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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orts.news.naver.com/basketball/news/read.nhn?oid=351&aid=0000025796
점프볼 한필상 기자는 "박재규라는 선수가 있었다. 제2의 유재학이라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로 경복고 시절 알아주는 포인트가드였다. 스포츠신문에도 이름이 났을 정도로 기량이 훌륭했다"고 박재규를 추천했다. 김일두 MBC스포츠+ 해설위원은 “박재규 선배는 미남이었고, 실력도 좋아서 어린 시절부터 인기가 많았다. 나 역시 초등학생 때부터 선배 팬이었다. 동문들 사이에서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기량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그리 빛을 보지 못해 많이 아쉬웠다"고 기억했다.
연세대 은희석 감독은 이정래를 고교 시절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꼽았다. 이정래는 2000~2001시즌 LG에서 데뷔해 2005~2006시즌까지 활약했던 슈터다. 은희석 감독은 “추억의 이름인데, 허리를 다쳐서 은퇴를 빨리 했다. 중학교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발육이 빨라서 힘이 장사였다”며 “점프슛을 쏘는데 슛 거리가 없었다. 3점슛 라인 한 두발 뒤에서 던져도 정확하게 다 들어갔다. 대학 때 허리 수술을 한 뒤로 힘들어했다”고 이정래에 대해 설명했다.
kt 조동현 감독은 “허중이 잘 했다. 리딩 능력이 있으면서도 동료를 살려주는 패스도 할 줄 알고, 승부처에선 해결사 역할까지 할 정도로 슛도 좋았다. 모두 잘 했다”며 “허중, 김승현, 전형수 세 명의 가드 중 가장 낫다는 평가를 들었다. 한 때 강동희와 허재를 섞어 놓은 선수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했다.
고교 시절 알아주지 않던 선수에서 현재 농구 팬이라면 이름을 한 번 들어봤을 선수를 한 명 뽑는다면 김시래(상무)다. 김시래는 고교 졸업 당시 한 1부 대학에서 1년 유급 조건으로 입학을 허락 받았다. 그게 내키지 않았던 김시래는 힘겹게 명지대에 들어갔다. 농구를 시작할 때부터 성실했지만, 작은 신장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김시래는 결국 대학무대에서 빛을 발했다. 대학농구리그 첫 트리플더블을 작성하며 주목 받았다. 졸업을 앞두고 열린 농구대잔치에서 ‘시래대잔치’라는 수식어를 만들며 국내선수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프로무대에 데뷔했다. 유도훈 감독은 “재간이 있는데 발육이 늦은 선수들은 힘이 생기면 잘 할 수 있다. 그게 순간적으로 온다. 실력이 팍 느는 때가 있다”고 했다. 김시래가 딱 그런 경우였다.
실력을 떠나 많은 고교 선수들이 대학에 진학한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일부 선수들은 대학 졸업의 문을 넘어서지 못한다. 유망주로 각광받던 선수도 대학 입학 후 기량이 정체되거나 떨어지는 것은 물론 아예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팀 적응도 유망주들이 사라지는 이유 중 하나다. 에이스라면 혼자 공을 갖고 있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다. 고교시절까지 그런 농구를 하다가 대학에 오면 환경이 달라졌다는 걸 먼저 느끼게 된다. 고교시절 때처럼 혼자 공을 오래 갖다 보면 선배들한테도 혼나고, 회의감도 느끼게 될 수 있다. 감독이 작정하고 키워주려고 하지 않는 이상 그런 농구는 더 이상 하지 못한다. 저학년 때는 말이다. 그런 부분을 이겨내지 못하는 선수들이 더러 있다.
B관계자는 “득점을 많이 하는 선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 선수가 50득점 한다고 팀 성적이 나는 건 아니다. 동료와 같이 균형 있게 만들어야 팀 성적도 좋다. 그래서 중∙고등학교에서 고득점으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해서 대학에서도 잘한다고 보지 않는다”며 “고등학교 때 개인적인 플레이가 몸에 베었다. 그걸 원치 않는 팀이나 지도자를 만나면 기용 폭이 줄어들면서 더 발전하지 못할 거다. 대학은 고등학교와 달리 한 선수에 치중하기보다 고르고 균형 있게 하는 편이기 때문에 그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한다”고 예를 설명했다.
