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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八章 도강난사(渡江亂事)
①
두두두두……!
"봉화요! 놈들이 우리를 발견한 모양입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고승후의 외침에 사군명은 멀리 남동쪽
하늘에 피어오르는 한줄기 연기를 보았다.
산을 내려온 지 두 시진 여.
놈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장강까지 도착하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예상보
다는 빠른 시간이었다.
"예정대로 초경진(焦徑津)까지 전속으로 달립니다!"
사군명 고승후와 함께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리던 서수림이 불안감을 드러
냈다.
"한데 옥수랑을 믿어도 될까요?"
"믿어도 될 걸세!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초경진이라는 작은 나루터에서 사공 노릇하다 시비 끝에 관원을 살해하고 대
평채의 식구가 되었다는 옥수랑의 수하가 미리 배를 마련해 놓겠다며 산을 내
려간 것이 어젯밤이었다.
몇 해 전 장강이 범람했을 때 마을의 반 이상이 쓸려간 초경진에는 흑마방의
이목이 미치지 않을 거라는 봉달(奉達)이라는 자의 말에 옥수랑이 서둘러 하
산시킨 것이다.
청화교의 사냥감이 되어 산중의 두더지 꼴로 지내면서도 동료간에 의리를 지
키며 복수를 다짐하는 대평채의 인물들이었다. 사군명은 배를 구하는데 쓰라
며 두둑한 은자와 팽상문이 타던 말까지 기꺼이 건넸고 봉달은 초경진의 위치
와 배를 댈 곳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산을 내려간 것이다.
사군명은 달리는 말 위에서 고개를 돌려 일행에게 다시 한 번 주의를 주었다.
"놈들이 가로막더라도 전속력으로 돌파합니다. 혹, 낙오되는 사람이 있더라도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니 모두 무사히 강을 건널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기
바라오!"
"가로막는 놈들은 이몸이 책임질테니 염려들 마시고 구덩이를 피할 생각이나
하면 될 걸세 들!"
마차 위에 몸을 묶고 엎드린 팽상문이 불룩한 자루를 가리키며 악을 썼다.
납작 엎드린 팽상문의 코앞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올라 질풍처럼 달리는
마차위로 흩어졌다.
마차 지붕에 홈을 파고 박아 넣은 작은 대롱에 벌써 불을 당긴 모양이었다.
앞을 가로막는 적에게 지체없이 뜨거운 선물(?)을 안기려면 바람 속에서 신속
히 불을 붙여야 했고 석회섞은 심지를 대롱 속에 채우면 능히 하루동안 불씨
를 간직한다는 것이 팽상문의 말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팽상문이 주의를 준대로 군표횡분탄이 터졌을 때 작지 않은 구
덩이가 패인다는 점이었다. 말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표사들이라 해도
혼전 중에 그 점까지 신경 쓰자면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하나 동료가 낙오되더라도 멈추지 않겠다는 사군명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입술을 굳게 다문 표사들의 얼굴에는 반드시 적을 돌파하고야 말
리라는 결의가 충만했다.
구화산과 장강의 길목인 규협성을 중심으로 장강을 건널 수 있는 나루터는 세
곳이었고 그중 남귀촌에서 가장 가까운 나루터는 황파진(黃波津)이었다.
그보다 조금 가까운 곳에 초경진이 있었지만 수해로 폐허나 다름없는 그곳에
는 변변한 배도 제대로 노를 저을 수 있는 사공도 없는 형편이니 무시해도 좋
았다.
간융이 올린 신호를 본 흑마방의 무사들은 모두 황파진 방향으로 몰려들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상관들을 두발로 뒤따르건만 졸개들의 속력이 그리 쳐지지
않을 정도로 전력을 다한 추적이었다.
모두 일곱 군데로 나뉘어 길목을 지키던 자들이 신호를 보자마자 경주를 벌이
듯 가장 빠른 속도로 황파진을 향해 달리는 것이다.
하나 석백송이 고르고 고른 준마를 타고 달리는 사군명 일행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규협성에 남아 분타를 지키던 십오륙 명이 바람처럼 내달리는 사군명
일행을 잠시 저지시켰을 뿐…….
"신호입니다! 적들이 가장 북쪽, 황성진으로 도주한다는 내용입니다."
분타의 망루에서 아득히 솟아오르는 연기를 발견하고 신호를 해석한 경비무사
의 외침은 팽현분타를 일시에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었다.
