 이런 활동의 수행 안에서, 그대 존재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고 간추리고 있기에. 그대는 아주 독특한 자격으로, 총체적 몸인 교회의 구성원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언제나 교회의 아들인 구성원이리는 자격으로 말씀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오로지 교회만이 말씀의 참다운 대화 상대자요 진정한 보관자이기 때문이다.(107)
✝️ 1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4월 성령 열매성월 1주간 온유 /절제✝️
금주간 성서읽기 사도 2장-6장
✝️ 1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당신을 홈숭하며 당신이 성체 안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에서 멀어져 당신의 어머니를 거부하고 교황을 받이들이지 않는 이들을 위해 전구합니다. 분란 중에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당신께 봉헌합니다. 공포와 불신을 퍼뜨리는 거짓 예언자들과 목격 증인들의 지도를 받는 모든 기도 모임을 맡기나이다.
당신의 교회가 세운 윤리의 기둥을 무너뜨리는 모든 이를 당신께 바치나이다. 자기 입맛에 맞는 성경 말씀을 선택하고 자신을 불펀하게 히는 것을 거부하는 모든 종파를 봉헌합니다.
그들에게 생령을 보내시고 교회 안에서 가르치고 설교하며 이끄는 예언자들을 일깨워 그들이 당신 진리를 온전히 가르치게 하소서. (당신이 만난 사람 중에 믿음이 약하거나 믿음을 상실한 이들을 기억하며 톡별히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축복기도
예언지들의 왕이신 예수님 당신은 길 · 진리 · 생명이십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마리아와 함께 성령 안에서 저를 치유하고 축복하며, 저희 자신과 가정 교회와 세상을 이끌어 비추어 주시기를 당신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성령님, 저희를 한껏 고무시켜 온 삶을 새롭게 하시고 지켜주시며 당신의 길을 따라 걷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세세에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189)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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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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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5.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학생 때, 방학을 맞이해서 본당에 있는데 사무장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상한 사람이 왔는데 조금 만나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님이었는데, 이 형제님께서는 스스로 ‘재림 예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신학생이면서 나를 못 알아보느냐?”
스스로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이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정말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믿지 않는 유다인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표징을 통해 충분히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 형제님은 자기를 믿으라고 말했지만, 보여 준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입으로만 믿으라고 말합니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연락받고 성당에 오신 그분의 부모님께서는 집에서도 자기가 예수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가족을 폭행했다고 하더군요. 알아보지 못해서 화가 난다며, 집안의 집기류를 집어던지고 욕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폭력적인 모습으로 오실까요?
과거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정신이상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스로 하느님이라는 예수님의 말을 도저히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봐야 했습니다. 그 행하신 일은 전혀 보려하지 않고 무조건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진리를 믿으려 들지 않는 유다인들을 향해 마지막 소리를 돋우어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쓰십니다. 믿음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로 올려져 생명을 얻게 될 것이며, 믿지 않음으로써 생명을 잃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믿기 힘들다면서 “당신이 누구요?”라고만 묻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한낱 갈릴래아 사람, 나자렛 예수 등으로만 알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틀 밖에 있는 예수님 모습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알려줘도 그들에게는 우이독경이라는 사자성어처럼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아버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믿으려 들지 않는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보낸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갖출 수 있도록 많은 사랑과 은총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과거 유다인들처럼 믿을 수 없는 이유만을 만들면서 주님 곁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의 구원도 멀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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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능력이 커질수록 고통을 느끼는 능력도 커진다(제니퍼 애니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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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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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5.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당신은 누구요?”(요한 8,25)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신원을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요한 8,25)
사실, 예수님께서는 앞 문장에서 이미 당신의 신원을 밝히셨습니다.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3)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을 두 가지로 밝히십니다.
