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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우리 먼저 특성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우리 권우덕 안수 집사님 나오셔서 참 좋으신 하나님 주님이라는 제목의 찬양으로 이 시간 특성하겠습니다. 계속 잘 여러분 먼저 하겠습니다.
아멘 우리 안수 집사님의 신앙 고백과 같은 찬양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 이 시간에는 또 특이 한 개 더 준비되어 있는데요. 우리 유초등부 학생들이 놀라운 이야기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예배해 두 곡의 율동 찬양으로 우리 할 텐데 앞으로 나올 때 우리 힘차게 박수 한번 해 주겠습니다. 저기서 사야지 그래야지 다른 분들을 볼 수 있어. 다운이 여기 서야지. 여기 있으면 안 보여서 여기서도 보일까요? 틀어주세요. 볼륨 올려주세요. 볼륨 다 올려주세요.
설레는 마음으로 한 만들어 봐요. 예수님 이야기를 펼쳐 보아요.
짠을 승리 씨로 죽으시 예수님 우리와 불란 이야기
우리 사랑에서 십자가 지셨데 우린 그 사랑 받아 왕의 자녀 서운 세상 비추는 이 내 이야기 눈을 크게 뜨고 만나러 떠나요.
예수님 우리와 함께하면 놀라운 거 울라고 옛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예수님 그 약속 이야기 예수님의 여 우리 사랑에서 십자가 지셨네.
우린 그 사람 받아 왕의 된 세상 추
마음으로 예수님 따르는 이야기 우린 그 사랑받아 왕의 자녀들과 치
이천에는 같이 멜로디 씌우는 거 따라 해 주셔도 됩니다. 이 시간 내 마음에 하나님 많으세요. 오직 하나님만 여보세. 십자가 그 사랑 나를 안아주시네. 오직 하나님만 예배해 하나님 사로 나를 시키셨네. 오직 내 마음 주님만 예배해 하나님을 믿 날 안아주시니.
십자가 하나님 사랑 나를 시키셨네. 오직 내 마음 주님만 예배해 하나님의 날 안아주시니.
십자가 사랑나 천년 이 이 시간 내 마음에 하나님만 오세요.
오직 하나님만 여배 십자가 그 사랑 나를 알 주시는 오직 하나님만녀 다 같이 해 주세요.
오직 하나님만 예배, 오직 하나님만 예배. 아멘
네 너무 좋네요. 우리 다음 세대들이 이렇게 찬양하니까 표정이 다른데요. 네 우리 그 표정을 가지고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 나눌 때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합시다.
우리 오늘 제가 얼굴을 처음 뵙는 분들이 계신데 보니까 자녀들의 이 발표를 보면서 이렇게 눈에 꿀이 떨어지는 모습을 제가 봤어요. 네 환영합니다. 또 오늘 처음 나오시거나 오랜만에 나오신 우리 여러분들도 환영합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이 어떠한 인생을 살아오고 있고 또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든 이 시간은 바로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좀 어색한 것도 있을 것이고 또 옆에 모르는 분들이 계셔서 좀 불편한 마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시고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된 시간이니까 누릴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말씀 나누기 전에 잠깐 영상 보고 말씀 들어가겠습니다. 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먼저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 돌릴까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제가 오늘 설교를 한 가지 질문으로 먼저 시작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죽음이 두려우신가요? 이 말에 대해서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 인류 역사를 전체를 통틀어 보면 어떤 민족이든 사람이든 어떤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늘 존재합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이걸 어떻게 이것을 철학적인 생각으로 이겨낼 수 있을까를 늘 고민했고요. 과학자들은 늙어서 죽는 노화를 막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를 합니다.
또 종교인들은 사후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죠. 여러분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를 아실 겁니다. 이 톨스토이가 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요. 이 책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가 성공한 판사였습니다. 아주 성공해서 좋은 집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지위가 높았고 또 가족들도 아주 번듯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 사람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사람의 삶을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불치병 선고를 받습니다. 그 불치병의 선고를 받음과 동시에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완벽했던 삶은 무너졌어요. 진짜로 자신을 위로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내도 동료도 의사도 그들은 모두 불편한 사람들의 관계가 되어 버렸어요. 이 소설을 통해서 톨스토이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말은 인간은 죽음 앞에 서면 자신이 평생 추구해 온 것들이 얼마나 텅 비어 있는 것인 것을 알게 된다.
