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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악의 결정을 했을 때(롬 5장17-21)
성경본문:로마서 5:17-21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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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자유! 그러나…
누구나가 옳은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심각한 것은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이죠.
우리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습니까?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도 죄를 짓겠다고 작정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의 삶에서 최선의 길을 찾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잊어버린 인간의 선택과 인간의 노력은 비극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슬퍼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2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인간이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만족을 구해도 “터진 웅덩이”는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안 되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대부분 사람은 기도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주 잘하려고 하니까 더 기도가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따져보면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더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아주 잘하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는 엄마 아빠에게 말할 때, "내가 어떤 단어를 구사해서 말할까, 어떻게 멋있게 말할까?"라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장황한 웅변보다는 단순하고 짧은 기도를 더 원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토저'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너무 유창할 때쯤이 되면 그것은 사실 자기에게 기도하는 것이다"
한 번쯤 음미해 볼 만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선택의 순간을 생각해보세요.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는가?'
인간적인 선택을 하면 인간적인 결과를 얻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선택을 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인간의 근본적인 선택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성경에 나와 있는 한 사람의 선택을 먼저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선택의 순간”을 생각하고 말씀을 준비할 때, 떠오른 사람이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는 “선택을 기점”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조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선택했던 곳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그의 인생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던 선택이 있었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아브라함을 떠나간 선택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통해 보는 롯의 선택 중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인생을 결정한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 간 것입니다. 또한, 그의 인생에 가장 불행한 선택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을 떠나간 일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롯의 하인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 것 때문에, 그는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과 고모라로 갑니다.
다툼은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떠나갈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 가운데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선택으로 말미암은 삶의 결과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진 후에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구절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문란한 삶에 젖어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죄 가운데 하나님의 회복하시는 은혜가 임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사람을 선택하는 일, 우리의 일터를 선택하는 일, 그 가운데 무엇이 있었는가?
오늘 말씀은 자신의 인생에서 잘못된 선택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 실수로 실패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답을 하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인생은 한 번의 실수와 잘못된 결정으로 망가지고 마는 것일까요?
우리 인생의 문제는 선택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나, 그 결과에 대하여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단지 선택의 결과일 뿐.
우리가 매일 내려야 하는 결정이 최선의 결정일 때도 최악의 결정일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인 오늘 우리가 내린 결정이 우리 삶의 발자취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인류의 조상인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 합니다. 우리의 삶을 죽음이 지배하게 된 것이죠. 영원한 생명이 없는 한 죽음은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왜 인류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요?
두 사람을 보세요. 정말 완벽하지 않습니까?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먹는 것이 해결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었고, 다른 남자와 여자의 유혹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부부.
그들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결국, 잘못된 선택은 잘못된 환경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죠.
성경에 보면 사탄은 뱀으로 위장을 하고 하와에게 접근합니다. 아주 전형적인 사탄의 방법인데, 하와가 지금까지 누리는 온갖 종류의 풍족한 환경에서 시선을 돌려,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 합니다. 동산 정원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면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부추기지요. 그 순간 자신이 누리는 축복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은 축복을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축복에 무감각해진 인생!”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서 불평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에게 만나의 축복보다는 고기를 먹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하며 노예생활 하던 때를 추억하기 시작하며 은혜를 잃어버린 것이죠.
“본능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 이유로 말입니다.”
결국, 잘못된 삶의 선택은 환경의 문제라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욕망을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한 결과일 뿐입니다.”
사단은 늘 우리에게 그렇게 속삭입니다.
“본능대로 행동해! 좋아 보이는 일이 어떻게 나쁜 일이겠어?”
“행복한 것과 옳은 일은 다른 것이다!”
