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란바토르(몽골)=브레이크뉴스 강원평창2018】 몽골을 방문 중인 재미 동포 김찬구 박사가 지난 5월 16일 목요일, 몽골 유비포럼(UB Forum, 회장 김종관) 주최로 울란바토르 시내 13구역 몽골씨름경기장 옆에 위치한 코리아하우스 레스토랑(대표 김미라)에서 열린 ‘5월 목요 학술 토론’에 강사로 초빙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에 걸쳐 특강을 진행했다.
▲ 몽골 유비포럼(UB Forum) 주최 재미 동포 김찬구 박사의 ‘5월 목요 학술 토론’ 특강 현장 1.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 | 유비포럼은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거주 중인 대한민국 국적의 재외 국민들에 의해 학술 교류 및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지난 2011년 창설된 모임으로서, 현재 몽골 파견 근무 중인 대한민국 정부 자문관, 정부 투자기관 및 기업체 대표, 그리고 몽골 현지 대학에 재직 중인 대한민국 국적의 교수 등 약 30여명의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주 목요일 저녁의 한-몽골 관련 정보 공유 목적의 회동과, 매월 1회의 ‘주제 발표’ 및 학술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 몽골 유비포럼(UB Forum) 주최 재미 동포 김찬구 박사의 ‘5월 목요 학술 토론’ 특강 현장 2.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 | 지난해 2012년부터 몽골을 드나들기 시작했다는 김찬구 박사는, 이에 앞선 지난 1989년부터 2005년까지 16년 동안 북한을 안방 드나들듯이 드나든 대한민국 대북 사업의 최고 베테랑으로서, 1991년 11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평양에 무비자(無Visa)로 입국, 북한 당국을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던 배짱과 호기가 충만한 재미 동포이기도 하다. 당시, 이에 경악한 북한 고위층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공화국 창건 이래 평양에 무비자 입국한 분은 김찬구 동무가 최초야요!’라는 발언을 내뱉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 몽골 유비포럼(UB Forum) 주최 재미 동포 김찬구 박사의 ‘5월 목요 학술 토론’ 특강 현장 3.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 | 특강에 나선 김찬구 박사는 ‘내가 처음 북한을 방문할 때만 해도 북한은 회색 안개로 덮여 있던, 쉽게 갈 수 없는 동토(凍土)의 나라였다’며 ‘1988년 7월 7일 대한민국 노태우 정부는 소위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을 계기로 해외 거주 동포들에게 북한을 자유롭게 방문해도 좋다는 법적 허가를 내렸다’고 전제하고, ‘1989년 1월 19일, 우여곡절 끝에 ‘주중국 북한 대사관’에 입국 비자 신청을 하고, 북한 평양과의 인연이 시작됐다’는 말로 특강의 모두 발언을 시작했다.
▲ 몽골 유비포럼(UB Forum) 주최 재미 동포 김찬구 박사의 ‘5월 목요 학술 토론’ 특강 현장 4.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 | 김찬구 박사는 ‘그러기를 어언 16년, 같은 동족이며 말이 통한다는 편안함 때문에 나 혼자만 북한 사업을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또한 내 자신이 기쁨과 슬픔, 배신감을 느낄 때도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무작정 정신 없이 평양을 드나들었다.’고 전제하고, ‘나는 평양에 가면 내 집처럼 따뜻했고 편안했기에 뭐가 되었든 더 도와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실망스런 일들이 생기기도 했지만 깨우쳐 주고 바깥세상을 알려 주며 양심껏, 진실된 내 마음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언젠가는 사업이 잘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앞으로 내달렸다.’고 발언을 이어 나갔다.
▲ 몽골 유비포럼(UB Forum) 주최 재미 동포 김찬구 박사의 ‘5월 목요 학술 토론’ 특강 현장 5.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 | 이어, 김찬구 박사는 ‘사업은 약속대로 이행되지 못하고 정체되어 지금까지 흘러 왔다. 돌이켜 보면, 대북 사업에 차질이 생겼다. 발전은커녕 후퇴했고 세계 정세와 남북 관계의 영향으로 북한 사업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나는 사업을 냉정하게 하지 못했고 북한 사업에 대한 실망과 안타까움으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며, ‘좀 더 함께 웃고 울고 싶었다. 다른 나라로 가는 아까운 사업들과 기술들을 북한 땅에 심어주고 싶었다. 이것이 나의 진실이었고 그리하여 같이 잘 살고 싶었다. 통일이란 단어는 아예 멀리 두고 우선 잘 살아 보자고 했었다. 이 일들을 꼭 내가 해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부지런히 다녔다. 나름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재물에는 욕심 없이 열심히 일만 했지만 이젠 아쉬움이 남는다. 제풀에 지치지는 않았지만 여력이 없어졌다. 앞으로 뭘 하고 어떻게 해야 평양을 다시 살릴 것인가?’가 참으로 걱정이라고 했다.