여러분 그렇죠 지금 우리는 마치 죽음이 우리에게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가끔 여러분들 옆에 있는 누군가가 이 땅에서 삶을 마감하는 분명히 그 순간이 올 때마다 우리는 늘 기억하죠. 나도 언젠가 저 자리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때가 되었을 때 지금 여러분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 내 삶에 내가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 우선순위의 것들, 그것들이 과연 죽는 순간에도 중요한 것일까라고 하는 생각을 한번 해본다면 우리의 삶이 좀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시간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건 지금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요. 죽음을 다룬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 끝과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무덤에서 끝나지 않는 이야기 바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2천년 전 새벽에 돌로 막혀 있었던 그 무덤 앞에서 이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성경적인 배경이 없는 분들을 위해서 좀 설명을 드리자면 여기 지금 밑에 쪽에 부활주일이라 써 있는 밑에 쪽에 그림이 이미지가 있는데요. 이렇게 빛나는 그 빛 앞에 동그란 돌덩어리가 있어요.
우리나라는 무덤이 땅을 파가지고 시신을 안치하고 봉을 쌓는 이런 식의 무덤이잖아요. 아니면 이렇게 요즘에 유골함에다 넣어가지고 보관하는 그런 식의 무덤인데 이스라엘 이 당시에 팔레스타인의 무덤은 잘 사는 사람들이 또 이렇게 유력한 사람들이 이런 무덤을 만들어 놨어요. 굴을 파놓고 거기에다 시신을 안치한 다음에 큰 돌덩어리로 누군가 시신을 훼손하지 않도록 돌로 입구를 막아놓는 형식의 무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무덤에 이제 안치하게 되었는데요. 이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고 또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하셨기 때문에 이것들을 실질적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또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들이 이야기되지 않도록 로마 군인들이 이 무덤 앞을 지키고 서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이제 하루 이틀 사흘 3일째 되던 날 일이 벌어집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을 보시면 안식 후 첫날 바로 이게 예수님이 돌아가신 3일째 되던 날입니다. 아직 어두울 때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았다. 지금 이 무덤은 닫혀져 있고 로마의 군인들이 앞에서 지쳐 있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그 무덤이 비어 있는 상황인 거예요.
바로 부활의 이야기는 이 빈 무덤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빈 무덤은 단순히 종교적인 어떤 상징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생존할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예수님의 영향력이 커져가는 것들에 대해서 불편한 마음이 있었어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그러한 예수님의 말들 행동들이 자신들의 눈의 가시와 같이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을 모함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잖아요. 아무런 죄가 없는 예수님을.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고 난 이후에 이제 이 유력한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죽고 나면 이제 모든 사태가 끝날 것이다. 예수님을 추종하던 사람들이 다 떠나갈 것이다라고 그들은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흩어지길 바랬어요. 그래서 무덤에 군인들까지 보내놓고 이 무덤을 지키게 한 겁니다.
그런데 사흘째 되던 날 이 무덤이 열렸고 그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이때 지금 이 일을 주도했던 종교 지도자들, 유력한 사람들이 한 일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28장에 보니까 이 앞을 지키던 군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제자들이 와가지고 밤에 이 시체를 훔쳐갔다라고 너희들 소문내라. 니네가 지금 이 앞을 지키고 있었는데 시체가 없어졌으니까 니네가 이거 책임질래 아니면 이렇게 소문 낼래라고 말을 했겠죠.
근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사람들이 무덤이 비어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빈 무덤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어요. 다만 그 이유를 다르게 이야기했습니다. 빈 무덤이 무덤이 비어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 말이 중요한 말이에요. 또 다른 역사적인 사실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갔을 때 죽으셨을 때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요. 다 도망갔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세 번이나 부인했죠. 두려움에 떨며 문을 잠그고 예수님이 돌아가셨음에도 자기들도 그 꼴을 당할까 봐 두려워서 벌벌 떨며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겁쟁이들이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얼마 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죽으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시고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 이후에 제자들의 모습은 완전히 180도 바뀌었습니다. 겁쟁이들이었던 제자들이 오히려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였고, 그 말씀으로 수많은 이들이 믿었으며 끝내는 이들이 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의 대부분 순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셨다. 우리는 그것의 증인이다.
