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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해질 무렵, 안경성 안의 작은 주루.
구석 탁자에 앉아 얘기하는 병색이 완연한 중늙은이와 한눈에도 부유한 상인
으로 보이는 화복의 중년인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갑자기 부쩍 늘어나기 시작한 흑마방 무사들에 관한 얘기로 저마다 정신이 없
는 것이다.
구석 자리의 두 사람이 조용히 입에 올리는 화제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
았다. 아니, 그들이야말로 지금 안경성 일대에 몰아닥친 풍운의 조짐을 만든
사람이니 그들이 다른 얘기를 속삭인다면 그게 비정상일지도 몰랐다.
"흑마방 놈들이 이렇게 설치고 다니는데 괜찮겠습니까?"
"가주께서 나에게 전권을 맡기셨네. 내 이미 본 가 제자들을 모두 동원했으니
걱정 안 해도 되네."
"……."
중년인의 말에 병색이 완연한 중늙은이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고개만 끄
덕거렸다.
세가에 충성을 맹세하고 제자가 된 이상 세가의 총관 금진후는 그의 사부나
다름없었다.
석백송의 신패를 들고 나타난 표행을 맞아들이자마자 세가에 연락을 취하고
명령을 전하러온 정현을 만난 게 불과 이틀사이의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이틀.
세가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들을 쉬게 하라는 명령대로 그들의 출발을 미루
는 중에 아무래도 주위가 심상치 않아 살펴보니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온통
흑마방의 인물들이 들끓고 있는 것 아닌가.
하나 금진후가 직접 나타나서 확언을 하는 이상 석백송과의 의리를 지키는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금진후를 만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변장한 채 성내로 들어온 강현괘는 한
결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언제 출발시키면 됩니까?"
"그게……."
금진후는 잠시 뜸을 들였다.
도룡객 곽영에게 들리리라 예상하고 몇몇 가신들과 함께 무호현에서 대기하던
중 강현괘의 연락을 받았으니 절반은 실패요 절반은 성공이었다.
하나 연락을 받은 즉시 세가의 가신 중 가장 용모가 독특한 곱추 정현을 보내
강현괘와 만나게 한 결과는 완벽한 성공이었다.
흑마방 놈들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백주대낮에 정현이 돌아다니는 것을 발
견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예상대로 놈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어 안경성 일대는 온통 흑마방의 잡졸들 천
지였다.
지금 출발시켜도 흑마방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은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갈천
위가 직접 나선 것 같다는 무적비찰의 보고가 있으니 출발을 늦추는 게 확실
했다. 기산이 멀다고는 하나 갈천위가 직접 나선 이상 늦어도 내일까지 도착
하는데는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리고, 애초의 예상과 달리 흑마방 놈들을 멋지게 따돌리는 표사들의 능력이
자꾸 마음에 걸리는 이상 역시 갈천위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현명했
다.
생각을 정리한 금진후는 자신있게 말을 이었다.
"내일 밤이면 본가의 제자들이 도착할 것이니 그때 출발시키게."
"내일 밤…… 알겠습니다!"
사농현의 고갯마루에 잇닿아 지어진 망의장 후원에 가득한 밤 기운이 촉촉하
게 옷깃을 파고들었다.
늦은 봄밤의 정취를 노래하는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교교하게 내리는 달빛과
어우러져 한껏 평화로운 밤이었다.
하나 규칙적인 걸음으로 넓은 마당을 산책하는 사군명의 심사는 그리 평화롭
지 못했다.
그처럼 원했던 휴식도 하루 이틀 지나니 오히려 불편했다.
몸은 활력에 넘쳤고 하루빨리 표행을 끝내야 한다는 조바심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들었다.
망의장이 안전하다고 해도 흑마방과 싸움이 시작된 이상 마음을 놓을 수 없었
다.
그렇다고 넉넉지 않은 살림이라는 게 눈에 보이는데 끼니마다 진수성찬을 차
리고 말들에게까지 각별히 신경 쓰는 강현괘가 더 쉬었다가라고 청하는데 뿌
리치기도 쉽지 않았다.
아무리 국주와 각별한 사이라 해도 흑마방의 표적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
수하면서까지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 흔치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탓이었다.
게다가,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모처럼 편안한 휴식처를 만나 긴장이 풀린 탓인지 불평 한 마디 없이 꿋꿋하
게 잘 견디던 설운경이 그만 자리에 눕고 만 것이다.
이래저래 사군명은 마음만 분주할 뿐이었다.
"상황이 어떻든 최선을 다할 뿐이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뇌까린 사군명이 걸음을 멈추었다.
