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여자들의 궁궐 기담』은 제4회 엘릭시르 미스터리 대상 수상자 현찬양 작가의 ‘궁궐 기담’ 시리즈의 두 번째 단행본으로, 「행운의 서신」을 비롯하여 총 일곱 편의 작품이 실린 연작 단편집이다. 수상쩍은 궁녀 규칙 조례가 궁녀들 사이에서 전해지고, 갖가지 괴력난신이 즐비한 조선 초 태종 대의 경복궁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오랜 가뭄과 더불어 궁 안팎으로 흉흉한 소식은 그칠 줄을 모르고, ‘행운의 서신’이 돌아다니면서 민심마저 최악으로 치닫는다. 궁녀들은 매일 밤 모여 괴기담을 나누고, 불길하고 기이한 이야기들은 궁궐의 이면에서 점점 현실감을 띄어간다. 임금이 갖가지 기우제를 치르며 비를 빌고, 임금의 명을 받은 이들은 서신의 기원과 진실을 알아내려 뛰어다니는 사이에도 기이한 사건은 계속 발생한다. ‘규칙’과 ‘금기’를 넘나들며 발생하는 사건들의 진상은 무엇일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 속 수수께끼는 해석하려하면 할수록 생각지도 못한 일면을 드러낸다.
괴력난신의 공간으로부터 퍼져나가는 기담
물론 많은 사람이 행운의 서신을 무시했으나 그럼에도 이것은 어떤 발 빠른 전령의 소식보다도 빠르게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호기심을 가둘 법률이란 없었던 까닭이다.
조선에 피바람을 일으킨 이방원이 왕위에 올랐다. 형제를 죽인 자가 임금이 되자 극심한 가뭄이 조선 땅을 메마르게 하고, 조선의 정궁 경복궁에는 흉흉한 일이 가득하다. 괴력난신이 궁궐 안을 배회하는 것을 목격한 궁녀들은 밤마다 한데 모여 괴담을 나누는데, 그러던 중 수상하기 그지없는 행운의 서신이 온 궁궐에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고양이매 우는 소리에 잠 못 이루던 임금은 자신의 후궁이자 부하인 신녕궁주와 왕이 되기 이전에 연이 있던 강수 선생으로 하여금 불길한 것들에 대한 조사를 맡기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진상 규명’이 아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바라는 방식의 ‘정답’만을 원할 뿐이다.
이야기의 힘은 무시무시하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삿된 것이라며 입 밖에 내기 꺼려하는 것들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비틀어둔 조선 초의 궁궐 안에 실존한다. 신녕궁주와 강수 선생이 서신에 담긴 수수께끼에 대한 각자의 해답을 찾아나가는 동안, 조선의 백성들 역시 제 나름의 답을 찾아낸다. 조선의 임금이 갖가지 기우제를 지내고 있다는 소식과 멀리 퍼져나간 행운의 서신이 지닌 함의에 대한 해석이 뒤섞이자, 기담은 곧 민심이 되어 이방원의 무릎을 꿇리고야 만다.
“임금이 덕이 없는가.”
형제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던 이방원은 행운의 서신이 퍼트린 ‘이야기’에 굴복하고 만다.
‘이름 없는’ 여자들을 위한 이야기
“궁주님의 환대에 감사드리옵고 항아님들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송구하오. 글쎄, 이 사람은 어찌 불려야 할지 알 수 없으니 소개를 하는 것도 어렵구려.”
‘궁궐 기담’ 시리즈의 이번 권은 여전히 많은 궁녀의 이야기를 담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모으고 해석하려 드는 신녕궁주와 강수 선생을 조명하기도 한다. 그들은 사이가 좋은 듯 좋지 않은 듯 기묘한 관계를 유지하며 갖가지 괴력난신과 기원이 수상쩍은 행운의 서신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헤치려 한다. 두 사람은 서로와 천천히 합을 맞춰가며 서신의 기원을 추적하는데, 진실에 점차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경복궁을 배회하는 어느 요괴에 대한 이야기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신녕궁주와 강수 선생은 나름의 방식으로 궁녀들의 괴담회를 엿듣기도 하는데, 어느 때엔가는 태상왕의 후궁이라는 자가 함께하기도 한다. 그는 여우 누이 이야기, 강철 이야기 등을 입에 담을 정도로 괴기담을 사랑하는 자이나 이름을 물어도 답해주지 않고 궁호조차 없다고 한다. 다만 누군가 자신을 짚어서 불러야 할 때를 위한 호칭이 필요할 것이니 그저 ‘원’이라고 불러달라고만 하는데…….
밤마다 열리는 궁녀들의 괴담회는 점점 그 열기를 더해가고, 여러 여인의 개인사가 드러나는 단편이 여럿 이어질수록 한 편의 거대한 이야기가 드러난다. 각자의 이름을 잃고 다만 괴력난신으로 불리는 한밤의 것들, 궁 안의 여자들에게 바쳐진 이야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