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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지고 받은 복
창 32: 22-32
영국에 “여우 굴에 들어가서 무신론자가 되는 사람은 없다(There are no atheist in fox's hole)”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이 여우 굴에 갇혀서 여우들이 잡아먹으려고 달려들면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은 여우 굴에 들어간 것과 같은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20년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이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20년 전에 그가 심었던 것을 거두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400명의 군인을 이끌고 극도의 분노심을 가지고 달려오는 형 에서를 만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에서는 어떤 사람입니까? 야곱이 지금까지 소중하게 키워왔던 것을 하루아침에 다 절단 내고도 남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리고는 여우 굴에 들어간 사람처럼 기도했습니다. 창세기 32장 1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문제를 제거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원수인 에서를 쳐서 무너뜨린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야곱의 원수가 되어서 야곱의 자아를 깨뜨려버리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야곱을 도우시긴 도우셨는데, 외부적인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신 것이 아니고 야곱 자신의 죄성과 자아를 깨뜨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처절히 부수시고 그 다음에 복을 주신 것입니다.
깨어진다고 하는 것은 축복의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은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크게 쓰시지 않습니다. 능력이 많아도 깨지지 않은 사람은 쓰시지 않습니다. 구름이 깨져야 비를 내리고, 곡물이 깨져야 맛있는 음식이 됩니다. 향유를 담은 옥합도 깨져야 향유 냄새를 내고, 기드온의 삼백 용사들도 항아리를 깨어버릴 때에 그 항아리 안에 있던 횃불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죄성과 자아는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죄성과 자아가 깨어질 때에는 두 가지 절차를 밟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위대한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지식이 연관이 되어서 사람은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
1. 끈질긴 죄성을 인정해야 깨집니다.
사람이 깨어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끈질긴 죄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깨어져야 할 죄인이구나’라는 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그 때부터 체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잔꾀가 많은 사람입니다.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서 자신의 잔꾀를 다 부립니다. 짐승을 두 떼로 나눕니다. 한 떼를 형이 치면 다른 한 떼를 가지고 도망가서 자신의 살 궁리를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마하나임’이라고 짓습니다.
마하나임은 히브리어로 ‘두 떼’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두 떼로 나눈 뒤에 한 떼에 여러 종을 붙이고 이것도 여러 떼로 나눕니다. 그리고 이 종들에게 형 에서가 물어볼 것에 대비한 대답도 준비시킵니다. “너희는 누구며, 이 짐승들은 무엇이냐?”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주의 종 야곱의 것이며 자기 형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준비를 다 마치고 야곱은 잠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잠이 오질 않습니다. 22절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밤에 일어나”입니다.
이렇게 일어난 야곱은 가족들도 다 깨웁니다. 그리고는 가축 떼와 함께 모두 다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합니다. 야곱은 모든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뒤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야곱을 붙잡습니다. 아마 야곱은 ‘에서가 보낸 암살범이 아닐까? 산적, 도적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순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이 부분을 놓고 많은 설교자들이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했다”라고 설교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붙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격자시고, 야곱은 방어자가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야곱을 공격하셨습니까? 그 목적은 야곱을 깨뜨리시기 위함입니다. 야곱을 부서뜨리기 위함입니다.
야곱의 죄성과 자아를 깨뜨리시기 위함입니다. 야곱은 이 상황에 오기 전까지 ‘나의 원수는 나를 죽이려 하는 형 에서와 나의 재물을 빼앗으려고 하는 외삼촌 라반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얍복 강가에 홀로 남은 야곱은 그것이 틀린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내 원수요, 내 대적이구나. 진짜 내 원수는 내 안에 있는 죄성과 나의 타락된 본성, 나의 깨지지 않은 자아, 교만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 정도는 0.1초에 부러뜨릴 수 있습니다.
환도뼈 정도는 문제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과 날이 새려 할 때까지 씨름을 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를 많이 했다’라는 의미이기보다 ‘야곱의 죄성이 얼마나 끈질긴 것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제 날이 새려하니 하나님께서 “나는 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날이 새서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면 야곱은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캄캄한 데서 씨름을 한 것입니다.
떠나시면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시니 환도뼈가 위골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이 때 이 분이 하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붙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에 맞지 않은 질문을 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본성을 나타냅니다.