<첫째>는 ‘위에서 온 분’으로, 곧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길은, 그가 어디서 왔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셨고 위에 계신 분께 속하시니, 분명 위에서 오신 하느님이시고, 위에 계신 분의 아들이신 성자이십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그리스도를 머리 위에 두고 사는 사람이니 그분께 속한 이요, 올리베따노 수도회에 속해 있으니 분명 올리베따노회 수도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둘째>는 ‘내가 나’라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이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을 계시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나는 나다.”(탈출 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당신 스스로를 일곱 번에 걸쳐 이렇게 계시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48).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한 15,1).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릴 때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그렇습니다. 진정,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 주님께서 “내가 나”이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입은 이 빛 안에서 사순의 길을 따라 갑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4-15).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주님!
제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하소서
제 머리 위에 항상 당신을 모시고, 당신께 속하게 하소서.
당신 품이 제가 살아가야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의 손길로, 저를 바꾸소서.
당신 빛으로, 제 안에 새겨진 당신 형상을 드러내소서.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전부이오니, 당신께만 속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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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5. 사순 제5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 마음과 하나 되길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고 기댈 곳이 있으면 다행입니다. 신뢰를 갖고 만날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통할 수 있다면 복입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호소하지 않아도 공감해 주고 배려하는 친구가 있다면 행운을 잡은 것입니다.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이웃을 만났다면 큰 기쁨입니다. 더군다나 침묵 중에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만난다면 더없이 행복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기왕이면 복을 만들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일과를 보내되 사람에게 기대지 말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엮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8,23).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마음과 열성을 다하여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아래에서 왔다고 아래 것만 생각하고 아랫것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갇히면 죽는 것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어 위로부터 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순응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며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8,29). 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되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아버지 마음에 드는 일을 함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된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그분 마음에 들어야겠습니다. 사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 21,2). 따라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원하는 일을 함으로써 마침내 그분과 하나 된 바오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미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 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6,5). 그러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나를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이사41,10).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어떤 아가씨가 길에서 요술 램프를 주웠답니다.
램프를 쓱쓱 문지르니 요정이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단, 한 가지만입니다.” 그 아가씨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돈도 가지고 싶고, 남자도 만나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선택할까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한 번에 다 말하면 되겠다!” 그래서 램프의 요정에게 말했습니다. “돈남자결혼!” 요정은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결국 아가씨는 ‘정신이 돈 남자와 결혼’을 하였답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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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5.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선을 향한 길에는 언제나 악에서 나온 장애물이 길을 불편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도 사탄의 사주를 받은 죄인들이 방해 공작을 폅니다. 모세는 파라오와 대결하면서 열 가지에 이르는 재앙의 기적으로 물리치고 겨우 이집트를 빠져 나왔지만, 정작 해방되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파라오 대결 못지않은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바로 양식도 없고 물도 없다고 불평하는 백성에다가 금송아지까지 만들어 경배하는 우상숭배 풍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옭아매어 죄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바리사이 유다인들의 피곤한 논쟁에 휘말리셨습니다. 아무리 기적을 보여주고 당신의 신원을 밝히셔도 막무가내로 당신의 신성을 부인하는 속물들이요 사탄의 사주를 받은 듯한 죄인들이었습니다.