구화산을 둘러싸고 있던 포위망이 뚫렸다면 그들이 출동해야 하는 것이다.
"모두 출동이다!"
부분타주 최용악(崔瑢岳)의 명령에 분타를 지키던 자들이 모두 말 위에 올라
성문을 벗어나는데는 차 한잔 마실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예상치 못했던 일
이었음에도 팽현 일대를 다스리는 흑마방의 정예들답게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한 시진이나 달렸을까.
미친 듯이 말을 달리던 그들이 멈춘 것은 황파진과 초경진이 갈라지는 길목이
었다.
수하들을 독려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최용악이 멀리서 구름처럼 일어나는 흙
먼지를 발견한 것이다.
"멈춰라!"
엉겁결에 고삐를 잡아당기다가 말 등에서 떨어진 두어 명의 수하들을 돌아보
지도 않고 최용악은 눈앞에 우뚝 솟은 정자나무 위로 몸을 솟구쳤다.
거칠 것 없는 드넓은 들판 저편에서 먼지구름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광경이
확연히 보였다.
"……?"
수하들이 거칠게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고 올려다 볼 때, 최용악이 다급히 외
쳤다.
"마차 하나에 칠팔 명의 호위. 놈들이다! 길을 막고 싸울 채비를 해라!"
거리는 대략 사오리 남짓.
달려오는 기세로 보아 시간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굵은 나무를 잘라 길 위에 놓고 말고삐를 묶어라!"
기마술에 능한 자들이 제각기 달린다면 몰라도 마차가 있는 이상 그들이 타고
온 십여 필의 말을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쉽게 지나지는 못할 터였다.
"궁수들은 길가에 숨어 활을 쏜다!"
청화교에서 보낸 서찰에 따르면 적들 중에 화기를 잘 쓰는 자가 있다고 했으
니 무작정 막아섰다가는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할 우려가 있었다.
아쉬운 대로 궁수가 서넛 있지 않은가.
엄폐물 뒤로 숨어 화살을 쏘는 것이 일단 유리하다는 것이 최용악의 판단이었
다.
하나 적은 너무 빨랐다.
석백송이 거금을 아끼지 않고 사들인 준마들이 돈 값을 하는 것이다.
수하들은 임산부 허리 굵기 만한 나무를 벤다고 씨름하건만 어느새 확연히 전
해지는 지축을 울리는 진동.
꾸물거리다가는 손도 못쓰고 적을 보내야할 상황이었다.
"말을 베라!"
"예에……?"
반쯤 베어진 나무에 힘껏 칼을 내리치던 수하들이 영문을 모르고 돌아볼 때
최용악이 먼저 칼을 빼들었다.
"에잇, 변변치 못한 놈들. 말귀를 못 알아듣느냐!"
히히힝!
슈우욱!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말이 길게 울음소리를 뽑아내는 순간, 최용악의 검이
말 목을 쳤다.
털썩, 쿵!
한칼에 목이 달아난 말은 요란하게 땅을 울이며 길바닥에 쓰러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수하들이 자신이 타고 온 말의 목을 찌르고 베느라 수선
을 피웠고, 삽시간에 고깃덩이가 된 십여 필의 말이 흘린 피가 길바닥에 내를
이루었다.
궁수들이 화살을 먹이고 최용악을 비롯한 무사들이 말 피를 뒤집어쓴 흉흉한
모습으로 무기를 움켜쥘 때 사군명 일행은 어느새 오십여 장 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두두두두……!
전방을 볼 수 있는 건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세 사람과 마차 위에 올라타 먼
지를 피한 팽상문 뿐이었다.
"놈들이 말을 쓰러뜨렸소!"
바람결에 흩어지는 사군명의 외침에 팽상문이 악을 썼다.
"십오 장 앞에서 감속하고 터지면 그대로 돌진이오!"
제법 높고 두툼한 방어 벽을 만들었다지만 군표횡분탄이면 충분했다. 목책이
나 석벽이라면 몰라도 말 역시 살과 뼈로 이루어진 짐승 아니던가.
열근의 무게를 지닌 군표횡분탄을 이십 장 이상 던질 수 있었고, 사방 일장
여를 초토화시키는 위력을 지닌 물건이니 서너 개만 재빨리 던지면 길을 뚫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팽상문은 고개를 빼고 어자석에 앉은 구태열에게 외쳤다.
