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마지막 날
창문을 여니 어제와 마찬가지로 대련시의 하늘은 뿌옇기만 하다. 오늘은 서울로 돌아가기 전 대련세관을 찾아보려 한다. 마지막으로 우당 이회영 선생의 흔적을 느껴보려 함이다. 순결한 아나키스트 우당 이회영 선생. 선생은 환갑이 훨씬 넘으신 나이에 1932년 만주로 되돌아가서 와해되다시피 한 독립운동 조직을 살리고, 이를 통해 일제 요인과 기관을 처단 폭파시키는 일을 하고자 배를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대련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보가 새어나가 대련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일경에 체포된 것이다.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을까? 우당이 상해를 떠나기 전 석영 형님 댁을 들렀을 때 만주로 돌아갈 계획을 얘기했었다. 그 자리에는 석영의 둘째 아들 규서와 임시정부 요인 엄항섭의 처조카 연충열이 있었는데, 이들로부터 얘기가 새어나간 것이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을 걷는 것이다. 이념이 투철하고 나라 사랑이 충만한 독립운동가들이야 이런 어려움을 이를 악물고 헤쳐나갈 수 있다지만 그만큼 의지가 굳세지 못한 가족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일제는 바로 이런 약한 곳을 집중적으로 노려 회유 공작을 펼치는 것이다. 이 공작에 이규서와 연충열이 넘어간 것이다. 안의사 아들 준생도 이 공작에 넘어가 고국으로 돌아와 이등박문의 사당 박문사에 절하며 안의사가 잘못했다고 사과하지 않았는가?
66세의 노인은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동지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불지 않다가 끝내 잔인한 고문 끝에 죽었다. 일제는 뭐가 켕기는지 우당이 자살하였다고 발표한다. 나는 마음은 벌써 대련세관으로 들어가고 있으나, 몸은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길 건너편에서 바라만 볼뿐이다. 중국 세관의 허가를 받지 못해 들어갈 수는 없는 것. 저기서 우당 선생은 놈들에게 붙잡혀 어제 갔던 여순 감옥에 구금된 것인가?
예전에 도올 김용옥 선생은 교육방송의 독립운동사 프로를 진행하면서 직접 현장을 누비기도 하였지. 도올 선생이 우당 선생의 체포 현장을 찾아와 방송을 하던 곳이 바로 요 앞이겠구나. 도올은 당시 장면을 해설하면서 먹먹해오는 가슴에 해설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었지. 나또한 이 자리에 오니 도올이 느꼈던 그 가슴 먹먹함이 그대로 전해온다. 삼한갑족으로 눈 딱 감고 편히 살 수도 있었던 우당 선생. 그러나 선생은 민족의 비극을 모른 체 하지 않고,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뚜벅뚜벅 걸어가 나라의 독립에 몸을 바치셨지.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 우당 이회영 선생. 뜨거운 마음으로 우당을 흠모하며 대련세관 앞을 떠나간다.
공항에 도착하였다. 10:55분 비행기는 아직도 누런 대련의 하늘로 날아오른다. 4박5일간 하얼빈에서 대련까지 안중근 의사의 의거 발자취를 하나 하나 밟아가며 따라왔다. 해외 여행을 많이 하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것을 느끼게 한 이번 여행. ‘선생이시여! 선생이 이등박문을 죽임은 단순한 한 원흉을 죽임이 아니라, 이를 넘어 진정한 동양평화를 세우시려고 했던 것, 이번 여행을 통해 선생의 그 깊은 뜻을 배우고 돌아갑니다. 당신이 돌아가신지 102년이 되었건만 저희는 아직 당신이 생각하신 동양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나이다. 동아시아의 평화는커녕 우리 자신이 남북으로 갈려 으르렁거리고 있나이다. 이 못난 후손을 용서해주소서. 그리고 힘을 불어주소서. 선생의 그 순결하고 치열한 영이 저희와 함께 하며 진정한 동양평화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게 하소서.’ 안의사께 나의 염원을 전하는 동안 비행기는 중국 대륙을 떠나 발밑에 황해 바다를 두고 나의 고국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다.
첫댓글 드라마 각시탈을 보며 우국충정을 불태우고 있답니당, 잘 읽고 갑니다
양 선생님의 안중근의사에 대한 존경과 살이 담긴 글 잘 읽었습니다. 장문의 글 쓰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짝짝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