국가대표였던 안세환 KDB생명 전 감독은 178cm로 늘 팀 내 최단신이었다. 안세환 전 감독의 마음 가짐을 되새겨볼 만하다.
"대학 때도 좌절을 많이 겪었다. 작은 선수들은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단계를 올라갈 때마다 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 때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좌절하기보다는 '너희보다 잘 되겠다'는 독기가 필요하다. 나도 힘들게 이겨낸 경험이 있다."
29년간 경희대를 이끈 최부영 한국대학농구연맹 부회장은 “경희대에 입학하면 아이들에게 ‘농구가 금방 안 는다. 1~2년 안에 되는 게 아니니까 절대 농구를 포기하지 마라’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최부영 부회장은 그렇게 포기하지 않아서 성공한 예로 이현민(KCC)을 들었다.
“이현민 바로 위에 정재호가 있었다. 이현민이 정재호 때문에 대학 3학년까지 거의 못 뛰었다. 농구 하고 싶었겠나? 많이 흔들렸다. 이현민에게 ‘절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면 내가 책임지고 프로에 보내준다’고 했다. 3년 동안 끌고 와서 정재호 졸업 후 1년 만에 프로에 갔다. 이현민은 프로에 데뷔해 신인상을 받았다.”
22년간 단국대 감독을 역임한 장봉군 단국대 체육부장은 개인기를 강조했다. 여기서 개인기는 농구 기술적인 부분도 있지만, 생활 전반적인 개인기까지 포함한다.
“개인기 이야기를 한참 많이 했다. 브라질 축구 선수들이 왜 연봉을 많이 받냐? 개인기가 좋기 때문이다. 연예인도 개인기가 좋아야 대중들에게 많이 노출되고 결국 인기를 얻는다. 농구 선수도 남들이 못 하는 걸 특별하게 잘 해야 프로에 가서 오래 선수생활을 할 수 있다. 농구뿐만 아니다. 낮잠 자는 시간을 아껴서 영어공부를 하거나 자신에게 투자를 해서 개인기를 쌓아야 한다. 농구에서 눈을 조금 돌려 보면 세상의 할 수 있는 개인기는 꽉 찼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꿈을 이루지 못한다. 교수를 꿈꾸면 교수가 될 수 있지만, 교수가 되기 위해서 정진해야 가능한 것이다.”
고교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선수들은 대학을 거쳐 프로무대까지 안착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이것이 확실하게 보장된 길은 아니다. 한참 선배들의 기억을 되새기면 고교 무대를 평정했던 선수도, 전혀 이름이 없던 선수도 고교 무대와는 또 다른 대학 무대를 만나 변하고 달라졌다. 대학보다 더 냉정한 프로도 기다린다.
정말 좋은 기사지만 그 중에서 일부만 펐습니다.
예전 대학농구 라디오방송 설렘에서 들었던 김진유와 변준형이
팀농구를 할줄 모르면 박경상과 임종일의 사례처럼 빛을 보지 못할 거라는 부분을
기억하고 있어 그런 부분을 설명한 문구를 퍼왔습니다.
언제나 드래프트 때마다 어떤 유망주가 포텐이 터지느냐는 농구팬 사이의 최고의 관심거리죠.
이번에 프로에 들어온 선수들도 대부분 고교시절에는 어마어마했을 겁니다.
퍼오지는 않았지만 팀시스템 적응 외에도 부적응 사례로는 체벌이라든지, 여자농구의 경우는 성추행 등의 사건으로
농구부가 폐지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결국 아마추어 농구에 제대로된 지도자가 많아지는 것이 한국농구 발전을 향한 길일 거라고 봅니다.