"자네가 잘 해야 하네! 자칫 말들이 놀라거나 장애물 때문에 마차가 튕길지도
모르네!"
"프흣, 걱정 마시오. 한꺼번에 열 필의 말을 몬 적도 있는 사람이오."
나직하게 뇌까리는 구태열의 말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지
만 그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자신감을 담고있기에 팽상문은 굳게 고개를 끄
덕였다.
선두에선 사군명을 필두로 모두 무기를 꺼내들고 거침없이 달려드는 모습에
잠시 질린 표정이던 흑마방의 무사들에게 최용악이 명을 내리는 소리가 벼락
처럼 들렸다.
"쏴라!"
피이융, 피융!
넓은 벌판을 메우고 울려 퍼지는 말발굽 소리가 귀를 멍멍하게 만들건만 날카
롭게 바람을 가르는 화살소리는 거짓말처럼 선명하게 들려왔다.
"에잇!"
휘이익!
말과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질풍처럼 달리는 표적을 맞추기도 힘들지만 성난
파도를 만난 조각배처럼 흔들리는 말 위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쳐낸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하나 세권표국의 표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머리 위와 오른쪽 무릎 옆으로 스친 화살에 안도할 틈도 없이 가슴을 노리고
날아드는 화살이 사군명의 검에 튕겨졌고 고승후와 서수림 역시 맹렬하게 검
을 휘둘러 화살을 막아냈다.
속도감과 긴장감으로 온몸의 신경이 팽팽히 곤두선 와중에도 적과의 거리를
헤아릴 때, 팽상문의 고함이 들렸다.
뭐라고 떠드는지 분명히 알아듣지 못했어도 뜻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기수의 뜻을 헤아린 말들이 맹렬한 속도를 서서히 줄이는 순간, 머리위로 뭔
가가 날아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죽어 널브러진 말 뒤에 웅크리고 있던
적들 가운데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피, 피해라!"
"빨리 서둘러!"
하나 황망하게 몸을 일으킨 그림자들이 길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지축을 울리
는 폭음과 함께 화염이 치솟았다.
팽상문이 거리와 시간을 정확하게 맞춰 던진 군표횡분탄이 폭발한 것이다.
콰쾅, 쾅!
"으아악!"
뒤이어 거의 동시에 터진 폭발음은 두 차례 이어졌고, 맹렬하게 치솟는 화염
사이로 사방으로 비산하는 핏덩이들이 섞여 있었다.
어느 것이 말의 잔해이고 어느 것이 조각난 사람의 시신인가……!
이 순간 사람과 말을 구분한다는 것은 무의미했다.
단지, 장애물이 없어졌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순간적으로 높이 치솟았던 화염이 가라앉고 드러난 참상에 스치는 감회라도
느낀다면 사치였다.
오직 말이 달리는 전면에 장애가 있는지 만을 살피며 사군명 일행은 바람처럼
내달렸다.
정오를 지난 시간.
바람처럼 들이닥친 간융과 그의 수하들은 처참한 장내의 참경에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으으……!"
"크아아……!"
곳곳에 흩어져 짙은 혈향을 풍기는 핏덩이들 중에 신음을 흘리는 자가 두엇.
쏟아지는 내장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사지를 푸들거리는 자가 있었고, 잘라진
다리를 망연히 들여다보며 멍한 얼굴로 광기 서린 신음성을 토하는 자도 있
었다.
간융은 그중 한 사내의 멱살을 움켜쥐고 따귀를 날렸다.
자신을 발견하고 표정이 변하는 걸 보면 그나마 정신이 있는 것으로 보인 까
닭이었다.
"정신차려라! 놈들은 어디로 갔느냐?"
비록 일장쯤 밖에 이어지지 않지만 살과 피가 뒤엉켜 짓뭉개졌는지 끈적한 점
액질의 흔적은 그의 예상과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크으, 분타주님……!"
"그래, 나다! 놈들이 어디로 갔느냔 말이다!"
그대로 두어도 곧 숨을 거둘 것 같은 반송장의 멱살을 움켜쥐고 흔드는 간융
의 기세가 야차처럼 흉흉했다.
"저, 저 쪽…… 초경진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사내의 손끝이 가리킨 방향을 노려본 간융이 죽어 가는 사내
를 내팽개치고 말 위로 몸을 날렸다.