이 말을 부인하기만 하면 살 수 있는데 제자들은 죽음의 길을 택해요. 나는 내가 본 일을 증언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 사람은 거짓말을 위해서 죽지 않습니다. 돈이나 명성을 위해서 거짓말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목숨이 위태로워지면요. 포기합니다. 거짓말을 포기하죠. 당연히 목숨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제자들은 어땠다고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증거하다가 그 목숨을 내놨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부활의 증거입니다. 그들이 본 것이 사실이기에 그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잠시 잠깐의 그 목숨을 위해서 그들은 부인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곳에 오신 여러분들 가운데는 아직 부활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덮어놓고 믿으라고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이 시간 마음의 문을 조금만 열어주시고 이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부활이요 그거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지 역사적인 사실이 되겠습니까? 부활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지금 앞에 부분에서는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드렸지만 성경 말고 역사적인 내용에서 이 부분을 다룬 내용이 있지 않을까라고 하는 부분을 한번 찾아보려고 합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루스라고 하는 이가 있는데요. 이 사람은 서기 56년부터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 죽으심 그 상황 가운데 활동했던 역사가예요. 이 사람이 그가 저작한 연대기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네로 황제 시절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본디오 빌라도 치아에서 처형된 그리스도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 타키루스는 기독교를 해로운 미신이라고 표현을 할 정도로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님의 존재 그리고 예수님의 처형 사건 이런 것들을 역사적인 기술로 적어놨다는 거예요.
또 1세기에 유다의 역사가 요세푸스라고 하는 사람도 역시 그렇게 예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무렵 예수라는 현자가 있었다.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에 처형했으나 그를 처음부터 사랑했던 이들은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이라 이름으로 존재한다.
요셉 부스도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사제 출신으로 로마의 황실의 역사가였던 사람이 예수님의 존재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 그리고 초기 기독교의 그러한 존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그냥 어떤 신화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존재했던 이야기를 우리가 성경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들의 이야기 속에서도 보고 있다는 겁니다.
많은 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해요. 우리가 마치 당군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박혁것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이 성경의 이야기도 그런 신화적인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역사학자들 있잖아요.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쓸 때 그들이 연구하는 방법론이 있거든요. 19세기에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학자 토마스 아놀드라고 하는 아주 역사의 권위자가 있는데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역사를 연구해 왔다. 역사적 증거의 원칙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역사는 여러 가지 증거가 없으면 그걸 역사라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거만큼 완벽하게 입증된 사건을 역사에서 거의 알지 못한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역사들도요. 대부분 완전히 증거가 가득한 것들로만 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들 중에서는 어떤 사람들의 생각으로 기록된 이야기들도 그 안에 존재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족들에게 그 증거들로서 다 이렇게 간추려 보면 이게 사실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역사학자들이 계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부활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듣고 있는 부활은 믿음의 영역 성경 이야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었고 이 사건이 여러 사람들의 삶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의 2천년 역사를 바꾸는 그러한 중요한 사건이 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서 6절 말씀을 한번 이렇게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아멘 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사람이 사도 바울인데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한 20년에서 25년 정도 사이에 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했어요. 그런데 그때 이 바울이 증언하는 게 뭐예요?
그 당시에 예수님의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본 500여 명의 형제들에게 일시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도 살아서 그 일을 증언한다. 한두 명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이 살아나심을 보았고 승천함을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부활이 그러면 사실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냐 이 부분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7절과 20절 말씀을 보면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여러분 이 부활 사건이 없다면 지금 우리가 여기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유가 아무것도 없어지는 거예요. 기독교인들에게 부활 이 주일이 부활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우리는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 가지 의미를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는데요.
첫 번째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부활은 우리의 종착지가 죽음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두려워했던 그 죽음 세상 모든 사람들은 마지막이 죽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죽음의 문이 떨리고 두려운 문이 아니라 이미 열려 있는 문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CS 루이스라고 하는 기독교 변증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무신론자였어요. 그런데 대학 교수였던 이 사람이 치열하게 지적인 탐구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가 이렇게 말을 해요. 기독교는 사람들을 위해 사람들이 위안을 얻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훨씬 더 편안한 이야기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오히려 불편하고 요구가 많고 우리의 자아를 흔드는 진리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여러분 성경 이야기를 우리가 알면 알수록 내 마음을 찌르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아요. 내 삶을 얼마나 주장합니까?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어요. 믿지 않는 사람과 우리가 다를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여러분들이 실패하셨습니까?
그 실패가 최종 실패가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 땅에서 고통 당하고 계십니까?