이 기사뿐만 아니라 현재 네이버스포츠 섹션에 아마추어 농구특집 칼럼이 1부부터 10부까지 쭉 나열되어 있으니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모두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S. 굉장히 운이 좋았던 어떤 고교선수의 성공사례
http://sports.news.naver.com/basketball/news/read.nhn?oid=394&aid=0000000035
광주고 시절, 이정현에게는 ‘득점 기계’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 ‘이정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광주고는 우승 후보가 됐다’, ‘광주고의 모든 득점과 패스는 이정현의 손에서 나온다’는 기사 속 문장 또한 있었다. 그렇다면 본인이 생각하는 광주고 이정현은 어땠을까?
“광주고 때는 지방 팀이다 보니 서울의 팀들에 비해서 선수층이 두텁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내가 이끌어가는 부분이 더 많았다. 원래 가드를 봤지만 팀 사정에 맞춰 포워드도 보고 센터도 봤다. 혼자 거의 다 했으니 개인 기록이 좋았던 것 같다. 팀에서 나에 대한 공격 옵션도 많이 만들어줬기에 그런 기록을 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또한 그때는 내가 지금 체격이나 다름없었다. 고등학교 가드, 포워드 선수들도 다 나보다 덩치가 작았다. 그래서 힘으로 앞서는 경우가 많아 더 유리하지 않았나 싶다.”
체격적으로 유리했기에 당시 코치들은 이정현에게 포스트 업 연습을 많이 시켰다. 그렇기에 지금 이정현은 슈터라는 이름에도 포스트 업에 능한 선수가 됐다. “그때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다른 슈터들보다 조금 더 다재다능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 가지를 할 줄 아니 말이다.”
“그때는 농구가 재밌었다. 내가 하고 싶던 대로 다했으니 말이다. 1번(포인트가드)을 보고 싶으면 1번을 봤고, 다른 포지션을 보고 싶으면 그 포지션을 봤다. 동기들이 워낙 다들 착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줬던 것도 있다. 또한 그때 주장이고 팀을 이끌어가는 입장이다 보니 더욱 선수들이 잘 받쳐줬던 것 같다. 최다득점의 그날은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슛 컨디션이 좋았다. 그날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다 많이 했던 것 같다.” 이정현의 기억대로 이날 이정현은 55득점 속에 3점슛 6개, 6어시스트 7스틸을 만들었다. 1쿼터에만 24득점을 몰아넣었다. 전천후 활약. 이 다섯 글자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경기력이었다.
이후 이정현은 연세대로 진학했다. 이정현의 대학 시절을 찾아보다가 2008년, 이정현이 3학년 시절, 농구대잔치 프리뷰 기사에서 이러한 구절을 발견했다. ‘힘과 투지가 좋은 이정현이 오랜 방황을 뚫고 공격력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방황. 지금의 이정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글자였다.
“대학교 1학년이 되며 적응을 못했다. 그 당시 4학년에 (양)희종이 형, (김)태술이 형, (이)광재 형 등이 있었다. 형들이 너무 잘하다 보니 당연히 고등학교 때 내가 하던 농구가 안 되더라. 당황하기도 했지만 형들보고 배우는 점도 많았다. 그러다 형들이 졸업하고, 2학년 때 감독님 또한 바뀌며 적응을 많이 못했다.”
“2학년 때 아마 정기전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운동도 안 되고 너무 힘들어서 짐을 싸 광주로 내려갔다. 한 달은 놀았던 것 같다. 갔다 와서 운동을 다시 열심히 하긴 했지만 2학년 말에 무릎 부상을 심하게 당하면서 3학년 초·중반까지 경기도 많이 못 뛰었다. 운동량 또한 많아서 적응을 못하기도 했다. 그때가 정체기였다. 운동도 하기 싫었고, 힘든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이정현은 짐을 싸 고향인 광주로 내려갔다고 했다. 그런 그가 방황을 끝마치고 다시 농구선수로서의 생활을 이어가게 된 데에는 부모님이 있었다.