"가자!"
몇 명의 수하를 남겨 부상자를 거두거나 시신을 수습하는 최소한의 자비도 없
이 황급히 말을 달리는 간융의 서슬이 시퍼렇건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애원의
눈길을 보내는 가망 없는 동료들의 목에 칼을 날린 자가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깁니다!"
무너진 선착장에서 상류로 십여 장쯤 떨어진 갈대밭에서 봉달이 뛰어나오며
손을 흔들었다.
"배는 어디 있소?"
사군명이 다가서자 봉달은 탁한 강물이 물이 찰랑거리는 갈대밭을 가리켰다.
하나 무성한 갈대들이 물결에 흔들릴 뿐 배같이 생긴 물건은 아예 보이지 않
았다.
"……?"
"뗏목입니다. 옛날 이웃 사람이 집 삼아 천막을 치고 살던 겁니다. 저걸 사서
더 넓게 만드느라 하루종일 걸렸습니다."
봉달이 가리키는 곳에는 과연 사방 오륙 장은 됨직한 뗏목이 탁한 강물 위에
잠길 듯 떠있었다.
"저걸로 강을 건넌단 말이오?"
사군명은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갈수기라 해도 강 건너 편은 보일 듯 말 듯 아스라이 가물거렸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탁한 강물은 도도히 물결치고 있지 않은가.
"웬만큼 큰배가 아니면 마차를 실을 수도 없고 흑마방 놈들이 설치는 판에 그
런 배를 구하기도 힙듭니다. 하나 저 정도 뗏목이면 충분합니다. 이만하면 물
살도 잔잔한 편이니 아무 문제없습니다."
봉달이 자신있게 얘기하자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제 와서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쨌든 강을 건널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자 모두 탑시다!"
사군명이 일행을 재촉할 때,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해연이 뾰족한 경호성을 발했다.
"아니, 당신……!"
해연의 외침에 중인의 시선이 마차 옆에 바짝 붙어있는 최흘에게로 향했다.
"누, 눈 먼 화살에 마, 맞았소……."
말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최흘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가 그의 다리를
타고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견딜 수 있겠나?"
핏기 없는 얼굴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최흘을 살피며 천두염이 물었다.
아무래도 죽음의 그림자가 뒤덮인 것이 살 가망이 없어 보인 것이다.
"그, 글쎄요. 바로 잡아 빼긴 했는데 놈들이 화, 화살촉에 독을 바른 모양이
오."
그때, 마차 문이 열리며 설운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쉴새없이 이어지는 긴장 탓일까. 창백해진 얼굴은 오히려 그녀의 기품을 더했
다.
"이리 올라오세요. 제가 치료하겠어요."
"그래요. 우리 군주님이 의술에도 조예가 깊으시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간 함께 한 고생이 마음을 누그러뜨렸는지 해연도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최
흘을 재촉했다.
하나 설운경과 해연의 따뜻한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사군명은 선뜻 승낙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들은 중요하기 이를 데 없는 표물이요, 그들은 표사였다. 배려나
보호는 당연히 그들의 몫이었다.
"그런 폐를 끼쳐도 될는지……."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사람이 죽어 가는데 폐라니요?"
아예 최흘에게 다가가 피로 얼룩진 그의 손을 잡아끄는 설운경의 태도는 단호
했다.
"어서 마차로 오르세요.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사군명은 그제야 최흘을 부축했다.
"그, 그럼……."
최흘이 마차에 오르고 일행을 모두 태운 뗏목이 미끄러지듯 강물위로 나아갔
다.
주인의 뜻을 헤아리는 명마들답게 넘실대는 강물이 뗏목위로 넘치고 물결에
뗏목이 흔들리건만 말들은 요동치지 않았다.
삿대로 배를 밀치고 강심으로 나아간 봉달이 익숙하게 노를 젓기 시작하자 사
군명은 마차로 다가갔다.
최흘의 상태가 걱정스러운 것이다.
그때, 마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사군명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이러실 필요까지……."
"가만있어요! 약이라고는 금창약 뿐인데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독기가 온
몸에 퍼지게 돼요!"
사군명은 조심스럽게 마차 창문을 넘겨다보았다.
순간 사군명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옷을 풀어헤친 최흘의 옆구리는 피로 뒤범벅이 되어 보기에도 끔찍했다. 한데
, 설운경이 서슴없이 입을 대고 상처를 빠는 것이 아닌가.