그 고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순간이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이 부활은 죽음 다음이 있다라는 선언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죽음의 효력을 완전히 이겨냈다고 하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잠깐 이제 십자가의 의미가 뭔지를 좀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요.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든 모든 것들, 탐욕과 거짓과 교만과 상처와 죄책감, 그런 모든 것들, 그것들을 예수님이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죽으신 주님이 다시 사라졌다는 말은 뭘 이야기하는 거냐면 이제 그 값을 치렀다. 하나님이 확인 도장을 찍어준 거예요.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와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은 죽음의 권세가 더 이상 우리를 짓누를 수 없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모든 지으신 죗값이 완전히 지불되었다고 하는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는 나는 너무 많은 잘못을 했다.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받아주실까 그런 마음으로 앉아 계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여러분 부활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을 위해 예수님은 오셨고, 그리고 그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는 벌써 그 효력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세 번째 의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시작은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의 사건은 과거의 사건으로 과거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에게도 그 효력은 여전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과 26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말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을 가져다주는 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바로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새 생명을 시작하는 시작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본문 요한복음 20장의 한 장면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 장면에 나오는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잘 따랐던 화려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이 나갔었다고 기록하고 있죠. 상처가 많고 참 배경이 어두운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삶이 완전히 변화되었어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많은 제자들은 도망갔고 숨었지만 이 여인은 그 옆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신 이후에도 그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속에서 이 마리아는 그 무덤 밖에서 울 수밖에 없었어요. 아니 그렇게 자신이 사랑했던 예수님이 죽으신 것도 너무 억울한데, 그 죽으신 시신마저도 누군가가 이렇게 가져가 버린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 속에서 그렇게 슬펐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찾아오셔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십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처음으로 만난 한 사람의 이야기를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뭐라고 부르셨다고요?
마리아야
여러분 이 장면은 지금 이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실 겁니다.
효철아
여러분들의 이름을 한번 불러보세요.
누구야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찾아오셔서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시고 여러분들을 기다리십니다. 여러분들의 과거를 다 아시고 여러분들의 상처를 아시는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만나 여러분들이 변화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해 볼까요? 죽음은 우리 인류가 두려워하는 가장 큰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실제 죽으셨고 실제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이야기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입니다. 빈 무덤은 그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에게도 부정되지 않았고 제자들의 변화가 그것을 증언합니다. 부활은 우리가 죽음이 끝이 아니고 우리의 죄가 해결되었고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의 길이 열렸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길을 여신 예수님이 마리아를 불렀듯 우리들의 이름도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 부활 주일을 맞이하면서 먼저 믿음이 있는 여러분들 부활 신앙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증인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여러분들의 가족들, 여러분들의 이웃들이 여러분들을 보고 정말 예수님이 부활하셨구나 저 사람의 삶을 보면 내가 믿을 수밖에 없구나라고 하는 그런 부활의 증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에도 사도 바울이 그러한 삶을 살았잖아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쫓아다니면서 그들을 잡아 가뒀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180도로 바뀌어서 오히려 목숨을 내걸고 선교했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고 있죠.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저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이때는 내가 산는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 속에서 산 것이
아멘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제 지금까지 살아왔던 나의 삶은 십자가에 못 받고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살아가겠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고 그의 삶을 통해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거예요.
여러분 바울이 이야기만 잘해가지고 그 복음이 증거된 것이 아니라 그가 경험한 것을 말했고 삶으로 살아갔기 때문에 그의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확장된 겁니다. 오늘 이 장소에는 교회가 처음인 분들도 계실 겁니다. 또 어떤 분들은 교회를 떠났다가 오랜만에 오신 분들도 계시고요. 또 어쩌면 많은 상처와 질문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여러분들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 여러분들의 삶을 다 아십니다. 그리고 지금 어떠한 목적으로 이 자리에 오셨던지 간에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초대하셨습니다.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셨듯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여러분들의 그러한 첫 걸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이 말씀에 반응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라면서 우리 한번 입술을 같이 움직이면서 제가 천창을 하면 여러분들이 마음으로 같이 기도하셔도 되고, 입술로 열어서 기도하셔도 됩니다.
예수님 당신이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당신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습니다. 오늘 제 마음의 문을 엽니다.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러분 지금 입술을 열어 기도한 여러분들은 중요한 첫걸음을 떼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작점에서 혼자 그냥 믿음 생활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하늘 소망 공동체가 그 길을 함께 걸어갈 것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여러분들을 찾아가셔서 여러분들의 상처 입은 마음들을 만지시고, 또 여러분들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그냥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늘 여러분들과 동행하길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영상을 보고 이제 우리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마지막 질문을 되새기면서 이 부활 주일을 함께 보내길 원합니다. 요즘 신의 악당이라고 하는 영화가 유행을 좀 했었는데요. 그 영화에서 유명해진 찬양입니다. 주 예수 나의 산 소망이라는 찬양 우리 함께하면서 우리 부활을 함께 기뻐하며 찬양하겠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