마음을 다스리려는지 검을 뽑아들고 호흡을 가라앉히는 사군명의 귓가에 문득
, 후원으로 다가서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저……."
해연이었다.
"무슨 일이오?"
처음에 하찮은 표사 나부랭이라고 깔보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점점 사군
명이 어렵기만 한 해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군주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
설운경과의 독대(獨對).
길을 떠난 이후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사군명은 해연을 따라 장원 안쪽의 가장 넓고 깨끗한 내실로 걸음을 옮겼다.
은은히 타오르는 황촉불이 비추는 방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전해지는 향긋한
다향(茶香).
말끔하게 정리된 방 가운데 탁자에 앉아 차를 다리던 설운경이 조용히 일어나
사군명을 맞았다.
"할 일이 많으실 텐데 오라고 청했습니다."
"아닙니다……."
도착한 날부터 자리에 드러누워 식음을 전폐하고 앓기만 하던 설운경이 단정
한 모습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것에 놀란 사군명은 조심스럽게 설운경을 안색
을 살폈다.
생각처럼 위중한 상태는 아닌 듯해도 창백한 얼굴에 야윈 모습이었다.
하나 힘든 여정에 끊이지 않고 이어진 몸과 마음의 충격도 그녀의 기품은 손
상시키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맑고 투명한 눈망울은 고뇌와 갈등의 그림자마저 숨김없이 옅게 드리웠으나
그래서 더욱 아름다웠다.
세사에 초탈한 선인이 아니오, 그저 자신의 천성과 의지로 감당하기 힘든 어
려움을 이겨내려 애쓰는 젊은 여인의 모습이 소리 없는 웅변이 되어 가슴에
전달되는 것이다.
사군명이 자리를 잡고 해연이 방에서 나가자 설운교가 차를 따랐다.
"동료 분까지 잃으시면서 여러 가지로 애써 주시는데 고마운 마음을 전할 길
도 없고 해서 차라도 대접하고자 모셨습니다."
자그마한 찻잔을 데우는 차보다 더욱 따스하고 향기로운 마음결이 소리 없이
전달되었다.
"공연한 말씀을…… 당연히 저희들이 해야할 일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한 번도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거나 남과 비교해 본적이 없는 사군명은 문득
얼굴도 보지 못한 금사익이라는 사람이 부럽다는 느낌에 스스로도 화들짝 놀
라며 얼굴을 붉혔다.
"죄송스럽습니다만 제가 칭병하고 드러누운 것은 비단 심신이 고단해서가 아
닙니다."
의외의 말이었지만 난데없는 느낌으로 스스로가 부끄럽던 사군명에게는 차라
리 구원이었다.
"무슨 말씀이신 지?"
"실은 중원으로 향할 때 제 안위가 걱정되어 남모르게 뒤를 따르겠다고 하신
분이 계십니다."
아무리 놀라운 말이라도 설운경의 입을 통해 듣게 되면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아름다운 노래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사군명은 편안한 얼굴로 설운경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한데, 저를 노리는 사람들의 위협이 점점 거세지니 그 분을 기다리는 것이
도움이 될 듯 합니다. 그 분의 능력으로 보아 하루 이틀만 더 머물면 능히 찾
아오실 겁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사군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개 시비에 불과한 해연도 쉽게 볼 수 있는 고수가 아니었다. 행여 자신들의
자존심이 상할까봐 설운경이 조심스럽게 말한 그 사람이 흑마방의 위협 속에
서 설운경을 지킬만한 능력이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표국을 떠날 때부터 은밀히 움직인 탓에 행적을 놓쳤다고 해도 흑마방과의 마
찰이 계속된 이상 설운경이 말한 사람이 자신들을 찾아오는 것도 큰 어려움은
없을 터였다.
사군명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저희들은 표국의 명예를 소중히 생각하고 표행의 성공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각오가 돼있는 사람들입니다만 허명(虛名)을 떨치는데 욕심이 있는 것
은 아닙니다. 어느 분이라도 군주님의 안전을 위해 도움을 주신다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게 마땅합니다. 더욱이……"
흔들리는 촛불 탓일까.
잠시 말을 멈춘 사군명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그늘이 스쳤다.
"군주님이 믿고 기다리실 만한 분이라면 봉래도 최고의 영웅이 아니겠습니까?
진지한 상황이 아니라면 실소를 자아낼 만큼 필요 이상으로 비장한 어투.
사군명의 속마음을 어렴풋이 알 듯도 했지만 그리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설운경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수십 년 전부터 그분은 봉래도에서 누구나 따르고 존경하는 영웅이
시지요."