“그때 운동을 그만두고 집에 가서 2주 동안 하고 싶은 것 다 했는데도 부모님이 아무 말씀 안하시더라. 그러다 언제 부모님과 밥을 먹는데 아버지가 ‘이제 가야지?’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그 한마디에 ‘네 갈게요’라고 했다. 만약 부모님이 ‘야, 농구해’라고 재촉을 하셨으면 더 안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힘든 것을 아시고 보듬어 주시고 기다려 주셔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올라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이후 다시 연세대에 돌아오며 이정현은 정재근 전 감독의 농구 내·외적 가르침으로 스스로 본인의 가치를 올려야겠다는 다짐도 해나갔다. 그렇게 이정현은 마음을 가다듬고 ‘에이스’라는 수식어를 되찾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농구 외에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 그때 너무 힘들었고 자존감도 많이 무너져있는 상태였다. 2·3학년 때는 경기에 많이 나서지도 못했기에 선수라고 할 수도 없었다. 프로에 갈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그래도 3학년 후로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해서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이정현은 4학년, “연세대 4년 중 가장 화려했던 때”라고 돌이킬 수 있던 시절을 맞았다. 고려대와의 정기전, 전국 체전, 2차 연맹전에서 우승을 하며 승승장구 했다. 2차 연맹전 때는 수비상의 영예도 안았다. 특히 전국 체전에서 이정현은 25득점 7리바운드 2스틸을 기록하며 상무의 2연패를 저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지방 팀이다 보니 제대로 된 성적을 못 내고 ‘광주고 이정현’이라는 말만 들어서 아쉬웠던 광주고 이정현과 ‘정체돼 있다. 발전이 없다’는 소리를 들으며 프로에 대한 고민을 심각하게 했던 연세대 이정현.
지금의 이정현이 그때의 이정현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없을까? 이정현은 한창 방황하던 대학교 2학년의 이정현에게 이러한 말을 전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방황도 많이 했지만 잘 참고 버티며 농구를 안 놓아줘서 고맙다. 만약 내가 그 당시 아는 형, 친한 지인이었다고 한다면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말 해주고 싶었을 것 같다. 지금까지를 돌아보니 인내하고 열심히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다보면 언젠가 기회가 오더라. 할 수 있는 것이 농구 하난데 힘들다고 포기해버리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어려서 그런 것을 잘 몰랐지만 말이다.”
첫댓글 빅맨 기준 신장 205 이상
스탠딩리치 270, 윙스팬 215이상, 몸무게 95kg이상
하이터치 350이상 되면 무조건 고교 얼리 가야 됩니다.
우리나라 농구 역사상 이것을 충족한 선수는 서장훈 김주성 하승진 김종규 이종현이 있네요.
이종현은 맨발신장이 미달이고, 서장훈,김주성,김종규는 윙스팬이 215가 안될거고 스탠딩리치나 하이터치도 서장훈,김주성은 안될거라고 봅니다. 저 기준은 완전 탈아시아급 이지엔리엔 급쯤 되는거 같네요 ㅎ 저 기준의 90%만 되도 준 국보급입니다.
아마 신발 벗고 205인 센터는 대학에도 없을 듯
@엑소더스 말씀하신 부분에서 이종현은 신장제외 모두 통과 입니다. 서장훈 김주성은 신체적 전성기때는 블락 높이나 덩크높이를 봤을때 하이터치 350찍을수있다고 봅니다. 윙스팬은 짧을 지라도 스탠딩 리치는 둘다 270가까이 되구요. 이들이 국보급이라 불리울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기본적으로 신체조건과 운동능력이 좋았죠. 이지엔리엔은 저 기준을 훨씬 상회합니다. 그러니 느바를 뛴거구요. 하이터치로 365뜁니다. 제가 말한 기준으로는 느바가기 어렵습니다.
