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의도는 그냥 의도로 끝나지 않고 행으로 이어기지 때문에 의도를 마음의 형성력 또는 마음의 의지라고도 한다. 선한 마음으로 선한 의도를 일으켰으면 선행을 하고 선업을 지어서 선 과보를 남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도는 업의 윤회를 돌리는 원천이다. 의도가 없으면 업의 굴레를 돌리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경전에서는 의도와 업을 동일시한다.
의도와 관련해서는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짜꾸빨라 비구의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다. 자꾸빨라는 그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눈먼 장님이었다. 어느 한 전생에 의사였던 그는 눈먼 사람을 치료해 눈을 뜨게 해주었지만 보은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그 사람을 장님으로 만들었다. 그 업보로 금생에 장님으로 살게 되었지만 수행을 해서 아라한이 되었다.
이런 사연을 가진 장님 아라한 비구가 경행을 하면서 발밑의 벌레들을 밟아 죽이는 것을 보고 다른 비구들이 “과연 그가 살생의 과보를 받을 것인가”를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죽일 의도가 없으면 살생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대답하셨다. 살생의 의도가 없으면 살생의 업을 짓지 않고 그 과보도 없다는 것이다.
어떤 경전인지에 대해서는 찾아볼 시간이 없어서 이 정도로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사실 제 스스로도 완전히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예전에 이 문제에 대해 사유한 이래 큰 진척이 없습니다.
아무튼 알아야 악한 것을 피하고 선한 것을 따를 수 있으니 아는 노력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독을 독으로 알지 못해서 만나고 추구하게 되는 재앙을 피해야 하니까요.
또 살아가면서 의도를 갖는 모든 순간에 선한 의도를 갖도록 노력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의 좋고 나쁨을 깨달아야 참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일의 좋고 나쁨을 깨닫지 못하고 저지른 나쁜 일의 과보가 없다는 것에 안주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어요.
만약 위의 아라한이 살생의 의도가 없어서 살생의 과보가 없다고 한들 자신의 일이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간 일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이 온다면 마음 아파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불보살의 자비가 그런 것일 겁니다.
우리가 악한 의도가 없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타인에게 악한 일이 된다면 악한 과보 없음에 안도하는 한편 그 의도없었던 행위마저 아쉬워지는 순간이 올 것 같습니다.
고민을 벗어나는 편안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_()_
첫댓글 감사합니다 ()()()
비유가 너무좋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많은 공부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