물론 자기 감정에 충실하다고 다 잘못되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에 욕망이 더해지는 순간 우리는 종종 쉬운 길을 택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본문 17-19절을 보세요.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한 사람의 범죄”가 무엇인가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분명한 것은 욕망에 충실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는 쉬운 길이라는 것이죠. 욕망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 5절에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된다.”라는 것을 잊어버렸죠.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간에게 악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순종하는 순간 늘 선한 일을 하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악한 것을 보지 않는 인간이 어떻게 죄를 짓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처럼 능력이 없는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어 선과 악을 보게 된 것입니다.
순종에서 멀어지는 순간 인간은 이제 “욕망”과 “순종” 사이에서 늘 갈등하는 존재가 된 것이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간으로 있을 때는 그런 갈등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간이었을 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한 인간들에게 욕망은 이제 늘 갈등, 선과 악의 대립이 된 것이죠.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이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과 순종 사이에서 갈등하며, 선택해야 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선과 악을 다 아는 인간들이 “죄악 된 인간의 본성이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고 속삭이는 사탄의 소리를 듣고, 그 거짓말을 믿고 싶어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인간에게는 결정적으로 옳을 일을 행하며, 욕망을 이길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이제 아담과 하와는 다시는 낙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욕정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잘못된 잠자리를 한 남녀에게 순결함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잘못된 욕심으로 잘못된 투자를 한 일로 날아간 돈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꾐에 빠져 잘못된 보증을 서고 날아가 버린 집이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부모와 주변의 충고를 듣지 않고 한 결혼생활로 파탄에 빠진 사람들이 아무리 후회해도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완벽할 수 없는 인간들은, 욕망에 넘어진 인간들은 늘 “후회”라는 것을 달고 살아갑니다.
수치심을 몰랐던 아담과 하와는 범죄 한 후 정원의 나무 사이로 몸을 숨겼습니다.
수치심을 몰랐던 그들이, 수치심의 무게에 눌리고 괴로워하게 된 것이죠.
“수치심”의 문제는 그것을 누구에게도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숨으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숨으려는 속내는 “책임지지 않겠다!”라는 것이죠. 결국, 책임지지 않으려는 우리의 죄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망가뜨리는 일,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누군가를 모함해야 하는 것.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문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하나님께 돌아가는 방법을 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숨기에 급급했습니다. 늘 그랬듯이 그들을 찾아 먼저 나선 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정원을 거니시며, 수치스러워 숨어 있는 두 사람을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둘을 찾아 나선 하나님의 행보는 그들을 구속하시기를 원하시는 첫걸음이었습니다.
다행스러운 타락
존 밀턴은 [실낙원]에서 이것을 ‘다행스러운 타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셨지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놀라운 소망을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결정 자체를 돌이킬 수 없지만, 그 결정을 회복할 수 있다.”라는 것이죠.
다시 본문 18절을 봅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은 그들이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을 보셨습니다. 잠시 수치를 가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온전하게 가릴 수도 없고, 시간이 지나며 잎이 시들어 다시 수치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 가죽이 어디에서 났을까요? 아마도 벌판의 어떤 짐승을 잡아 죽였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피를 흘려야 했던 것이죠.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결국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실 것을 이미 예표하신 것이죠.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회복”은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가려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마치 이런 비유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패인 웅덩이가 있는 길일 지라도, 한밤에 가득 쌓인 눈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후회하는 상처들이 가려지고 회복될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것입니다.
어윈 루처의 책 [회복의 하나님을 붙들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외도를 하다가 발각이 되어 강제로 사임을 해야 했던 한 사역자 친구가 내게 털어놓은 말이다.
“양파 껍질을 벗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양파 껍질을 한 겹 한 겹 계속 벗겨 내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그런 양파처럼 제게도 하나님과 저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수치심 때문에 알고 지냈던 친구들과도 모두 절연했습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고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습니다. 사람들이 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도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침마다 일어나면 어떻게 하루를 살아야 할지 막막한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하루는 그의 차에 함께 타게 되었다. 그가 찬송가 CD를 틀었고 함께 그 음악을 듣는 가운데 그는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갈보리에서 그 모든 것을 묻었네.
