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윗의 배려
삼하 9:9-13
9 왕이 사울의 시종 시바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10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양식을 대주어 먹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 시바는 아들이 열다섯 명이요 종이 스무 명이라
11 시바가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모든 일을 종에게 명령하신 대로 종이 준행하겠나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12 므비보셋에게 어린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시바의 집에 사는 자마다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
13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
삼하 9:9-13 / 그러나 왕은 시바를 불러서 이렇게 명령하였다. `사울과 그의 집안이 차지하였던 토지를 모두 내가 그의 손자인 므비보셋에게 주었다. 10) 너는 이제 네 모든 아들과 종들을 거느리고 그 땅에 농사를 지어 네 상전의 손자가 먹고 살기에 넉넉한 양식을 대어 주어라. 그리고 므비보셋은 언제나 내 식탁에서 식사할 것이다.' 그런데 시바에게는 15명의 아들과 20명의 종이 있었다. 11-13) 시바가 대답하였다. `나의 주 임금님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이 종이 모두 실행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시바의 온 식구가 므비보셋의 종이 되었다. 므비보셋은 예루살렘으로 집을 옮겨 살며, 언제나 왕의 아들들과 함께 왕의 식탁에서 식사하였다.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저는 데다가 항상 왕의 식탁에서 먹어야 하였으므로 늘 예루살렘에 머물러 살았다.
다윗의 선행은 훗날 자신의 왕국을 든든히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9-10) 다윗 왕은 사울의 종 시바를 불러서 사울과 그의 집안이 가졌던 모든 소유를 므비보셋에게 주라고 엄하게 일렀습니다. 더 나아가서 너와 네 다복한 아들들과 종들 모두는 너의 상전 집안 사람들의 양식을 대도록 명령했습니다. 여기서 사울의 종 시바는 그 동안 사울의 유산 중 상당 부분을 유족에게 돌리지 않고 착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바의 이 같은 간교한 성품은 훗날에도 드러나는데 결국 다윗 왕도 왕명을 거둘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계책을 만들어 그의 상전인 사울의 재산 일부를 빼앗는데 성공합니다(삼하 19:26-29).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11) 그리고 므비보셋은 다윗의 식탁에서 왕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후한 대접을 받습니다. “므비보셋이 왕의 상에서 먹다”와 같은 구절이 본장에서 모두 4회나 반복됩니다(7, 10, 11, 13). 이는 본서 저자가 요나단과의 언약(삼상 20:14-42)을 철저히 이행하는 다윗의 의리와 사랑을 잘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 기록입니다. 더 나아가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는 코멘트로 끝냄으로 므비보셋의 치명적인 약점과 그에 대한 다윗의 지나치리 만큼 베푸는 현실적 호의를 서로 대조시킵니다. 다윗이 얼마나 위대한 왕이었는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윗이 므비보셋을 선대한 이유를 다윗이 므비보셋의 세력을 처음부터 견제하고 관리 감독하기 위해서라는 정치적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다윗의 거룩한 신앙에서 나오는 삶의 방식과 인품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고 상반된 주장일 뿐입니다.
므비보셋에게 어린 아들 하나가 있으니(12-13) 불구자 므비보셋이지만 건강한 아들 미가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후에 많은 자손들을 갖게 됩니다. 만약 다윗이 므비보셋을 방치 했다면 그는 신체의 불구로 스스로 설 수 없고 모든 소유는 빼앗긴 채, 후손조차 없이 비참하게 죽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 왕권의 이동에 따른 권력의 속성 그대로 잣대를 댔다면 그는 제거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이 미가의 자손들은 이스라엘의 용사 및 지도적인 인물들이 됩니다(대상 8:35-40; 9:40-44). 이는 다윗 왕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의 영향력이 므비모셋과 미가를 넘어 이스라엘 나라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을 보여 주는 실례가 될 것입니다.