"수십 년 전부터요……?"
마음이 밝아지면 눈도 밝아지는가.
갑자기 방안의 경물이 또렷해지는 것을 느낀 사군명의 눈에 살짝 고개 숙인
설운경의 하얀 목덜미가 발그레 물드는 것까지 보일 정도였다.
찰나인 듯 영겁인 듯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시간.
최소한 이 순간만큼은 봉래도의 군주와 고아 출신의 표사라는 천양지차(天壤
之差)의 신분차이도 없고, 천하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분아래 정략 결혼을 감
수하는 안타까운 순종도 목숨을 걸고라도 표행을 성공시켜야 하는 사명감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극히 미미하지만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순결한 감정의 교류.
미세한 숨결이 서로의 가슴에 태풍이 되고 천둥처럼 울리는 경이로운 느낌.
하나 낯선 것은 두려운 법.
사군명은 여름날 냉수 들이키듯 찻잔을 비우고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럼 그분이 찾아올 때까지 더 머물도록 하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왠지 죄를 지은 것만 같은 마음을 감추려함인가.
사군명은 더욱 정중하게 예의를 표하며 방을 나섰다.
일렁이는 촛불만 가득한 방안.
단 한치도 넓어졌을 리 없건만 갑자기 밀어닥치는 허전함에 민망해진 설운경
이 공연히 치울 것도 없는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대문옆 마당 한 구석.
표사들이 횃불 아래 모여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거 편하게 먹고 마시니 몸은 편하다만 마음은 영 가시방석이구만……."
칼날을 갈면서도 이리저리 불안한 눈길을 돌리는 서수림의 푸념에 천두염이
느긋하게 대꾸했다.
"푸흐흐, 마음 공부가 모자라니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게지."
"이런, 네미랄! 얼치기 도사 같은 소리하려면 산으로 들어가지 왜 칼차고 표
사질인가?"
"모르는 소리. 참된 도는 사람 세상에 있는 법. 산중에 틀어박혀 수도한다고
하는 자들은 내 보기에 도를 깨우치는 게 아니라 억지로 눈을 감는 것이나 다
름없네."
구태열과 함께 마차바퀴를 손본다고 낑낑거리던 왕충삼이 끼어 들었다.
"자네 이번 일 마치면 어디 큰 성읍에다 나랑 같이 도관(道觀)이나 하나 차리
세. 넋 떨어진 인간들한테 적당히 헛소리 섞어가며 구슬리면 그게 웬만한 장
사보다 훨씬 돈벌이가 될 걸세."
왕충삼의 나서는데 팽상문이 가만있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이왕이면 항주에다 차리지 왜?"
"저런 돌대가리하고…… 도둑놈도 자기 동네는 피하는 법인데 고명하신 도사
가 돼서 사기를 치려면 모르는 곳으로 가야지! 안 그러냐, 천가야?"
"명색이 재상 가의 후예라는 자가 혹세무민(惑世誣民)해서 돈벌이 한다는 게
부끄럽긴 한 모양이지?"
고승후가 불빛 아래로 다가오는 사군명을 발견한 것은 왕충삼이 당장 주먹질
이라고 할 양으로 씩씩거릴 때였다.
"어서 오십시오. 출발시간은 정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루 이틀 더 머물기로 했습니다."
고승후는 못내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흑마방 놈들이 극성스럽게 뒤지고 다닐 텐데요?"
"어차피 북경까지 가려면 지겹게 볼 놈들이오. 까짓 거 다들 모이라 그래, 한
꺼번에 상대하면 더 좋지!"
왕충삼의 말은 호기라기보다 절망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사실, 이제껏 무사한 것만도 천행이었다.
만약 팽상문이 아픈 과거를 무릅쓰고 잊었던 물건을 만들지 않았거나, 최흘이
목숨을 던지지 않았다면 아직 살아남은 사람이 있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할 상
황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왕충삼이 주눅들지 않고 헛소리나마 지껄이는 게 어쩌면 가상한지도 몰랐다.
하나 사군명은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객기보다 표행이 우선 입니다. 우리가 표행을 성공시키지 못한다면 최선배의
희생도 개죽음일 뿐입니다!"
"……."
사군명의 준엄한 질책에 일행이 침묵하는 것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권위 때문이 아니었다.
조금의 과장도 거짓도 없는 진실함이 전해진 까닭이었다.
"죽기를 각오했다고 죽음을 자초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기필코 표행을 성
공시킬 것입니다."
태산같은 확신을 담은 사군명의 말에 일행의 눈이 빛났다.
