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은 어떻게 성(姓)으로 귀족 집안 출신 여부를 구분할까】
신분제가 폐지된 지 오래인 지금까지도 유럽 일부에서는 입양이나 경매 등을 통해 귀족 집안 출신 성(姓)을 획득하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떻게 성으로 귀족 집안 출신 여부를 구분할까.
대부분 해당 사람의 이름에 '귀족 출신 표시 전치사(nobiliary particle)'가 들어 있으면 귀족 가문 출신일 확률이 높다.
중세 봉건제로 들어서면서 유럽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지를 가문의 성씨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어디(영지)의 누구(이름)'라고 쓰는 식이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de', 독일은 'von'이나 'zu', 이탈리아는 'di' 등이 지역 이름과 함께 '~의'라는 뜻으로 사용됐다.
독일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의 공식 이름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빅토르 알브레흐트 폰 프로이센(Friedrich Wilhelm Viktor Albrecht von Preußen)'이 대표적인 예다. 왕국명인 'Preußen' 앞에 'von'을 붙였다.
하지만 귀족제가 무너지면서 유럽 각지에서 '자칭 귀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경우 18~19세기 경제적으로 성장한 부르주아 계층이 귀족 작위 없이 이름에 'de'를 넣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가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가문은 귀족이 아닌데도 수세대 동안 성 앞에 'de'를 썼다. 부작용이 발생하자 스페인은 1958년 법으로 기존에 이미 성에 'de'가 포함돼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성에 'de'를 추가하는 것을 금지했다.
독일의 경우에는 귀족 출신들이 만든 민간단체인 '귀족협회'가 1919년 폐지된 귀족법에 근거해 족보 관리를 한다.
독일은 법적으로 귀족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은 ‘바이마르 제국헌법’ 제119조를 통해 귀족이라는 계층 자체를 없애버렸다.
다만 이름 사용은 계속 허용해줬다.
조건이 하나 부가됐을 뿐이다.
가상의 인물로 설명하면 예전에 헤르베르트 폰카라얀 백작이 있었다고 하자.
바이마르 공화국 이전까지 그의 법적인 이름은 백작이라는 의미의 그라프(Graf)가 맨 앞에 붙는 그라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Graf Herbert von Karajan)이었다.
귀족 신분을 없앤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이후 그의 정식 이름은 Herbert Graf von Karajan이 된다.
즉, 이름 전체에 작위(이 경우 백작)를 붙이지 않고 성에만 작위 및 von을 붙여도 되도록 허용됐다.
이를테면 1984~1994년 독일 대통령이었던 리하르트 폰바이체커(Richard von Weizsäcker)도 유서 깊은 가문의 귀족 출신이다.
폰바이체커 대통령은 법안에 서명할 때 ‘폰(von)’을 빼고 ‘바이체커’라는 이름만 썼다고 한다.
그 자신이 귀족 출신이라는 인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명에 법적 이름 ‘폰바이체커’를 적지 않았기에 문제가 될 소지도 있었다.
가상 인물인 헤르베르트 폰카라얀 백작에게 백작 부인(Grafen)도 있다고 해보자.
부인의 이름은 어떻게 유지됐을까?
부인의 경우도 성씨만 따르는 Grafen von Karajan이라는 이름을 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했다.
"기사의 배우자는 기사의 권리를 갖는다”라는 중세 때부터의 규범을 따르는 조치이기도 하다.
귀족 수를 늘리지 않으려다 보니 남녀 차별도 있었다.
예를 들어 귀족 남자와 평민 여자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아버지의 성, 그러니까 von이나 zu가 붙는 이름을 그대로 따를 수 있었다.
물론 정식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여야 한다.
사실혼 관계는 귀족식 이름을 인정받지 못한다.
하지만 귀족 여자와 평민 남자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어머니의 귀족식 성을 따를 수 없었다.
현대 독일 가족법에서는 어머니나 아버지 성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귀족이든 평민이든 한쪽 이름을 택하면 된다.
현재는 귀족 여자와 평민 남자 사이 태어난 아이들도 원하는 경우 어머니 성에 따라 귀족 이름을 가질 수는 있다.
오스트리아도 1919년 공화국이 되었는데, 오스트리아는 독일과는 달리 귀족을 뜻하는 칭호와 이름까지 없애도록 했다. 스스로 뭐라 부르든 상관없지만 법적으로는 귀족을 뜻하는 칭호와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한 것이다.
----예전 조선일보 기사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