적 용 : 지금 깊은 자아성찰 속에서 당신은 시바의 캐릭터에 속합니까? 다윗의 캐릭터에 속합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다윗의 캐릭터를 닮아 갈 수 있을지 서로 나누어 보세요.
교회의 다른 지체들을 귀하게 여겨야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상속자들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다른 지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달라져야 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도 그 위치와 명예를 존중해 함부로 대할 수 없는데,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지체에 대해 서라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이 그 언약의 대상자인 므비보셋을 귀히 여기고 후히 대접한 것처럼 우리도 다른 지체들을 귀하게 여기되 특히 찬란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사람들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 설 교 >
은총을 베풀리라
1980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테레사 수녀가 한 번은 영국 B.B.C 방송의 기자인 맬콤 머거릿지와 회견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기자는 "당신은 일생을 죽어 가는 사람들 곁에서 살아왔는데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다. 그에 테레사 수녀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 자신이 버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토록 해 주는 것,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보살펴 주는 이웃이 있다는 것을 살아있는 동안 단 몇 시간만이라도 느끼도록 해 주는 것" 이라고.
누군가 진심으로 보살펴 주는 이웃이 있다는 것을 느끼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생을 행복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단 몇 시간이라도 함께 하는 은총을 느끼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천사가 아니겠습니까? 이 시대는 이런 은총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어느 저명한 소아과 전문의는 체중 미달의 연약한 어린아이를 치료하는 특별한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회진할 때 이런 아이의 기록표를 발견하면 어쩔 수 없이 다음과 같은 처방을 써놓습니다. "이 아기는 세 시간마다 사랑을 받아야 함." 애정이 필요한 것은 갓 태어난 아기뿐만이 아닙니다. 의사들은 우리의 신체적인 질병이 대부분 불안감이나 고독감 그리고 버림받는다는 느낌에서 기인한다는 데 의견을 일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죽기 직전이든 태어난 직후이든 인생의 모든 기록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가볍기에 체중 미달이 아니라 사랑 미달로 세상의 짐이 힘겨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방전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할 하심이라(요 3:16).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은총을 이 사랑을 베풀어야 할까요? 어떻게 안아주고 품어주어야 할까요?
1.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라(7절)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전쟁에서 패하고 망한 왕의 모든 재산은 다 몰수당했는가 봅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그 할아버지 사울의 밭을 다 돌려주겠다고 합니다. 다윗은 그에게 용기만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생활하며 의지할 재산을 회복시켜 주겠다고 합니다. 잃었던 것을 다시 얻게 하는 것에 은총의 특징이 있습니다. 사울왕의 밭이었으면, 그 당시에 최고의 좋은 땅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아낌없이 므비보셋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왕의 권세에 해당하는 영지를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거지처럼 초라하게 변방을 떠돌던 므비보셋에게 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한 지역의 영주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서 입으로만 호의를 베푸는 것은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은총을 베풀려면 그 사람이 자립할 수 있는 기반까지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소유가 있어야 자유합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위해 영지만 회복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리할 하인들까지 보내주셨습니다. 그의 권위를 회복시킨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제산을 관리할 사람인 시바까지 준비해 줍니다(9-10절). 명실상부한 왕족으로 귀족으로 실권을 회복시키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축복하실 때,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우리 쓸 것을 채우시는 분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하나님의 넉넉한 은혜는 우리의 부족을 채우십니다(고후 12: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 너 눈을 들어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그에게 종과 횡으로 너 서 있는 곳에서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거지처럼 흉년에 먹을 것이 없어서 살기 위해 애굽에 내려가 아내를 팔아먹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땅을 너에게 주겠다고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천지의 주제이신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도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시러 하늘 아버지께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처소를 예비하면 우리를 자기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여러분이 회복해야 하는 영지가 무엇입니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습니다(국민일보에서).