@모르는사람 네 현재는 없습니다. 그래서 여준석선수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현재 중2인데 신장은 맨발 197~201정도 되구요 지금도 덩크높이가 상당합니다. 리치는 그렇게 긴편이 아니지만 스피드도 상당합니다. 성장기가 어느정도 끝나는 3년후가 상당히 기대되는 선수입니다
@Jeff하디 Jeff하디님의 정보력은 대단하십니다. 프로농구는 물론이고 아마농구까지 꿰고 계시다니!! 저도 여준형 선수의 동생인 여준석 선수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Jeff하디 하이터치 350은 가능할수도 있겠네요. 서장훈이 윙스팬으로 손해가 많아서 좀 아쉽습니다. 안그래도 이지엔리엔 드래프트 자료 보고 왔는데 맨발 신장 211, 윙스팬이 222이고 스탠딩 리치는 자료가 없는데 케빈 듀란트랑 비슷한 사이즈이니 스탠링 리치가 9-2에 가까울거라는 답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맥스 버티컬 점프 측정자료가 38인치였기 때문에 하이터치가 무려 374가 넘네요
@맥컬럼 순전히 개인적인 견해로, 아쉽게도 여준석선수에 대해 향후 기대가 크질 않네요. 여준석선수는 초등졸업시 이미 195였습니다. 성장이 거의 다한걸로 보이고요. 지금은 압도적인 신체조건으로 동급최강이긴 한데, 한참 성장하고 있을 다른 선수들이 여준석선수와 신체조건이 비슷해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조금은 의문이 듭니다. 초중때 독보적인 신체조건을 앞세워 평정하다 고등이후 한물간 선수들을 종종 봐 와서요. 저는 안남중 차민석선수가 더 눈에 들어오네요. 이 선수도 맨발키 2미터 정도 되고, 키가 얼마나 더 클지 모르겠는데, 아직 다듬어 지질 않아 보여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내가왜센터야 친절하게 답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차민석 선수도 기대하면서 지켜보겠습니다.
'대학' 이란걸 포기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기량이 되는 선수들은 프로로 빨리왔으면 좋겠네요! 고졸로 힘들다면 '얼리'로 라도...!!
김익호......ㅠㅠ
김익호 선수는 고교체육교사로 임용교시를 합격했다고 하더군요
이 기사를 반추해 보면 엘리트 농구를 하는 학생 선수들 중에 즐거워서 하는 선수는 몇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네요 안타깝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정현이 이렇게 엄청난 선수가 될줄은 몰랐네요... 당시 2픽으로 왜 이정현이지?하던 의문부호가 지금은 당연시 생각되네요 이상범 감독의 유산으로 생각됩니다
그 때 류종현, 하재필, 민성주 중 1명을 뽑아야 한다고 했었죠...이정현 뽑고 이상범 감독이 팬들에게 비난을 많이 받았었고...
그리운 이름이 되었네요 이상범 감독 ㅜㅜ
@superookie 글죠 이러한 소문도 돌았었죠 하재필을 픽한다고.. 만약 박찬희, 하재필 픽이였으면 ....ㅋㅋ
참 좋은 글입니다. 박경상과 박재규와 임종일의 사례와 이정현과 김시래의 사례가 극명한 대비를 이루네요. 후배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미국에서도 고교시설 슈퍼 유망주가 그저그런 선수가 되는 케이스가 많죠. 종목을 불문하고 유망주의 미래를 예상하기는 쉽지않습니다.
허중 추억돋네요 조선일보에 제2의 허재를 꿈꾸는 꿈나무 라고 기사떴던게 기억납니다 연대간건 아는데 그후부터 소리없이 사라진
그래도 드래프트 1라운드로 프로에 가기까진 했죠. 대학 때도 연세대가 키워보려고 노력도 했고요. 하필 그때 이상민, 조성원이 버티는 현대로 가서 ㅠㅠ 프로에서 보여준 게 없으니 상무도 떨어지고 강원도 양구에서 현역으로 복무 후 팀에 복귀 했지만 뭐 한 것 없이 은퇴한 걸로 압니다.
@팻 라일리 아 케씨씨까지갔었군요 하필 전성기 케씨씨로간게 불운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