"화기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위력이 강한 놈들은 최가에게 대부분 넘겼지만 아직 쓸만한 물건들이 많이
있소이다."
팽상문의 자신 있는 대답을 들은 사군명의 시선이 구태열에게 향했다.
"마차는 괜찮습니까?"
"흔들리거나 부러진 바퀴 살이 몇 개 있었는데 모두 고쳤습니다."
사군명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봉달이라는 자에게 한 필 내주었습니다만 남아있는 말들은 모두 터럭하나 다
치지 않고 멀쩡합니다."
출신이 마구간지기인 사군명이 표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발할 때부터 말
을 관리하는 일을 맡은 것이다.
"어려움은 예상대로 지만 뜻하지 않은 도움의 손길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최선을 다한다면 표행은 반드시 성공하리라 믿습
니다!"
사군명이 일행에게 설운경을 보호하기 위해 온다는 봉래도의 고인에 대해 애
기하자 좌중에는 새로운 희망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사군명의 말대로 흑마방의 추적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나 국주가
배려한 휴식처가 있다는 것도 도착해서야 안 그들에게 무적세가도 두려워하
는 봉래도의 고수가 합세한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호재였다.
서로에게 향하는 그들의 시선이 굳은 결의를 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더 없이 극진하게 대접하는 강현괘가 본인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불러들인 위
험의 실체를 몰랐기에.
그 결과, 흑마방주 갈천위까지 직접 나선 사실을 상상도 못하는 그들이었기에
이른 아침.
사군명은 누군가 방으로 들어서는 느낌에 눈을 떴다.
하루도 쉬지 않은 운공으로 내공이 일취월장한 결과요, 잠이 들어도 긴장의
한끝을 놓지 않은 탓이었다.
"놈, 제법 귀가 밝구나."
"위표두님!"
소리 없이 창을 넘은 사람은 위사무였다.
"여기까지 어떤 일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춘다고 허둥대는 사군명을 보고 위사무가 껄
껄 웃었다.
"허허허. 호랑이가 오는 줄고 모르고 잠만 퍼질러 자는 가엾은 토끼새끼를 깨
우러 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갈천위가 오고 있다. 어서 떠나거라!"
"그게 누구인지……?"
위사무는 어이가 없었다.
"쯔쯧……. 흑마방주 흑룡마제 갈천위가 네놈들을 치려고 직접 오고 있단 말
이다!"
"예에……?"
진작 또렷해진 의식과 달리 아직 나른한 잠자리의 여운이 남아있는 몸뚱이의
모발 하나까지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위사무는 사군명의 기색을 살폈다.
경악으로 동공이 확대된 지경이지만 두려움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야 정신이 드느냐?"
위사무는 갈천위가 온다는 소식에도 두려움을 보이지 않는 사군명이 기특하기
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네놈들이 떠난 후 계속 뒤를 밟았다."
"……!"
위사무의 태연한 한 마디 속에 담긴 깊은 애정이 사군명에게 고스란히 전해졌
다.
"프흐흐. 백 리도 못 가서 놈들에게 당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제법이더구
나. 화약을 쓰는 거며 산 도둑놈들의 도움으로 흑마방의 허를 찌른 것도 좋았
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위사무가 정이 가득한 눈길로 사군명을 바라보았다.
"호영채의 반편이들을 단호하게 처리한 것은 아주 훌륭했다. 평생 자책과 후
회를 각오하는 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거늘……. 나는 네가 자
랑스럽다."
사군명은 위사무가 그들의 행동을 모두 살피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당성지에서의 일을 나무라지 않는 것이, 그의 심중을 헤아려 던지는 따뜻한
위로가 너무나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마음속에 가득했던 먹구름이 걷히는 느낌.
"하나 갈천위는 너희들이 상대할 수 있는 위인이 아니다. 이미 근처 백 리 이
내에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지만 한시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그나마 목숨을 건
질 수 있는 길이다."
"천라지망이라니요? 놈들이 저희가 있는 곳을 안단 말입니까?"
"물론이다. 포위망이 이곳 망의장을 중심으로 겹겹이 퍼져있고 갈천위가 온다
는 얘기도 놈들의 우두머리가 하는 얘기를 엿들은 것이다."
위사무는 그밖에도 이번 표행을 둘러싼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대해 느끼는 바
가 있었지만 아직 확실치 않은 일이라 입을 열지 않았다.
"갈천위가 표물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니 놈들은 적극적으로 살
수를 펼치지 못한다. 뭉그적거리는 놈들 정도는 잘 하면 헤치고 나갈 수 있을
터이니 어서 서둘러라. 난 갈천위의 행보를 저지하겠다."