■ 1997년 미국 플로리다주에 노벨하야스라는 분이 큰 오렌지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좋은 성도였습니다. 기도하면서 오렌지 농사를 지어 소득의 십일조는 헌금을 드리고 교회에 필요한 물품도 구입하며 어려운 사람들도 많이 도와주는 등 믿음이 좋은 성도였습니다. 그런데 1977년 여름 이상기온으로 눈이 쏟아지고 기온이 급강하, 땅이 얼어붙었습니다. 땅이 꽁꽁 얼어붙으면 오렌지 농사는 끝나는 것입니다. 노벨하야스씨는 밤에 농장으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오렌지 농사는 저의 생계가 되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쓰여지는 물질의 기반인데 금년에 수확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렇게 선포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얼음아 녹아라! 오렌지야, 얼지 마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보호하시리라!”라고 기도했습니다. 그해 모든 오렌지가 얼어붙어서 오렌지 농사는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기도 덕분에 노벨하야스의 농장의 오렌지는 얼지 않았고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수확량이 적은 그해 오렌지 값이 올라 예전보다 더 많은 수입을 얻어 그것을 통해 하나님 사업을 더 많이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믿기 어려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에 이 모든 불황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믿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올 하늘나라에 엄청난 세계가 여러분의 다스림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왕같은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를 우리가 상속하게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시 2:8)",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어려움도 회복시키시길 바랍니다. 주께서 이런 은총을 여러분들에게 베푸시길 기도드립니다.
2. 명예를 회복시키라(7, 10, 11, 13절)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고대에 식사를 누구와 함께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명예와 수치의 문제로 직결되었습니다. 더구나 왕의 상에서 왕과 나란히 식사를 한다는 것은 왕의 가족의 위치 즉 왕자의 반열에 있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놀랍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7절에서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이렇게 다윗이 말한 이후에 이것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강조하는지 보십시오. 10절에서 “...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으리라 하니라...” 11절에서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왕자의 하나, 왕의 가족으로 높여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에 또 한번 강조됩니다.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절더라.” 왕의 상에서 므비보셋을 먹게 한 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왕의 아들이나 마찬가지로 왕에게 사랑받는 존귀한 사람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사회적으로 크게 작용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은총이란 이렇게 그 사람의 명예까지 높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은총을 베푸시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초라한 제자들과 함께 떡을 떼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혹평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늘의 천국의 잔치에 우리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예배에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리스도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이것이 얼마나 명예로운 일입니까? 우리가 성도라니요! 하나님의 자녀라니요! 어찌 이 무리와 함께 있는 것에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명예가 회복이 되었다고 교만하면 안됩니다. 8절의 므비보셋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왕의 총을 받은 자의 자아에 대한 고백은 죽은 개와 같은 자라는 더욱 낮아진 겸손이었습니다. 원래 왕자였을 자신의 신분을 당연한 듯 주장하지 않고, 아무런 불평도 없이 은혜를 은혜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은총을 받은 사람의 태도입니다. 지극한 겸손이 은총을 은총되게 합니다.
"겸손이란 마음의 고요함이다. 그것은 탐욕이 없는 상태이며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것이다. 또한 해로운 일에 과민 반응하지 않는 것이며 칭찬을 받거나 멸시를 받아도 동요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조용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써 침묵의 바다와도 같은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마음이다. 사람이 겸손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은총의 보금자리에 있다는 뜻이다."-앤드류 머레이
나중에 므비보셋은 자기의 입장에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도 겸손이라는 은총의 보금자리에 머물러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수염을 깍지 않고, 먹을 것을 금하고 의복을 빨지 아니하며, 자신을 낮춘 겸손 때문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한결같은 겸손 이것이 은총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조건입니다. 교만하면 은총이 화로 바뀝니다. 나라도 개인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각별한 삶을 살더라도 여전히 자신을 낮추어 은총을 누려야 합니다. 이것에 실수하면 회복의 길이 없습니다.