죄로 얼룩진 내 과거도 함께 묻었고
죄책감과 절망도 함께 묻었네.
예수께서 그 갈보리에서 자기 몸으로 그 모든 것을 묻으셨네.
갈보리에서 그 모든 것을 묻었네.
그에게 갈보리는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중한 많은 것을 잃었고 다시는 되찾을 수 없었지만, 전부를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새롭게 회복했고 새로운 친구들과도 사귀기 시작했다.
소소한 축복들을 누리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님을 알아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깊은 은혜의 샘을 맛보고 누리게 되었다.
혹자는 “하지만 그의 인생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맞는 말이다. 그의 삶이 다시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그의 부부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고 자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의 인생 역시 이전으로 결코 되돌릴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수치를 가릴 옷을 준비해 주셨다.
우연일까요?
이 말씀을 준비하는데, 대구에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한 성도와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2011년 7월 해병대 2사단에서 총기를 난사해 4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의 주인공의 어머니였습니다. 사건 7개월 만에 군사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난 어머니의 전화였죠.
어머니는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아들이 큰 죄를 지었지만, 아들은 늘 따돌림을 당하며 아픔을 안고 살아왔죠. 그 아들이 이제는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면회 가서 물었습니다.
“왜 그랬니?”
아들은 괴롭힘과 따돌림으로 끊임없이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전역한 선임은 성기와 손을 담뱃불로 지졌었고, 사건 며칠 전 후임에게는 모욕을 당했습니다. 같이 근무하러 나가자고 했더니 “기다려”라는 반말이 돌아왔고, 이에 화가 나 따지자 후임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네가 선임이냐?”
몸싸움을 했지만 바닥에 넘어진 건 아들이었고, 선임도, 후임도 말리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그렇게밖에 하지 못 했느냐고 누군가 질책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어머니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주변의 시선 때문인지,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인지.
어머니는 “혹시 자신의 죄 때문에 아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제가 그 어머니에게 어윈 루쳐의 책을 소개하고 기도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감옥에서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그 아들이 위로를 받아야 하지 않겠는지, 그 어머니와 아들에게 옛날의 삶을 돌아오지 않겠지만,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필요하지 않겠는지 말입니다.
죄가 클수록 넘치는 은혜
오늘 본문 20-21절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일시적인 율법이 죄와 맞서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더 많은 율법 위반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죄는 우리가 은혜라고 부르는 그 전투적 용서에는 도저히 맞수가 되지 못합니다. 죄와 은혜가 맞설 때, 이기는 쪽은 언제나 은혜입니다.
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죽음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전부인데, 이제 그 일도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통해 모든 것을 다시 바로 세우고 계시기에, 은혜는 우리를 생명의 삶 속으로 이끌어 들입니다. 끝없는 삶, 다함없는 세상 속으로 말입니다"
어쩌면 앞으로 8주 동안 주제가 “회복”이 될 것 같습니다.
어윈 루처의 “회복의 하나님을 붙들라”라는 책을 보며, 우리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결국은 회복되지 못함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회복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어려운 질문, 풀지 못한 숙제가 은혜의 말씀을 통해 풀려가기를 기대해 봅니다.
우리는 늘 죄에 무너집니다. 죄에 대항하여 싸워보지만, 우리의 능력으로 그럴 힘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은 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능력이 늘 율법을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죄보다 더 높은 은혜의 산을 쌓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서 아무리 잘못된 결정을 했다 할지라도, 후회는 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이 모든 것을 회복시킬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회복"이라는 말이 참 놀랍지 않습니까?
또한, 죄가 클수록 더 큰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함으로 찾아온 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도 존재합니다.
수치심을 가리도록 가죽옷을 지어 주셨을 뿐 아니라, 땅을 일구고 자손을 낳아 대를 이으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뱀으로 가장한 사탄의 세력이 인간을 타락시켰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지는 못했습니다.
하이럼 스미스가 쓴 책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성공한 기업가가 성공 요인에 대한 질문에 멋지게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잘된 결정 때문에"였다.