"으읍…… 퉤!"
백납처럼 하얀 얼굴과 온통 입가를 물들인 검붉은 피의 선명한 대비.
옛 이야기에 나올법한 귀신의 형상과 비슷한 그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리라고
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나 계속해서 최흘의 상처를 빨아대는 설운경의 모습은 무덤덤한 사군명의
가슴에 작은 물결을 일으킬 만큼 너무도 아름다웠다.
망연히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군명의 의식을 흔들어 깨운 것은 왕충삼의 일성
이었다.
"저기 좀 보시오!"
오늘 들어 처음으로 먹는 음식인 육포를 움켜쥔 왕충삼의 손끝이 가리킨 곳에
커다란 배가 세척이나 눈에 띄었다.
"흑마방 놈들이로구먼!"
"이런 젠장! 무슨 놈의 배가 저리도 빠른 거야!"
천두염과 서수림이 불안하게 투덜거리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커다란
배에는 창칼을 번뜩이는 무수한 무사들이 타고 있었고, 물살을 가르는 속도는
뗏목에 비하면 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들이 강을 건너는 일이 없을 거라고 예상했는지 조용하기만 한 강 건너를
바라보며 한숨 돌리던 그들에게 시시각각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백여 장 남짓한 거리.
강기슭까지의 거리에 비하면 세배에 달했으니 잘하면 화살 밥이 되거나 수중
고혼이 되는 길은 면할 것 같았다.
"뭐라도 잡고 노를 저어 주시오!"
얼굴이 벌개져서 노를 젓던 봉달이 소리치자 일행은 너나 없이 나뭇조각이며
검집 따위를 들고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뗏목이 한결 빠르게 물살을 갈랐지만 그들의 급한 마음을 달랠만한 속도는 아
니었다.
사군명은 국주가 말한 열 명의 조력자중 하나를 떠올리며 일행을 독려했다.
"강기슭에 닿는 즉시 전속으로 달립니다. 동쪽으로 백 리쯤 떨어진 곳에 사농
현(社農峴)이라는 고개가 있는데 그곳까지만 가면 놈들을 따돌릴 길이 있습니
다."
미처 허기를 달랠 겨를도 없이 다가오는 위기 때문인지 사군명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행에게는 그다지 실감나게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말이 백 리지 그들에게는 아득한 거리였다. 사람도 말도 지친 상태에
서 놈들의 추적을 따돌리고 무사히 백 리를 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프흐흣, 걱정 마시오! 까짓 놈들이 바짝 붙으면 또 한 번 뜨거운 맛을 보여
주지."
팽상문이 자못 호기롭게 말했으나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놈들의 공격을 받지 않고 강기슭에 닿는 것만도 다행인 판국이니 놈들 모르게
지열화통 따위를 설치할 여유도 없었고, 놈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극화소혼
탄에 당할 만한 거리를 유지할 리도 없었다.
놈들이 계속 추적하며 연락을 취한다면 사방에서 적을 맞아 오도가도 못하고
포위되는 신세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중원 천지에 거미줄처럼 깔린 흑
마방의 세력이 아니던가.
마차 문이 열리며 최흘이 기듯이 걸어나온 것은 좌중에 절망의 그림자가 깔릴
때였다.
"자, 잠깐. 방법이 이, 있소……."
풀어 헤쳐진 옷 사이로 보이는, 어느새 검붉게 젖은 하얀 천이 까닭모를 비장
감을 전했다.
"내, 내가 막으리다."
"무슨 소린가?"
천두염이 굳은 얼굴로 최흘을 바라보았다.
"독이 퍼져서 어차피 살수 없는 몸이오. 팽선배가 만든 물건을 나에게 넘겨주
고 가면 내가 놈들을 길동무로 삼겠소."
"안될 말이야! 설령 죽었다 해도 시신을 거둬가야 마땅하거늘 어찌 산사람을
두고 간단 말인가?"
정색을 하고 고개를 흔드는 고승후의 말이 좌중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오
직 자신과 동료를 믿고 천하를 떠도는 표사들에게 있어 강한 동료애는 미덕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었다. 서로를 믿지 않고 아끼지 않으면 무수한 난관을
헤치고 표행을 성공시킨 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것이다.
"여, 염병할! 괜히 저승 가서 후회하지 말고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거요.