3. 마음의 평안과 용기를 주라(6절)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대답하되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요나단의 독자인 므비보셋의 이름은 본래 므립바알(바알의 영웅, 바알을 대적하는 전사)이었습니다(대상8:34). 므비보셋의 뜻은 "부끄러움을 해치는 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름이 이렇게 중요한가 봅니다. 어떻게 나중에 부끄러운 인생이 되어 그것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삶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요나단은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의 이름을 므립바알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알 숭배가 가득한 그 시대에 그 우상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견고하게 세우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자기 아들의 이름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자기의 신앙의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부끄러움을 깨끗이 씻는 인물이 되기를 원해서 일 것입니다. 우상 바알신을 쳐부순 영웅으로 신앙의 용장으로 살아가길 바랐던 자신의 꿈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 이름에 '바알'이라는 이방신의 이름이 있는 것이 좋지 않아서 므비보셋으로 바꾼 듯합니다. 아니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이후에 생명을 부지하려고 요단 건너 동편으로 도망가서 거기서 므비보셋이 스스로 이름을 바꾸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므비보셋은 이름의 뜻이 부끄러움을 해치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이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 부끄러운 인생일까요? 외모는 양 다리를 다 저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유모가 전란을 피해 아이를 안고 도망가다가 떨어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으로 볼 때 자신의 외모가 부끄러웠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웠습니다. 왕자로 왕이 되어야 할 사람이 이렇게 나라의 국경 밖으로 변두리로 피해 다니면서 숨어 지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못 견디게 부끄러웠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자신의 할아버지인 사울이 부끄러웠습니다. 요즘 친일파의 자손들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스스로 살기 위해 자신을 므비보셋이라고 하면서 부끄러움을 대적하며 해쳐나가면서 하루하루 자신을 추스리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사회적으로 개방적인 사람들, 즉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망설임이 없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24%나 더 행복하다고 한다.” -브라이언트 풀. 스노우-터렉. (일반적인 사회적 지원의 구성요소)
이런 의미에서 므비보셋 그의 삶이 많이 불행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사람, 므비보셋을 찾아서 왕궁에 불러 놓고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므비보셋이여!" 부끄러움을 해치는 자여! 이스라엘의 수치를 제거하는 전사여! 왜 그렇게 초라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은총을 베풀겠다고 합니다.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은총을 베풀겠다고 합니다. 사울 때문에 수치스럽겠지만, 요나단 때문에 당당할 수 있다고 격려합니다. 그러니 무서워 말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므비보셋의 비극적인 삶, 그 부끄러움이 가득한 삶은 므비보셋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었습니다. 유모의 실수였고, 역사의 회오리 한 복판에서 어쩔 수 없는 한 개인의 약한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실수가 손자를 이렇게 만들었기에 어쩔 수 없는 비극을 안고 한 많은 인생을 피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브비보셋과 아주 비슷한 운명의 사람이 있습니다.