"어떻게 잘된 결정을 내렸는가?"라고 묻자 "경험을 통해서"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경험은 어떻게 얻었는가?"라고 묻자 "잘못된 결정을 통해서"라고 대답했다.
문제는 우리가 은혜의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괴로움은 자신의 선행으로 죄를 이겨보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나 모두가 누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무화과 나뭇잎을 가지고 수치를 가려보려고 하지만 곧 말라비틀어집니다.
일시적인 만족과 성공을 가져다줄지 모르지만, 곧 좌절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왜곡된 인간의 본성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왜곡된 모습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관계가 힘들어지는 것이죠.
언젠가 제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해도 맘에 들지 않는 글입니다. 그런데 오후에 보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댓글을 올렸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왕 팬입니다. 그런데 오늘 글은 영 아니네요.”
꼭 그런 글을 올려야 하는 건가요? 부족한 것을 자신도 아는데 말입니다.
트위터에 올려놓은 유머 중의 하나입니다. 시비를 걸려고 마음만 먹으면 모든 것이 다 시빗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시험이 문제가 아니라 시험 가운데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 대문 앞에다 크게 '개 조심'이라고 써놓은 사람의 마음은 조심하라는 선한 마음일까, 물려도 책임 못 진다는 고약한 마음일까?
* 공중변소에는 온통 신사용과 숙녀용으로만 구분해 놓았으니 도대체 나 같은 건달이나 아이들은 어디서 일을 봐야 하는가?
* 우리 마누라는 온갖 정성을 들여 눈 화장을 하더니 갑자기 선글라스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 물고기의 아이큐는 0.7이라는데, 그런 물고기를 놓치는 낚시꾼들은 아이큐가 얼마일까?
* 오랜만에 레스토랑에 가서 돈가스를 먹다가 콧잔등이 가려워 스푼으로 긁었다. 그랬더니 마누라가 그게 무슨 짓이냐며 나무랐다. 그럼 포크나 나이프로 긁으라는 걸까?
* 어떤 씨름 선수는 힘이 세지라고 소고기만 먹는다는데 왜 나는 그렇게 물고기 많이 먹는데 수영을 못할까?
* 이제 곧 이사해야 하는데, 집주인이란 작자가 와서는 3년 전 우리가 이사 오던 때같이 원상대로 회복시켜 놓고 가라니, 그 많은 바퀴벌레를 도대체 어디 가서 구하지?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자면, 우리의 삶에 시비를 걸자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최악의 선택에도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중요한 것은 우리의 남은 인생은 현재의 선택 때문에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최선의 선택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시121:1)
“다윗이 눈을 들어 보매 여호와의 천사가 천지 사이에 섰고”(대상21:16)
오늘 서론에서 언급했던 롯을 다시 살펴볼까요?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그것으로 끝입니다. 다른 방향은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14절에 보세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창13:14)
눈높이를 높이세요. 높은 산에 올라갈수록 더 멀리 보이는 겁니다. 육신의 눈높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영적 눈높이를 말하는 겁니다. 눈높이를 높였으면 사방을 보세요. 아브라함과 롯은 멀리 보려고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도 롯은 사방을 보지 않고 한 방향만 바라보았습니다. 요단 골짜기, 소돔성이 있는 곳만 바라봤습니다.
잘 먹고 잘 살고, 가축이 잘 되는 곳을 보았지만, 영혼이 잘되는 곳을 보지 않았습니다.
시편 121편 1절을 다시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찾아올 때는 언제인가요?
다시는 내 힘과 능력으로 최선의 선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때이죠.
오늘 우리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의 신앙과 삶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결정들을 어떻게 선한 방향으로 바꿀 것인가? 오히려 ‘차선적 결정’을 ‘최선의 유익’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 앞에서 말입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이번 8주를 지나는 동안 여러분의 삶의 전 영역에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눈에서 보았던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다시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