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1596-1650)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제시했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고 그의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결정론을 부정했다. 한 마디로 중세의 종말을 천명했다. 그 이후 인간의 자율성을 구체화하는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현대사회에서 제 1의 도덕률은 해악금지(害惡禁止)다. 내가 좋다고 아무 짓이나 저질러 남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 개인의 행동은 그의 재량이지만 반드시 책임이 뒤따른다. 물론 미성년자는 예외다. 필자의 큰 아들이 아장아장 걸을 때 그 놈의 재롱에 모두들 즐거워했다. 어른들은 “품안에 있을 때 내 새끼지 두 발로 걸음마하면 내 자식이 아니다.”라며 웃으셨다.
제 멋대로 하는 사람이 지나치면 결국은 감옥에 간다. 그들은 의식주를 다 통제 받는다. 개인에게 자유를 주었으나 자치(自治)를 못하면 국가는 징벌을 내릴 수 있다. 구치소의 수감자는 그래도 관식(官食)을 거부하고 사식(私食)을 즐길 수 있다. 수감자에게도 최소한의 자유와 쾌락을 허용하는 셈이다.
개인들의 선호는 너무나 다양하다. 건강유지나 치료 방법의 선택 등에서도 그러하다. 의사의 직업윤리는 “환자의 자율성 존중”을 대단히 중시한다. 의사는 진단과 치료의 과정에 환자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한다. 그런데 정부는 자신이 정한 치료기준‘만’을 의사와 환자에게 강요한다. 모든 개인들을 다 만족시키는 게 불가능하다. 선택권이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국민건강보험(이하 ‘건보’)이 국민들의 건강관리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다.
일부 국민들은 소득에 따라 건강보험료를 매달 ‘누진’으로 낸다. 그들은 남을 돕기 위해, 사회통합을 위해 이미 선행(善行)을 한 것이다. 정부든 사회든 어떠한 명분으로도 그들의 선호를 제한할, 즉 불편이나 아픔을 참으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 복지의 확대를 강력히 주장한 대표적 윤리학자는 존 롤즈(1921-2002)다. 그마저도 “모든 사람은 전체 사회의 복지라는 명목으로도 유린될 수 없는 정의에 입각한 불가침성을 갖는다.”고 했다. 더 큰 선(善)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선 안 된다.
건보는 국민들의 건강관리에 대한 자신의 역할과 영역을 한정해야 한다. 일정한 범위 안에서, 즉 일반 국민의 ‘필수의료’ 혹은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 범위를 넘는 부분은 개인들인 의사와 환자가 해결할 사안이다. 양자가 타협을 보든 아니면 민간의료보험을 도입하여 삼자가 결정하면 된다.
일부에선 두 가지 이유로 반대한다. 우선 의사들의 배를 불려준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정당하게 세금내고 남는 돈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의사들도 이 나라의 국민이다. 과잉진료가 있다면 민간보험 회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의사들의 진료는 엄밀한 평가를 받게 된다.
그다음 이유는 평등의 원칙을 깬다는 것이다. 심지어 “돈 없는 사람은 다 죽으라는 얘기냐?”는 소리도 들린다. 대단한 비약이고 독선이다. 건보가 필수의료를 책임지는 한 걱정할 게 없다. 전 국민이 가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동일한 수명과 건강을 누리는 건 절대 가능하지 않다. 인간의 삶의 목표가 평등인지 되묻고 싶다.
관치금융, 특혜금융은 1997년 IMF 때 없어졌고 정부미(政府米) 장려는 빛바랜지 오래다. 관제언론은 단어조차 생소하다. 21세기 한국은 아직도 관치의료를 지속하고 있다. 우리는 복지나 의료보장이라는 철창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