야곱이 대답합니다. “야곱이니이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나는 사기꾼이요, 형 에서의 발목을 잡은 자요, 남의 것을 빼앗는 찬탈자요, 모사꾼입니다!’라고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고 고백을 하게 되자 그 때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되는 전기는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2. 나의 죄성을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시는데 먼저 ‘이스라엘’이라고 이름부터 바꿔주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딱 한가지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 죄성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는 사람은 형 에서와 겨루어도 이기는 것이고, 누구와 겨루어도 이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내가 겪고 있는 문제, 고통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내가 사기꾼이요, 내가 위선자요, 내 안에 끈질긴 죄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가슴을 칠 때 우리 삶에 축복의 문은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서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지 꽤 괜찮은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TV에서 ‘다이하드’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다이하드’는 ‘죽기가 어렵다’는 뜻인데, 영화 제목처럼 주인공은 어마어마한 폭탄이 터져도 죽지 않고, 사고가 나도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다이하드’입니다. 절대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죄성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3. 깨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깨어지는 과정에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바른 인정이 있게 됩니다. 야곱은 환도뼈(엉덩이, Hip)가 위골되기 전에 하나님과 대등한 힘으로 겨루고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날이 새려고 하자 하나님의 가벼운 터치로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깨지기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는 존재입니다. 대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자기와 동행하는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합니다.
순종을 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감사해야 하고, 불순종해도 “그렇구나”하고 그저 수염이나 만지는 존재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인지 모른 채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잠깐만 손을 대셔도 인간은 금방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왕을 지내고 최고의 영예를 누렸지만 인생 말년에 건강을 잃고 연약해졌을 때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시편 39편 11절에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 뿐이니이다.” 영어 성경에는 “each man is but a breath, 각 사람은 한 번 쉬는 숨에 불과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강성할 때는 연약함을 몰랐으나 노년에 이르러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자신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환도뼈가 위골되고 나서야 자기가 씨름한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이제는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호세아 12장 4절에 “그는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었을 때 “내일 형 에서를 만나야 되는데 나를 쳐서 이렇게 절게 만드시면 내가 싸울 수도 없고, 도망할 수도 없는데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 불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제는 내 힘으로 안 되는구나’라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붙든 것입니다. “당신이 네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내가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이 가지 아니하시면 날이 밝을 때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어 죽게 되지만 그래도 못 가게 합니다. 이것은 죽기 살기로 축복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내 능력으로 안 되고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축복으로만 살 수 있겠다’해서 하나님을 붙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참된 기도가 나옵니다. 우리 자신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바로 알 때 우리는 참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깨진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축복하십니까? 깨진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사도 베드로도 얼마나 자신만만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다고 했을 때 “주여, 그리 마옵소서!”하며 예수님을 꾸짖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 떠날 것이다”라고 하셨을 때도 마태복음 26장 33절에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35절에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 날 밤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난 후에 깨져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베드로를 이방인의 큰 사도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된 후에 더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이미 환도뼈가 위골된 야곱을 하나님을 가볍게 물리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붙드는 것을 뿌리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그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시며 축복하시고, 처절하게 패배한 야곱에게 도리어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하시며 승리자의 이름을 붙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야곱이 무엇을 이겼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야곱과 싸우셔서 질 리가 있는가?’라며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항상 의아했습니다만 어제 이 말씀을 깨닫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제 막내 아들이 미국에 갔는데 맹장염이 생겨서 수술을 하고 무사히 귀국을 했는데 체스 판을 사 가지고 왔습니다. 저와 같이 게임을 했습니다. 제가 상대도 되지 않게 이기지만 쓸데없는 수를 두어서 한 수 차이로 져 주었습니다. 이길 수 있지만 져준 것입니다. 수술도 하고 왔는데 격려해 주려고 져 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이렇게 깨진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을 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름을 묻느냐?”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아니하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면 나중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처럼 위기 상황에서도 이기심을 가진 존재요,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름을 알려 주시지 아니하셨지만 지금 우리는 그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위대한 이름 ‘예수’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구약 시대 성육신하기 이전에 나타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양치는 목자들에게는 이런 행습이 있습니다. 양이 낭떠러지를 가다가 밑에 맛있는 풀이 있으면 1m정도는 폴짝 뛰어내립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더 큰 낭떠러지가 있습니다. 문제는 풀을 다 뜯어 먹고 난 뒤에 뛰어 내린 1m를 다시 기어오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 목자가 잡고 올라오라는 의미에서 로프를 던지면 자신을 잡으려는 줄 알고 오히려 낭떠러지로 뛰어 내려버립니다.
때문에 목자는 이런 상황이 생기면 양이 배가 고파 힘을 다 소진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기진맥진할 때 로프를 던져 양의 몸을 감아 건져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방법은 이와 같이 자아가 깨지고 부서진 후에 “축복의 근원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성공하는 능력의 비결입니다.
