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30(목)■
(골로새서 2장)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묵상/골 2:16-23)
◆ 그림자와 실체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과거에 나는 율법과 복음을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율법과 복음은 서로 얽혀있다. 그것은 그림자와 실체의 관계다.
그림자란 실체와 전혀 관계없는 것이 아니다. 실체가 있음으로써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율법은 그림자다.
실체는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서는 몸은 그리스도의 것(the body of Christ - KJV)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NIV에서는 제대로 의역했다.
the reality is found in Christ. (실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율법에서는 먹어도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그 규정이 수십가지나 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돼지고기 같은 류를 먹지 않는다(레 11:3-23).
그리고 율법은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령한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그렇게 지키고 있다.
제칠일안식교도 그렇게 지킨다. 어떤 학생이 안식교단에서 세운 삼육대학교에 입학 원서를 내자 학교에서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인정하는 문서에 동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아주 명확하게 안식일이 그림자임을 밝힌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은 주일이 안식일이기 때문이 아니다.
주일은 안식일 다음날이라고 성경은 명확하게 밝힌다(행 20:7).
토요일 다음날이 토요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안식일 다음날이 안식일이 될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에 부활하셨고, 안식 후 첫 날에 성령께서 강림하셨다. 교회는 안식 후 첫 날을 안식일로 지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기념일로 삼았고, 전통이 된 것이다.
주일을 안식일이라고 하면, 결국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옮긴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다.
토요일이 일요일로 옮겨짐으로써 그림자가 실체로 둔갑하는가? 말도 안된다.
오늘날 안식교단과 개신교단이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킬 것인가,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킬 것인가로 서로 싸우고 있는데 그것은 마치 남쪽으로 가야 옳은데, 동쪽이 옳으냐 서쪽이 옳으냐로 싸우고 있는 것과 같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주일을 안식일이라고 말하는 자를 거짓 예언자라고 공격했다(기독교강요 상권 562쪽-565쪽. 생명말씀사).
안식일은 그림자에 불과하고 실체는 그리스도이시다.
안식일의 주인되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를 믿음으로 붙잡고 사는 자야 말로 진정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자다.
주일이 안식일이 아님을 깨닫고 나면 두 부류의 사람이 생긴다.
하나는 주일날에 친구들과 등산가거나 각종 행사 참여 등을 꺼리지 않는 것이다. 과거에는 안식일인 줄 알고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공동체 예배는 이순위, 삼순위로 밀린다.
반면에 다른 하나는 안식일의 실체가 누구신가를 깨닫고 더욱 주님을 붙드는 것이다.
주님을 붙드는 삶은 어느 하루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로 이어지며, 주일은 형제들과 함께 실체되신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날로서 더욱 소중하게 된다. 어떻게 예배가 등산보다 못한 것이 되겠는가?
당신은 어떤 부류인가?
◆ 잘못된 기준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마귀는 환상과 계시와 각종 과장된 간증을 통해서 우리가 엉뚱한 것을 붙잡도록 한다.
사람들은 꾸며낸 겸손에 속는다. 그가 겸손하다고 칭찬하며 그의 검소함에 감탄한다. 더구나 그가 유명하거나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말은 무조건 진리로 둔갑한다.
성경을 읽지 않거나 복음의 진리를 확고하게 믿지 않는 형제들은 그런 자의 말이나 간증을 자기 신앙의 기준을 삼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간증할 때 자기를 과시하고 조금씩 과장하는 버릇이 있다.
십일조를 안 바쳤다가 사업이 망한 이야기, 주일날에 친척 행사에 갔다가 사고 당한 일 등을 예로 들면서 주일성수와 십일조가 얼마나 중요한 신앙의 핵심인가를 강조한다. 사람들은 아무런 분별력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신앙을 엉뚱한 곳으로 이끌고 있음을 미처 못 깨닫는다.
신앙이란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다. 그가 머리가 되시고, 그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혹은 항상 최우선순위를 뒤바꾸고, 엉뚱한 것을 붙잡게 하는 것이다.
미혹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엉뚱한 것을 머리로 붙잡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멋지게 포장되어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미혹이다.
◆ 세상의 초등학문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율법은 먹고 마시는 규례와 더불어 각종 절기에 대한 규례가 있다.
그리고 부정에 관한 규례도 있다. 어떤 것을 만지면 부정해진다는 규정이다 (레 11:24-47). 골로새 교인들은 그런 율법적인 규정을 신앙생활로 알았던 것 같다. 그런 것을 지키면 약간의 유익이 있을 수 있지만, 폐해가 더 크다.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규례를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선언한다(20).
하나님의 율법을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당황스럽다. 그러나 바울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말한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세상의 종교인에 의해서 해석되고 가공된 율법이다. 예수님도 율법을 매우 존중하셨지만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가공된 율법과는 충돌하셨다. 안식일에 병고치는 문제로 충돌하셨고, 헌금하는 문제로 충돌하셨다(막 7:11).
우리는 이제 그러한 인간들에 의해 가공된 율법과 그림자인 율법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 머리를 붙들어라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신앙생활이란 이것하고 저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식하고 그를 붙잡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머리로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머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일진대 이것 하라 저것을 하지 말라하는 율법과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몸과 머리는 억지로 순종하는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머리가 내 머리와 같을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냥 율법으로 받아들이면 나는 아무런 성장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내 머리가 되시면 비로소 그의 모든 말씀은 힘이 있고, 우리는 모든 능력과 힘을 공급받게 된다.
그림자를 붙들면 매우 종교적으로 보이지만, 전혀 그리스도를 닮아가지 않는다. 고집만 쎄지고 위선만 늘 뿐이다.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었다. 그들은 십일조 하고, 일주일에 이틀씩이나 금식했지만 그 안에 있는 교만과 시기와 음란함을 조금도 벗어버리지 못했다. 오늘날 바리새인이 위선자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지 않았는가?
아파트를 짓기 전에는 모형을 만든다. 모형이 아파트와 전혀 관계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은 모형이 아니라 실제로 지어진 아파트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림자를 붙들고 할 것이 아니라 실체되신 그리스도를 붙잡고 해야 한다.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한다.
복음을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
바울은 우리에게 복음을 명쾌하게 설명하건만, 사람들은 바울의 말보다도 유명한 목사의 말이나 자기 경험을 더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것에 미혹되지 말자.
복음의 진리에 굳게 서있자.
오직 그리스도를 붙잡자.
주 예수님, 주님께서 저의 머리되십니다.
저를 많은 미혹에서 보호해주시고, 제 걸음을 인도해주십시오.
오직 주님으로부터 공급받아서 성장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