우리 어머니한테 효도나 하고 갈 생각이니 말리지 마시오."
"그래도 안돼요! 독이 퍼졌다고 하나 약만 구하면 살수 있어요."
최흘을 뒤따라 마차 밖으로 나온 설운경이 좌중을 돌아보며 세차게 고개를 저
었다. 물기를 머금었으되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그녀의 눈망울은 강한 호소
력을 지니고 있었다.
사군명이 나선 것은 그때였다.
"약만 구하면 살수 있는 겁니까?"
"그래요. 살수 있어요."
"언제까지 구해야 합니까?"
낮게 깔리는 사군명의 무심한 음성에서 당성지의 일을 떠올린 설운경이 황급
히 최흘의 앞을 가로막았다.
죽을 이유가 없는 이십여 명의 사람을 죽일 때에도 사군명의 목소리는 지금처
럼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지 않았던가.
"두시진 아니, 잘하면 세시진 까지는 버틸 수 있어요!"
사군명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마치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좌중
에게 말한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는 건지도 몰았다.
"그때까지 약을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어느새 저물기 시작한 오늘은 물론이요, 내일 새벽까지 달려야 쉴 수 있는 곳
이 있었다.
그것도 아무런 사고도 없이 순조로운 여정이라야 하고, 석백송이 소개한 조력
자에게 도착한다해도 해독약이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
설운경은 허물어지듯 뗏목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침묵했다.
또 다시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자신의 가혹한 운명과 그런 운명에 맞
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설움을 삼키는 그녀의 안타까운 심정이
녹아있는 침묵이었다.
사군명은 똑바로 최흘을 바라보았다.
"최선배! 어머니는 걱정 마십시오."
점점 독기가 퍼지는지 최흘은 말문은 여는 것도 수월치 않아 보였다.
"고, 고맙소. 우, 우리 어머니 병이 낫거든 어디 괜찮은 여, 영감하나 골라
팔자도 고쳐주시고…… 크흐흐. 염치없지만 내 대신 아, 아들 노릇도 좀 해
주시오."
"약속하겠습니다."
사군명에게 고갯짓을 한 최흘이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힘겹게 얘기를 이
어갔다.
"구, 군주님…… 부디 무사히 북경까지 도, 도착하셔야 합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최흘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설운경의 등뒤에서 해연이 소리
죽여 흐느꼈다.
"흐흐흑……!
마치 몸과 마음이 전혀 별개인양 입술을 깨물거나 하늘을 쳐다보면서도 저마
다 노를 젓느라고 물살을 가르는 소리와 해연의 흐느낌이 뒤섞여 좌중을 묘한
서러움으로 덮었다.
정작 죽을 결심을 하면 담담해지는가.
좌중의 침묵을 깬 것은 최흘이었다.
"저, 저 곳이 좋겠소."
비틀거리며 뱃전으로 간 최흘이 가리키는 곳은 강기슭에서 조금 떨어진 제법
넓은 공터 옆에 서 있는 버드나무였다.
무성한 가지가 몸을 숨기기에 충분했고 강기슭에서 이어진 소로의 입구에 붙
어 있어 추적자들을 몰살시키기에 딱 알맞은 장소였다.
사군명과 눈길이 마주친 팽상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를 짧게 하겠네. 불을 붙이고 둘을 세기 전에 터질 걸세."
팽상문이 자루를 풀고 심지와 불씨를 만드는 동안에 뗏목이 강기슭에 닿았다.
"마차가 먼저 내려 놈들의 시야를 가릴 때 최선배가 나무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최흘을 앞에 태운 팽상문이 사군명의 지시대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여럿의
인마가 함께 움직이고 마차가 시야를 가리니 놈들에게 들킬 염려는 없었지만
행여라도 최흘의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최흘을 나뭇가지 사이에 앉히고 묵직한 자루를 건넨 팽상문이 굳은 눈길을 나
누고 말 등에 앉자마자 사군명의 음성이 강 건너까지 들릴 만큼 커다랗게 울
렸다.
"출발!"
어딘가 물기가 배어있는 목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말을 달리는 일행의 뒷모습
으로 삼십여장 떨어진 배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적의에 찬 수백 쌍의 눈동
자가 날아와 꽂혔다.
그리고…….
맑게 빛나는 한 쌍의 눈동자.
함께 저승길을 갈 운명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그러나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두 종류의 눈동자가 사군명 일행을 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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