"위표두님……!"
위사무의 무공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하나 흑마방주 갈천위를 단
신으로 막겠다는 것은 무리였다.
"허어, 이 놈 좀 보게! 시골구석의 대장장이라고 날 무시하는 게냐?"
짐짓 노여운 표정을 지은 위사무는 이내 일 점의 과장도 없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갈천위와 무공을 겨루는 것이라면 전혀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다. 놈이 수하
들을 개떼같이 이끌고 오니까 문제인데……. 그렇다 해도 정면으로 싸우는 것
이 아니고 놈들의 발길만 지체시키는 게 목적이니 내 힘으로 충분하다."
만일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설령 위사무가 과거 구파일방의 제자들 중 가장
뛰어난 기재요 감히 금천휘와 비무를 결심할 정도로 대단한 무인이었다는 사
실을 아는 사람이 들었다 해도 위사무의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였다
갈천위가 흑도의 방파들을 복속시키면서 각파의 비전절예를 습득해 그의 무공
이 끝을 모른다는 소문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하나 현재 위사무의 능력은 그 자신만이 알고 있었고 사군명은 그의 말을 굳
게 믿었다.
천하에서 위사무의 말이 치기 어린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단 두 사람
이 지금 장내의 인물들이었기에 분위기는 더 없이 진지했다.
사군명은 깊게 허리를 숙였다.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국주가 상금을 두둑이 걸었다고 들었다. 나중에 술 한잔 받아주지 않으면 네
놈의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릴 테니 그리 알거라……."
빙그레 웃으며 바람처럼 사라지는 위사무의 뒷모습을 쫓은 사군명의 눈가에
뿌연 습막이 드리웠다.
"아직 출발하기엔 이르네. 밤이 되어 이목이 없을 때 출발하는 게 좋을 걸세.
건량도 아직 준비가 안 됐거늘……"
"아닙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으니 해량해 주십시오. 대협의 후의(厚意)는
가슴깊이 새기겠습니다."
강현괘는 식전부터 출발준비를 마치고 인사를 고하는 사군명을 붙잡으려 애썼
다.
어젯밤 안경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확인했지만 곳곳에 진을 치고 있는 흑
마방의 무리는 상상을 초월했다.
섶을 지고 불길로 뛰어들어도 유분수지, 무슨 수로 그들을 뚫는단 말인가.
해가 떨어지면 금진후가 이끄는 세가의 제자들이 나타날 텐데 굳이 떠나겠다
는 사군명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서약을 깨고 세가의 일을 발설할 수
도 없었다.
"지금 밖에는 온통 흑마방의 무리가 물결을 이루고 있으니 이대로 나간다면
생사를 장담 못하네."
급기야 반 협박에 가까운 말로 만류했음에도 사군명은 말 등에 올랐다.
"그리 염려해 주시는 정을 뿌리치고 떠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말고삐를 움켜쥔 사군명의 눈길이 설운교가 탄 마차에 머물렀다.
하룻밤만에 약속을 뒤집은 꼴이 됐지만 조용한 미소로 답하고 선선히 출발에
동의한 그녀의 속 깊은 신뢰가 더 없이 고맙고 소중하기만 한 것이다.
마침내, 망의장의 식솔이 대문을 열자 선두에선 사군명이 일행을 돌아보았다.
앞으로 닥칠 위험은 모르는 채 연신 땅을 파대며 투레질을 해대는 말들은 기
운이 넘쳐 보였고, 형형한 눈빛으로 전면을 쏘아보는 여섯 명의 사내들은 금
성철벽(金城鐵壁)이라도 뚫고 나갈 기세였다.
"험로가 될 겁니다. 별명이 없으면 무리하지 않게 속보로 진행할 것이고, 어
떤 경우에도 마차를 지키는 게 최우선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혹, 흩
어질 경우 약속한 장소로 집결하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프흐흐…… 높은 양반이 됐다고 선배들을 너무 무시하시는 구먼."
"걱정 말고 길이나 잘 잡아 주시오!"
어쩌면 오늘 안으로 이승과 저승으로 갈릴지도 모르는 사내들이 여유롭게 농
담을 던지는 모습이 더욱 가슴 뭉클한 사군명이 드디어 앞장서서 말을 달렸다
"좋습니다. 갑시다!"
수 없이 뿌려질 피를 씻어내기 위함인가.
당당하게 문을 나서는 그들의 머리 위로 먹구름이 몰려들어 하늘을 뒤덮었다.
첫댓글 즐감합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잘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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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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