(결론)
이곳에 모인 여러분에게 인생의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핑계대거나 원망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원수는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곧은 머리와 곧은 목, 교만한 마음과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면 그것이 바로 원수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참된 원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깨지지 않고는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원수가 깨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또한 야곱처럼 하나님과 일대일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복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 인간은 진실해지며, 자신의 죄악된 모습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 이 일대일의 교제에서 승리하는 사람에게 다른 문제는 햇빛에 눈 녹듯이 다 녹아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인생의 얍복강 가에서
창 32: 22-32
창세기 12장에서 50장까지 긴 성경 이야기에 주인공은 네 명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믿음의 가계(家系)를 이어갔던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 가장 존경받을만한 인물이 못된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야곱은 철저하게 자기 이름처럼 산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는 자’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번역을 하면 “약탈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그 이름의 뜻처럼 ‘속이는 자’요, ‘약탈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믿음의 조상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들먹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고 노력하며 세상을 살아 왔습니다. 철저하게 인간적인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이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야곱은 형 에서에게 뒤지는 게 싫어서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장자로 태어나지 못한 한(限)이 야곱으로 하여금 형 에서의 장자권을 가로채게 만들었습니다. 형 에서가 사냥을 하고 돌아온 배고픈 틈을 이용해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가로채버린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그는 어머니 리브가와 짜고서 눈이 잘 보이지 않은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가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기도 했습니다.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남보다 더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피를 나눈 쌍둥이 형에게조차 팥죽 한 그릇을 그냥주지 않고, 아버지를 속이는 것쯤은 전혀 문제되지 않게 산 사람이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결국 야곱은 형 에서의 분노를 사서 고향 땅을 떠나 멀리 외삼촌의 집에서 20년 동안 방랑자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도 야곱의 야망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던 첫날밤에 벧엘이라는 곳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 꿈을 꾸게 됩니다. 그 꿈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듣고 꿈에서 깬 야곱은 자기가 베고 잤던 돌베개로 기둥을 세우고, 이렇게 서원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 28:20-22)
여러분, 이 서원이 굉장히 아름다운 신앙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 이런 야곱의 서원 속에도 야곱의 욕심과 야망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셔서 내가 잘 되면 내가 하나님께 십일조도 바치고 하나님을 잘 섬기겠습니다.’ 그런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잘 해 주시면 나도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시면 나도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야곱의 기도는 결코 아름다운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흥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야곱처럼 기도하고 야곱처럼 신앙생활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잘 해 주시면 나도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십일조도 하고 봉사도 하고 헌신도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하는 것을 마치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바른 신앙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잘 해 주셔야만 우리도 신앙생활 잘 하겠다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일 뿐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고난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겠노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을 얻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빈궁한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신앙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이기적인 신앙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야곱은 철저하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그게 품삯을 주지 않기 위해서 야곱을 이용해먹는 외삼촌 라반에게서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인간적인 술수와 방법을 다 동원해서 굉장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가정도 꾸몄습니다. 성공하겠다는 야망을 이루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인간적인 술수와 방법을 이겨낼 수 없었던 라반의 식구들은 야곱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세월이 20년이나 되었습니다.
그곳에 더 있다가는 생명이 위태롭다고 위기를 느끼는 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라반의 집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었습니다. 20년 동안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았던 야곱의 품에는 굉장히 많은 것들이 들려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정주영씨처럼 성공신화를 만들어내고서, 의기양양하게 고향땅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네 명의 아내와 12명의 자녀들, 그리고 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와 나귀와 양떼들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게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형 에서와의 관계입니다. 20년 전에 형이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것 때문에 자신을 죽이겠다고 살기가 가득했던 형이 자신을 어떻게 맞아줄지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도 야곱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32:3절 이하에 그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야곱은 먼저 자기 종들을 형에게 보냅니다. 소와 나귀와 양떼와 심지어 노비까지 잔뜩 뇌물을 주어서 형의 환심을 사려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마음이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을 살아 보니까 재물이 제일이야!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어? 아마도 형이 이 뇌물을 받으면 20년 전의 일은 다 없던 것으로 하고 나를 기쁘게 맞아줄 거야.’