모세의 경우에는 백성의 불평과 우상숭배에 대한 대책이 중재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직접 상대하신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 대해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시어 물려 죽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또 다시 모세에게 몰려와 하느님께 불뱀을 치워 달라고 중재 기도를 요청했고,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세우라는 응답을 들었습니다. 구리는 붉은 색을 띠는 금속이어서 불뱀과 색깔이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 처방이 그 천 년도 훨씬 지난 후 예수님 당시에는 십자가 처방의 예형이 되었습니다. 바리사이 유다인들의 피곤한 유혹과 막무가내식 논쟁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은 그들의 기대와 음모에 휘말려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현실적인 권력과 영향력은 그들에게 있었기에 예수님은 기어코 그들의 음모에 따라 신성모독과 성전모독의 혐의를 뒤집어쓰시게 되었고, 곧 이어 유다인들의 왕이 되려 했다는 반역 혐의까지 뒤집어쓰시고 십자가형을 선고받으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의 운명을 예감하신 듯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과연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높이 달리셨고 죽음을 당하신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도 바리사이 유다인들은 그분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높이 달리신 이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이 자신들의 음모를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신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처방, 즉 십자가를 받아들이시는 믿음은 사탄의 사주를 받는 줄도 모르고 죄를 저지르는 그들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으로 예수님의 이 처방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믿는 이들에게서 효험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깨달은 이 처방은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자기비허의 삶이 세상의 죄를 없앨 수 있다는 십자가의 신비였습니다. 또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이야말로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 나는 부활의 신비라는 것도 동시에 얻게 된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세 시대에 구리 뱀이 불뱀에게 물린 상처를 낫게 해 주었듯이, 십자가를 쳐다보는 신약 시대의 처방이 예수님의 신성을 몰라 보고 죄를 저지르는 죄악의 벌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이렇게 되면 악은 더 이상 선의 방해물이 아니라 디딤돌로 작용합니다. 마치 십자가가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되듯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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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5.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었습니다. 세계명작 동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자인 마크 트웨인은 가난한 이, 흑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았음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1905년 미국은 일본과 조약을 맺었습니다. 유명한 ‘가쓰라 태프트’조약입니다. 이 조약을 통해서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고, 미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하였습니다. 미국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 젊은이들을 필리핀으로 보냈습니다. 젊은이들을 보내기 전에 교회는 ‘전쟁을 위한 기도’를 바쳤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젊은이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모두가 안전하게 돌아 올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필리핀에는 많은 전쟁고아와 과부들이 생겼습니다. 미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필리핀의 젊은이들이 무참하게 죽어갔습니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일본과의 을사늑약을 통해서 외교권이 박탈되었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또 다른 의미의 전쟁의 기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 우리 주 신이시여! 주님을 경모하는 우리를 위해 저들의 소망을 산산이 날려 버리시고 저들의 생명을 시들게 하시고 저들의 비참한 순례가 끝나지 않게 하시고 저들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시고 저들의 눈물로 저들의 길을 젖게 하시고 저들의 상처투성이 발에서 흐르는 피로 흰 눈을 얼룩지게 하소서. 우리는 그것을 바라나이다. 사랑의 정신으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께. 곤고한 처지에 놓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겸허히 당신의 도움을 청하는 모든 이에게 항상 믿음직한 피난처요 친구이신 주님께. 아멘.” 마크 트웨인 사후에야 출간될 수 있었던 이 도전적인 이야기는 ‘거대한 흥분이 들끓어 오는 시대’가 묘사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진정 전쟁의 기도는 ‘적들이 갈기갈기 찢기고, 부상병들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게 되는 것이며, 죽은 아들을 부여잡은 어머니의 울부짖음’이며, 또한 ‘적군의 아이들이 고아가 되며 생명이 시들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후각은 개보다 못합니다. 표범보다 빨리 달리지 못합니다. 시력은 독수리보다 못합니다. 지구별에 살아온 시간도 인간은 다른 종보다 훨씬 짧습니다. 생각하고, 도구를 사용하여 문명을 만들었다는 것이 만물의 영장이 된다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월주의는 다른 종들을 무참하게 죽이고 말았습니다. 같은 종인 인간끼리도 폭력과 전쟁으로 서로 죽이고, 죽었습니다. 인간은 혼인 잔치에 가장 늦게 초대된 손님일 뿐입니다. 같이 초대된 다른 종들을 죽이고, 혼인 잔치의 상을 엎어버리는 것은 손님으로서 할 행동이 아닙니다. 진화는 인간이라는 고등 동물을 향한 과정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하며,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진화의 방향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운 마음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모든 생명을 형제요 자매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순시기’을 보내면서, 우리의 신앙에는 반드시 양면, 즉 고통과 기쁨, 빛과 어둠, 죽음과 부활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기쁨을 알 수 없고, 어둠이 없다면 빛을 분간할 수 없으며,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의 생활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편안한 삶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광야를 건너지 않고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는 구리 뱀을 나무에 매달아 그 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치유를 받게 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의 삶을 인정하고 약속의 땅을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요르단의 끝에 가면 바로 앞에 요르단 계곡이 있으며 그 계곡을 넘으면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바로 눈앞에 두고 불평과 원망을 하였던 것입니다. 요르단 계곡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구리 뱀을 두른 십자가가 있으며, 기념성당도 있습니다. 이제 사순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정성을 다해, 주님 수난의 길에 함께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 기도를 들으소서. 제 부르짖음이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곤경의 날에,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당신 귀를 제게 기울이소서. 제가 부르짖을 때 어서 대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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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5. 사순 제5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신원
- 예수님 믿음, 예수님 따름, 예수님 닮음 -
예수님은 누구인가?