■ 불란서의 화가 중에 뚤루즈 로트레크란 사람이 있다. 그러나 피카소도 놀라고 존경했던 이 로트레크이란 화가는 불행한 운명을 지닌 사람이었다. 불란서 명문 귀족의 마지막 후예인 로트레크는 1864년 유서 깊고 아름다운 백작가의 궁성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인 알퐁스 백작과 그의 어머니 아델의 자녀인 그는 날 때부터 지나치게 허약한 체질이었다. 로트레크는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화가로서의 재질을 보여 가족들을 놀라게 했으며 그때부터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가 다섯 살 나던 해 그는 어머니와 산책하던 중 길가의 웅덩이에 빠져 다리에 심한 골절상을 입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 사고 이후로 로트레크의 하반신 성장이 멈췄고, 그 이후 서른 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불행한 난쟁이로 살아갔다. 로트레크의 키는 겨우 140Cm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 굴욕적인 용모 때문에 그는 사람들의 모욕과 멸시 속에서 좌절한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불란서 앙브와즈 거리의 창녀촌에서 살았다. 창녀의 집이 그의 안식처였고 화살이었다. 이 불행한 운명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반드시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특히 그는 인생의 실패자들인 슬픈 창녀들의 모습을 수없이 그렸다. 그가 37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세계는 그를 위대한 미술가였다고 칭송했다. 대표작으로는 '물랑루즈에서', '목욕하는 여인', '세레랑의 젊은 루터' 등이 있고 물랑루즈 술집의 포스터를 비롯한 여러 포스터와 석판화를 남겼다. 그는 불행한 난쟁이의 몸을 지닌 채 모욕과 좌절 속에서 살아갔지만 신념을 버리지 않았으므로 세계적인 위대한 화가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드실 때 그렇게 계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마치 처음부터 그것이 뜻인 양 그렇게, 운명인 양 스스로 포기하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심지어 창녀들이 품어주어도 불행한 운명이 이렇게 부끄러움을 이기고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었다면, 다윗 왕이 품어주는 므비보셋이야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아니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당신을 품어주시고 사랑하신다면 얼마든지 부끄러움을 이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과거와 현재의 모든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행복해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다윗의 은총, 아니 그 분의 주이신 만왕의 왕 앞에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회복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 이름 그대로 부끄러움을 씻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이여!”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이름이 성도이며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름값을 못합니다. 스스로 절망할 수 밖에 없는 경험들이 있습니다. 므립바알, 바알 우상을 쳐부수는 전사의 삶은 고사하고 부끄러이 피해 다녀야 하는 므비보셋과 같은 삶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절망 가운데 숨어있던 므비보셋을 찾아 그의 부끄러움을 제거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숨어있는 우리들의 부끄러움을 제거하길 원하십니다. 자유하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면 포로(육체, 절망, 자포자기)된 자에게 자유를"(이사야 61:1),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오시고"(시편 34:18),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이사야 57:15). 하나님께서 므비보셋같은 우리를 바라보시는 마음이 이렇습니다. 우리는 이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아 므비보셋으로 부끄러움을 제거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
삼하 9:9-13
그때에 왕이 사울의 종 시바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모든 것을 내가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나니 그러므로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들은 그를 위하여 땅을 갈고 열매를 거두어 네 주인의 아들에게 먹을 음식이 있게 하라. 그러나 네 주인의 아들 므비보셋은 항상 내 상에서 빵을 먹으리라, 하니라. 이제 시바에게는 아들 열다섯 명이 있었고 또 종 스무 명이 있었더라. 그때에 시바가 왕께 이르되, 내 주 왕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대로 주의 종이 행하겠나이다, 하니라. 므비보셋에 관하여는 왕이 이르기를, 그가 왕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처럼 내 상에서 먹으리라, 하였더라. 므비보셋에게 젊은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미가더라. 시바의 집에 거하던 모든 자가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 이처럼 므비보셋이 계속해서 왕의 상에서 먹었으므로 예루살렘에 거하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었더라(사무엘하9:9-13).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성경의 인물을 대표할 만한 우정을 보였던 관계였습니다. 비록 요나단이 사울의 아들로서 다윗과는 결코 좋지 못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윗의 편에 서서 그를 보호하였습니다. 또한 나이가 많은 연장자였지만 언제나 동등한 입장에서 진정한 친구의 관계를 가졌던 자였습니다. 비록 그 우정의 관계가 결코 길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통하여 보여준 모습을 통하여 그 우정의 깊이를 가늠할 수가 있습니다.