그런데 형 에서에게 다녀온 사신의 보고에 따르면 형의 마음이 누그러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오히려 400명이나 되는 군사를 이끌고 야곱을 맞으러 온다는 것입니다.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큰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 가운데 가장 큰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그는 그 위기를 풀어가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방법으로 풀려지지 않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다고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만은 그렇게 만만하게 문제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술수가, 자기의 인간적인 방법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방법이 통하지 않자, 야곱은 두려워서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32:7절에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게 바로 당시 야곱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표현한 말입니다. 인간적인 술수로 치자면 자기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왔는데, 에서의 문제 앞에서는 자기의 인간적인 방법이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비록 재산은 많이 모았지만, 400명의 군사와 싸울만한 힘이 없기에 형 에서와 맞닥뜨리면 자신은 형의 칼날에 죽는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그러니 두렵고 답답하여 미칠 지경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다급해진 야곱은 또다시 인간적인 술수를 씁니다. 자기의 많은 재산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한 떼는 앞서게 하고, 다른 한 떼는 많은 간격을 두고 뒤따르게 했습니다. 형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공경해온다 하더라도 절반만이라도 건져보자는 심사입니다.
그래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방법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32:9-12절에서 야곱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때 야곱이 드린 기도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은혜로 이렇게 많은 축복을 받았는데 지금 형 에서가 나를 치려고 군사를 이끌고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족속으로 바다의 모래 같게 하리라’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나를 죽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나를 건져주소서.”
그런데 기도를 해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인간적인 방법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형 에서에게 보낸 뇌물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형이 화를 풀지 않은 것인가? 그러면 더 많은 뇌물을 보내야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는 더 많은 뇌물을 준비했습니다. 그 뇌물은 엄청나게 많은 것이었습니다. 32:14-15절을 보세요. 암염소가 200마리, 수염소가 20마리, 암양이 200마리, 수양이 20마리, 젖 나는 약대 30마리, 암소가 40마리, 황소가 10마리, 암나귀 20마리 등.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그 많은 것을 한꺼번에 에서에게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인데 그것을 한꺼번에 주겠습니까? 먼저 암염소 200마리와 수염소를 보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암양과 수양을, 그 다음에는 약대. 그렇게 해서 차례 차례로 그 많은 예물을 보냈습니다. 그런 뇌물을 받다보면 형 에서의 마음이 한결 누그러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가축 떼를 이끌고 간 종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합니다. “이것은 주의 종 야곱이 자기 주인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입니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야곱이 자기가 살기 위해서 얼마나 비굴해지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형 에서에게 “주”라고 부르고, 자기를 “주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당시에 ‘주와 종’이란 말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또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만 쓸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형 에서를 주라고 부르고, 자신을 에서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비열한 방법까지 동원하여 살아남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방법들을 동원해 보았지만, 여전히 야곱의 마음은 두려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해도, 우리 인간의 방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우리의 마음에서 두려움과 답답함을 쫓아낼 수가 없습니다.
야곱을 보세요.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술수를 잘 쓰는 사람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대단한 성공을 이룰 수 있고, 또 이루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야곱조차도 자기의 지혜와 자기의 방법을 다 동원해 위기에 대처해 보았지만, 여전히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야곱에게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기도했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의 가족들까지 모두 모두 얍복강을 건너게 한 후에 얍복강 가에 홀로 남아서 하나님과 씨름하게 됩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얍복강 가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자리입니다. 더 이상 인간의 지혜나 인간적인 방법이 통하지 않는 막다른 골목입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동안 쌓아놓았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됩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절대절명의 상황 속에서 야곱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을 붙잡는 것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바로 이 얍복강 가에로 몰고 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고향을 떠나올 때부터 끊임없이 야곱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다가 실패하고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친히 개입하셔서 그의 길을 열어주시고, 그가 낙담하지 않도록 도우셨습니다.
형 에서의 낯을 피해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칠 때에도, 첫날밤에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한번도 고향을 떠나보지 않았던 젊은 야곱이, 어머니의 치마폭에 쌓여 살아오던 마마보이와 같은 야곱이 고향을 떠나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먼 하란까지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안하고 두려움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내가 너와 함께 하겠노라’고 분명하게 약속해 주심으로 야곱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20년 동안 하란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재산을 모았을 때 야곱은 외삼촌의 가족들이 자기를 미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 땅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야반도주하는 것을 보고 뒤쫓아온 라반에게 야곱을 해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향 땅에 가까웠을 때에 (오늘 본문 바로 앞에 32: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이 ‘마하나임’이라는 ‘하나님의 군대’를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군대를 보내셔서 야곱을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고 힘을 주신 것입니다. 만일 야곱이 인간적인 계산 방법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않고 신앙으로 풀어가려고 했다면, 고향 땅으로 가던 길목에서 만난 하나님의 군대가 자신과 함께 있음을 깨닫고, 에서가 데리고 온 군사 400명 쯤은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언제나 자기의 머리만 믿고, 자기의 인간적인 방법만을 앞세우다보니 하나님의 군대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얍복강 가에서 처절한 절망에 몸서리를 처야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얍복강 가에 홀로 남게 하심으로 야곱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법들을 깨뜨리게 만드셨습니다. 더 이상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삶을 지탱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뼈저리게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내 인생에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시도록 얍복강 가로 야곱을 몰아오신 것입니다.