우리가 평생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묻고 찾으며 알고 믿고 닮아가야 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역설적으로 ‘참내(眞我)’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다음 바리사이들에 대한 말씀은 그대로 세례 받기전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바로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이란 말마디에서 예수님의 신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계시된 하느님처럼, 예수님은 성부와 같은 신적 차원의 존재이기에 절대적으로 성실하시고 또 믿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런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영원히 아래에서 와서 세상에 속해 살다가 죄 속에 죽을 수 뿐이 없을 것입니다. 이어 밝혀지는 예수님의 신원도 은혜롭습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님을 따라 사는 우리의 고백으로 삼고 싶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참으로 하느님 말씀 공부에 열중함으로 주님과 일치의 관상적 삶을 살 때 이를 수 있는 경지의 고백일 것입니다. 어제 예수님의 명언의 진리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세상의 빛으로 자기를 계시하신 주님이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늘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바로 세상의 빛인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만이 어둠과 죽음의 영역에서 벗어나 빛과 생명의 구원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는 어둠과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감을 뜻하고, 죽는다는 것은 그런 영역으로 영원히 빠져버림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어둠과 죽음에 빠진 죄인들의 모습이 오늘 제1독서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모세의 영도하에 어둠과 죽음의 땅을 상징하는 이집트를 탈출하여 ‘자유의 여정’에 오른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련에 직면하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사라져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과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그대로 우리 인간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세례받았다 하여 저절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 아니라 은총과 더불어 부단한 분투의 노력이 삶이 있어야 함을 봅니다. 여기서 중재자 모세는 그대로 예수님의 예표처럼 보입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 것 없는 양식은 진저리가 나오.”
과거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를 까맣게 잊은 참으로 배은망덕한 백성들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늘 기억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찬미와 감사로 표현되기 마련인데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은, 찬미와 감사는 완전히 실종된 모습입니다. 정말 깨어 살지 않으면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도 이렇게 죄 속에 떨어질 수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믿는 자들에게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불평의 죄로 죽어가던 백성들의 간청에 모세는 하느님께 기도드렸고 주님은 기꺼이 응답해 주십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불평의 죄입니다. 모세에 대한 하느님의 신뢰와 사랑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모세는 즉시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위에 달아 놓았고, 뱀에 물린 사람마다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납니다. 그대로 기둥 위에 달린 구리 뱀이 상징하는 바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여기 제대 뒷면 벽에 높이 달린 ‘예수님의 십자가’야 말로 영원한 믿음의 표지, 회개의 표지, 희망의 표지, 구원의 표지임을 깨닫습니다.
어둠과 죄에서 벗어나 생명과 빛의 구원을 살게 하는 십자가의 예수님 은총입니다. 참으로 우러러 바라볼 대상이, 십자가의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예수님의 신원은 죽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계시됩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 아니라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이 신적 존재임을, 하느님이심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이런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예수님처럼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이미 지상에서 천상의 구원과 행복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저절로 솟아나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예수님처럼 살아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 참 행복의 구원의 길인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과 하나될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다음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 말미의 예수님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으로 삼고 싶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또한 예수님의 고백처럼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예수님의 다음 예언이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12,3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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