본래 므비보셋의 이름은 “바알의 영웅”이라는 의미를 가진 므립바알이었습니다(대상8:34). 그러나 후에 다시 “부끄러움을 해치는 자”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므비보셋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했습니다. 아마도 바알 신에 대한 반감이 이름을 바꾼 계가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므비보셋이라는 인물은 어찌보면 비운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왕족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가 어릴 적에 할아버지였던 사울을 비롯하여 아버지 요나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족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졸지에 고아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불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섯 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 사울과 아버지 요나단의 형제들이 길보아 산에서 전사하게 되었을 때, 그의 유모가 므비보셋을 데리고 도망하다가 떨어뜨려 그의 두 발을 다 절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였던 사울과 아버지였던 요나단과 같이 전쟁에 나설 수도 없는 존재였으며, 매우 절망적인 상태에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를 더욱 가슴 아프게 만들었던 것은 그가 왕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혹시 누군가의 보복을 피해 요르단강 동쪽 로드발의 마길의 집에서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인이 되어 사람의 눈을 피해 도망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죄인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한 때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어진 아담이 그 죄로 인하여 두려워서 하나님과 천사들의 눈을 피해 도망하고,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이 결국에는 영문도 모른 채 죄인이 되어 절망적인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다윗이 왕위에 오르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다윗은 그의 옛 친구였던 요나단을 기억하여 그의 가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므비보셋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그를 왕궁으로 불러들였고, 사울의 모든 재산을 찾아 므비보셋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다우시이 사울의 후손을 해치려는 복수심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요나단과의 약속을 생각하여 그 혈통을 도우려는 의도에서 므비보셋을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는 므비보셋을 위해 과거 그의 집안의 시종으로 있었던 시바에게 재산을 관리하도록 하였습니다. 다윗의 선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는 자신의 식탁에 므비보셋을 앉혀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삼하9:1-13). 그것은 곧 므비보셋을 단순히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가 왕족으로서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피해 다닐 이유도 없으며, 오히려 왕의 후손으로서 영광스러운 삶을 살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게 된 순간 우리의 신분이 바뀐 것과 밀접한 관계를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자녀였고, 지옥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언제나 두려움 속에서 희망 없는 인생을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후에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심판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삶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사건이 므비보셋에게 일어납니다.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피신하게 되는 일이 발생되었을 때, 므비보셋은 예루살렘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삼하19:26). 이 때 시바는 다윗에게 다가가서 그를 모함합니다. 그는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집이 오늘 내 아버지의 왕국을 내게로 되돌리리라”(삼하16:3)고 말합니다. 다윗은 그의 말을 믿고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시바에게 건네줍니다.
후에 다윗이 다시 돌아왔을 때 므비보셋은 수염도 깍지 아니하고, 옷도 빨지 않고 왕 앞에 나갑니다. 왕이 므비보셋에게 자신과 같이 가지 않았던 이유를 묻자 그는 다리를 절어 종의 도움을 얻어 나귀를 타고 왕에게 가려고 했지만 오히려 종이었던 시바는 자신을 속이고 왕에게 자신을 모함했노라고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이후에 왕은 종인 시바의 재산을 다시 므비보셋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지만 므비보셋은 거절을 합니다. 오히려 종이었던 시바로 하여금 모든 것을 가지도록 말합니다(삼하19:1-30). 이것은 성경에게 므비보셋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 때는 므비보셋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시험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비록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가졌다 할지라도 마귀는 여전히 그들을 유혹하고 넘어뜨리려 할 것입니다. 그것은 때때로 매우 억울하기도 하고, 가슴 아픈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위로 되는 것은 진실함으로 주님을 대면할 수 있게 된다면 주님은 모든 것을 받아주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질 수 있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다윗으로부터 은혜를 입을 아무런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의 아버지였던 요나단과의 약속과 공로로 인하여 은혜를 입게 된 것 같이 우리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의 자리에서 함께 권세를 가진 자라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므비보셋의 마지막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는 자신에게 다시 주어지게 될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오직 다윗이 다시 왕권을 회복하게 된 사실만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언제나 다윗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를 하고 있으며,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다윗으로부터의 자신이 잊혀지는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눈이 그리스도에게로 향해 있어야만 합니다. 재물과 명예, 권세와 같은 것을 따라가면서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려 한다면 그는 매우 위험한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주님의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일에 힘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직 하늘을 소망 삼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영광스러운 생애를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