▲ 몽골 유비포럼(UB Forum) 주최 재미 동포 김찬구 박사의 ‘5월 목요 학술 토론’ 특강 현장 6.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 |
▲ 몽골 유비포럼(UB Forum) 주최 재미 동포 김찬구 박사의 ‘5월 목요 학술 토론’ 특강 현장 7.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 |
▲ 몽골 유비포럼(UB Forum) 주최 재미 동포 김찬구 박사의 ‘5월 목요 학술 토론’ 특강 현장 8.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 | 특강을 마친 뒤, 본 기자와 단독으로 만난 김찬구 박사는 ‘본 특강을 통해 나의 대북 사업 16년 경험을 유비포럼 회원들과 공유하고 싶었다’고 전제한 뒤, ‘최근 북한이 대한민국의 대북 사업에 대해 드러낸 작태(作態)를 보면서 근본적인 변화가 없음을 느꼈다’며, ‘나의 경험이 북한의 개혁과 개방에 작은 보탬이라도 된다면 나는 기쁘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 강외산 몽골인문대학교 교수(KBS 몽골 주재 해외 통신원 겸 본지 몽골 특파원)가 재미 동포 김찬구 박사와 자리를 같이 했다. ©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 | 김찬구 박사는 아울러, 대한민국의 대북 사업에 대해 최근 북한이 보여 준 작태(作態)를 지적하며, ‘(북한이) 장소만 제공하면 (대한민국이) 모든 걸 다 가져가서, 기술도 가르치고 외화벌이 방법까지 최선을 다해 가르쳐 주는데, 뭐가 그리도 불편하고 마음이 안 맞는지, 참으로 안타깝다’고 지적하고, ‘일반적인 상식이 안 통하는 그곳, 논리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나라, 내게는 너무나 고통스런 경험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며, ‘이해할 수 없는 사회 구조, 어긋난 생각들, 진실을 가슴 속에 안고 최선을 다하는 나의 마음을 몰라 주는 그 속마음에는 도대체 무엇이 자리 잡고 있으며 무슨 계산을 하고 있는지 안타까운 상념이 든다’고 덧붙였다.
‘북한을 나쁘게 몰아칠 의도는 전혀 없다. 나 자신의 성공을 목표로 미친 듯이 일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진실을 서로 알아야 하기에 허무하고 명예롭지 못한 지난 세월을 반추할 뿐’이라고 말을 이은 김찬구 박사는 ‘6.25사변을 어린 나이에 경험한 나로서는 동족상잔의 아픔을 잊고 북한에 진출하려고 결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며, ‘(대북 사업을 위해 애썼던) 나의 지난 세월에 대해 후회는 없지만 안타까움은 너무 많다. 진실을 몰라 준 동족이면서 다른 동족 같은 슬픔을 안겨 준 동족, 꾸준한 설득과 노력조차 허무하게도 배신감에 떨게 하는 지난 세월, 남은 생명까지 낭비하고 싶지 않아 이제는 거두고 새로운 길을 찾아보고 싶다’는 말과, ‘긴 해상 생활과 해외 이민 생활로 평생을 떠돌이처럼 사느라 어머님 제대로 한 번 모시지 못한 지난 세월, 그래도 내 동생 부부가 잘 모시고 효도해주어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는 말로 본 기자와의 대화를 갈무리했다.
<김찬구 박사 약력>∎1937년생 ∎진주사범학교 졸업 ∎국립부산수산대학교(현재 부경대학교) 졸업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졸업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동국로열(Royal)한의과대학교 졸업(침구) ∎원양어선 선장(1976년 미국 이민, 재미 동포 선장 1호) ∎Gulf Fisheries Comp 선장 ∎Golden Fisheries Corp' 선주 겸 선장 ∎U-Yak Fisheries, Inc 대표이사 겸 선장 ∎북한 평양 염화비닐신발공장 회장 ∎북한 평양 아식스 신발공장 회장 ∎주식회사 엘칸토 북한 담당 고문 ∎북한 평양 순평완구회사 회장 ∎북한 평양 광명성(光明星)농산물식품회사 회장 ∎사단법인 민간남북경협교류협의회 정책분과위원 ∎북한경제 100인 포럼 운영위원 ∎대한민국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대한민국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중국 국제침구의사 자격증 취득 ∎한국전통의학연구원 연구위원 ∎남미 에콰도르(Ecuador) 한국침술의료원 원장
한편, 원양어선 선장을 역임한 김찬구 박사는 40대(代)에 만학(晩學)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소재 동국로열(Royal)한의과대학교를 침구(鍼灸) 전공으로 졸업, 침구의사 자격증을 획득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런 배경이었을까? 김찬구 박사는 ‘(속담에 이르기를),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으나, ‘지금 고희(古稀)를 한참 넘긴 이 나이에 보니 ‘여러 우물을 파는 게 더 유익하다’는 의미있는, 그러면서도 아리송한 명언을 헤어지기 직전 본 기자에게 남겼다.
알렉스 강 몽골 특파원 alex1210@epost.go.kr copyright ©브레이크뉴스 강원평창2018,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