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3가 회사 도착하니 11시였다. 직원들에 인사하고 바로 성진 빌딩으 로 갔다. 영업부 경리부 사장실과 함께 쓰는 3층 사장실로 가서 인사하고 응접 실 앉아 기다렸다. 가방엔 그동안 조사 해 군청에 등록한 목록과 등기부등본 사본이 가득했다.
어머니 안부를 묻고 수고했다 하며 밥 먹으러 가자 하여 먼저 번 갔던 일식집 에서 식사하며 누락됐던 토지가 그렇게 많았다며 놀랐다고 하시며 수고 한 김에 팔봉면 금학리에 있는 시제 지내는 선산 과 종답과 묘지기 전답을 이전을 해달라 하셨다. 그래서 지번을 아시냐 했더시 사무실 파일에 있다 하여 지번이 있는 토 지는 농지위원 도장 받아 접수시키면 하 루에 다 할 수 있을 거라 했다.
그러면서 전화로 얘기할 사안이 이닌듯 하여 보자 했다며 어머니도 어느 정도 회복되고 했으니 다시 와서 도와달라 했다. 전혀 예상치 않은 제의에 대답을 못하자 내년 사업 계획을 말하며 점차 무역업으로 체제를 개편하려는데 자네가 맡을 부분이 있다며 거듭 합류 를 종용하셨다. 가게는 소매상에게 세를 주고 사무실로 올라가 수입하여 전국적인 판매망을 조직하여 무역업 으로 개편하겠다며 여러 희망을 말씀 했다. 갑자기 받은 제의라 머리가 복잡 해졌다. 시작한 지 2년 안된 축산업이며 이장 보는 일이며 큰애는 일학년 다니고 둘째도 학교 병설 유치원 다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농협서 대출받은 원금 천만 원이 남아있고 단위 농협에서 대출받은 농자금에 년 부로 산 경운기에 축협에 갚아야 할 사료 대등 아득했다. 식사도 건성으로 하고 사무실 와서 팔봉면 땅 서류 받고 오늘 바로 내러 가겠다고 인사하니 봉투를 주면서 이사비 보태라 했다. 전화드리겠다 하고 도망 치듯 빠져나와 귀가 버스에 올랐다. 머리가 복잡하여 졸지도 않고 귀가했다.
당일치기로 새벽부터 움직여 솜처럼 피곤한데 심사 어지러워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이자 아내가 무슨 일 있냐고 꼬치꼬치 물었다. 아무 일 아니라 해도 들어올 때부터 이상했다며 눈치 봤다.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일 말했다. 사장이 나보고 정리하고 다시 오라고 하더라 했더니 벌떡 일어나 불을 켜고 앉아 그래서 뭐라 했느냐. 어떡할 거냐 숨도 안 쉬고 바짝 대들어 물어 댔다. 그래서 여러 처해진 현 상황을 설명 하며 자기와 상의하여 답하려 확답을 못 했다 하였다. 오늘 피곤하니 자고 내일 생각하자 하고 불을 껐다. 말은 안 해도 우리 부부 둘 다 쉽사리 잠을 못 이루는 밤이었다.
다음날 저녁 아내가 굳은 표정으로 어머니도 밥을 해 드실 정도 회복되 시고 했으니 애들 도시서 공부시키고 자기도 공장 나가서 살림에 보탤 테니 정리하자고 매달렸다. 당시 내 나이 34살 아버지는 55 세 어머니 54세 셨다. 요즘 같으면 한참 청춘 이 건만 그때 느낌으로는 노인으로 생각되어 망설여졌었다. 결론을 못 내고 이틀 밤도 고민하다 새웠다.
다음날 어머니가 한결 눈빛 달 라져 애비야 하고 나를 불러 앉으라더니 어미한테 얘기 다 들었다며 서울로 다시 가라고 하시며 눈물 흘리셨다. 말은 못 했어도 나 때문에 니덜이 내려 와서 고생하는 거 매일 보면서 하루도 맘이 편치 않았다며 엄마 아베 걱정 말고 서울 가서 살라고 하셨다. 아버지와 상의드리겠다 하니 아베도 말은 않아도 걱정하셨다며 당신이 알아서 말씀드릴 테니 당장 이 사 준비 하라 하셨다. 아내는 멀찍서 모자간 대화 엿듣다 나 하고 눈 마주치자 잽싸게 숨었다
결심이 서자 바로 시행에 착수했다. 팔봉면 땅 이전 문제가 급선무였다. 금학리 이장을 찾아가 농지위윈 소개 받아 유 씨 시제 총 전답을 상속정리 하겠다 하니 그러야지요 하며 선선히 도장을 찍어주어 오는 길에 군청 들려 접수하고 서울로 접수했다고 전화하니 언제쯤 올라올 거냐고 기정사실로 말해서 되도록 연말 안으로 정리 마치 겠다고 하니 잘 결정했다고 마무리 잘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이젠 꼼짝 없이 다시 서울 생활 시작해야겠구나 생각하니 좋은 건지 마음 착잡하기만 했다. 소장사를 불렀다. 한두 마리씩 소매로 쇠전 시장서 팔면 돈백은 더 받겠지만 한번 마음 정한 바에는 신년 직제개편 하겠다는 사장 의도를 따르기로 했다. 결국 이년을 애지중지 길러 큰 소 한 마리 남기고 800만 원에 넘기고 아내도 나도 어머니 몰래 울었다. 원금에서 200 밑지고 팔았다. 한 마리도 마져 팔았다면 50 정도 빚 갚는데 부족했다. 이장직도 사정 말하고 사직하고 면에도 음암 농협도 가서 인사하니 모두 서운 해 하였다.
아버지가 제일 적극적으로 좋아하셨다. 내가 알면 속상해할까 봐 나 모르게 족새골 논 닷 마지기 팔기로 계약했다. 내가 뒤늦게 알고 서운해하니 어차피 재산을 서울로 옮겨 놓는 건데 무얼 서운케 생각하냐 시며 잘 결정해 당신 들 마음이 가볍다 하셨다. 경운기는 아무래도 아버지가 부리기 어려울 듯 하여 상운이 형에게 할부 남은 거 2년 치 물으며 인수하라니까 즣아했다. 대신 개간 밭 5000평도 형이 경작 하라하여 쌀 17가마 받는 조건으로 아버지 일을 줄여 드렸다. 마을 청년회 회원들이 모두 와서 이사짐을 실어주며 성공해서 잘 살으라고 격려해주고 돈 20만원 을 전별금 아라며 쥐여주었다. 는물이 핑 돌았다.
대충 마무리하고 먼저 살다 내려온 안양 석수 주공아파트 계약하고 잔금 날짜가 남아 나만 먼저 12월 20일 날 올라와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다음 해 1월 셋째 일요일 회사서 내준 화물차로 다섯 식구가 조수석에 안고 차 바닥에 담요 깔고 끼여 추운 줄도 모르고 세 시간 달려 석수동 아파트로 왔다. 전에 내려갈 때 짐실어다 준 기사가 올 라 올 때도 왔는데 옆에 탄 아내가 눈이 빨갛게 충혈 된 걸 백미러로 보고 내려갈 땐 유대리님 울더니 올라올 땐 사모님 이 우네요 하고 놀려줬다. 꼭 2년 반 만 제자리 돌아오니 꿈꾸다 깬듯하였다. 오늘은 여기 까집니다.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