야곱은 그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아니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자신의 모든 것이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성공했던 자신의 삶과 욕망을 한꺼번에 잃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를 절대로 놓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위골되었습니다. 뼈가 부러져도 절대로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장면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위는 온통 어두움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캄캄한 밤입니다. 싸늘한 강바람이 살을 에는 듯이 불어옵니다. 여기 저기에서 맹수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날이 새면 만나게 될 형 에서였습니다.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는 형 에서는 만나면 이제 자신은 끝장이 날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하면서 ‘축복해 주지 않으면 절대로 놓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다른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얍복강 가에서 야곱은 자신을 철저하게 깨뜨렸던 것입니다. 자신이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방법과 인간적인 삶이 더 이상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야곱에게 그걸 바라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머리, 우리의 경험, 우리의 지혜, 우리의 인간적인 방법들을 포기할 때까지 우리에게 축복하시기를 미루시기도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가운데 혹 아무리 노력을 해보아도 풀려지지 않는 문제와 해결되지 않는 삶의 걱정거리, 마음 속에 두려움 때문에 힘든 분이 계십니까? 그건 우리가 지금 야곱처럼 우리 인생의 얍복강 가에 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의 방법과 우리의 지혜를 철저하게 포기하고 깨뜨려야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야망을 포기하고 우리 인간적인 생각을 깨뜨리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품 안에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삶의 지혜나 방법을 포기하고 깨뜨린다고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은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민속 씨름하는 것처럼 한 5분 하고 끝나는 씨름이 아닙니다. 한두 시간으로 끝내는 씨름도 아닙니다. 밤새도록 해야 했던 씨름입니다. 더구나 뼈가 부러질 정도로 처절한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그렇게 오래토록, 그렇게 처절하게 씨름하셨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야곱의 그 인간적인 계산 방법, 인간적인 지혜로 살아온 삶의 방법들이 깨뜨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 우리 가운데 아직까지 내 삶의 문제, 도저히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끌어안고 씨름하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우리의 방법을 깨뜨리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우리의 지혜와 우리의 인간적인 방법이 깨뜨려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다”는 뜻입니다.
물론 야곱이 이긴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깨어지고 야곱이 포기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야곱이 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방법을 깨뜨리고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포기할 때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야곱이 자신을 깨뜨리고, 자신의 인간적인 삶의 방법이 포기되자, 절망의 자리였던 얍복강 가가 ‘브니엘’로 바뀌었습니다. 브니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고 지켜주신다는 승리의 자리입니다.
우리 자신을 깨뜨리는 바로 그 자리가 우리에게 브니엘이 됩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방법과 인간적인 욕망에 하나님 앞에서 깨뜨려질 때,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여 비추사 평강 주시고 복을 주시는 자리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브니엘을 떠날 때에 “해가 돋았다”고 말씀합니다. 브니엘에서 만난 아침 해는 희망입니다. 바로 어제 저녁 얍복강 가에서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맞았던 ‘밤’과는 대조를 이루는 희망입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평강입니다. 답답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형통함을 뜻합니다. 그래서 33장에 보면 야곱와 에서가 만나 서로 목을 끌어안고 뜨거운 상봉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나를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는데, 브니엘의 아침햇살을 받으며 브니엘을 떠나 에서를 만났을 때에는 이산가족이 만난 것처럼 뜨거운 눈물이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지는 것은 수치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날마다 굴복하며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기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쳐서 복종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인생을 승리하며 사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깨뜨리실 때 우리 인생의 길목에서 만나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뜨리시기 전에 우리가 먼저 스스로 우리의 욕망과 인간적인 생각들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래야 야곱과 같은 두렵고 답답한 일을 피하여 의와 평강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얍복강 가에 섰을 때에,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깨뜨리심으로 두려움의 얍복강 가가 축복의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브니엘이 되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얍복강 가는 두려움과 답답함이 몰려오는 밤이었지만, 하나님의 얼굴인 브니엘은 희망의 아침 해가 솟아나는 축복의 자리입니다.
여러분, 두려움의 얍복강 가에서 우리의 인생을 축복의 브니엘, 희망의 아침 해가 솟아오르는 브니엘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내 방법과 내 야망을 철저하게 깨뜨리고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축복이 있습니다. 그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