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까기 마사오'와 '오카모토 미노루'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제시대 창씨개명 이름들, 어떤 뜻인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 해방 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이다. 몇몇 재중동포들이 기억하는 ‘마쯔모도’도 있지만 이는 사실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앞의 두 이름은 시기와 성격에서 차이가 있다. ‘다카키 마사오’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다음해인 1941년에 바꾼 것이다. 언론인 조갑제는 저서 ‘박정희’에서 “군관학교에서 한국인 생도들에게 1주일씩 휴가를 주며 ‘고향에 가서 창씨개명을 해오라’고 시킨 것이다. 퇴교 등 명시적 협박은 없었으나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동기생들은 말한다”고 밝혔다.
이 이름엔 원래 박정희 이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목(木)은 박(朴)에서, 정은 정희에서 따온 것이라서다. 이처럼 강압적 분위기에서 원래 이름의 흔적을 남기며 창씨개명하는 게 그 시대엔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카모토 미노루’는 다르다. 우선 조선 이름 ‘박정희’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재일 언론인 문명자씨는 1999년 발간한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서 “만주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기 마사오.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고 기술했다. 일본 백과 사전엔 박정희의 창씨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기록돼 있다.
이와 관련 김병태(79) 건국대 명예 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며 일본군 고급장교와의 관련성을 시사했다.
=======ps 박통의 친일행적=======
일제시대때는 다 그랬다는 하지말자, 독립운동가에게 죄짓는일이다.
박정희(朴正熙)
이동자; 이승만, 윤보선, 장면, 박정희, 최규하, 이전, 쪽방
반민족 문제 연구소 편집. 청산하지 못한 역사 1권. 청년사 출간
1940
만주 신경군관학교 입학
1942
만주 신경 군관학교 졸업-오카모토 이노부(당시 박정희의 일본 이름)가 어전강연이라는 답사를 함. 중국인, 조선인 생도 240명 가운데엣 수석을 하였기 때문에 답사를 한 것으로,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받쳐 사꾸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란 선서가 포함되어 있음.
1944
일본 육사 졸업-당시의 육사 교장 나구모 준이찌(南雲忠一)장군은 "다카키(당시 박정희의 일본 이름)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라고 하였다.
1944.7 ~ 광복까지
만주군 보병 제8단에 배치되어 단장의 부관으로 있으면서 팔로군 토벌함.
1946.9
조선 경비사관학교 2기로 입학
1946.12
조선 경비사관학교 졸업, 소위로 춘천 8연대 배치.
1948
군부내의 남로당 숙군 작업시 남로당 조직을 순순히 불고, 홀로 자신만 살아 남음.
1950
1948년 이후, 백선엽의 선처로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 근무.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나자, 소령으로 복직.
1953
일본 만주군관학교 출신인 만주군 장교 출신 들의 모임인 난성회(蘭星會)를 결성하고 박정희가 한국 동창회 명예회장이 됨.
1961
5.16 군사 쿠데타 일으킴.
평 가
자신의 입신을 위해 일제 권력에 편승하고, 개인적 야망을 위해 항상 정치판을 뒤집어 엎고자 했던 집념어린 쿠데타의 꿈, 경제적 성장을 빌미로 민주주의를 가차없이 억누름. 박정희의 이 모든 것이 경제성장이라는 허울로 가리워져 있다.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를 '일제가 망하지 않았다면 평생동안 일본관리를 하였을 기회주의자'로 비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