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5.2.23) 말씀/ 역대상 17:16 자신에게 도달하는 여정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오랜 역사 속에 이어온 철학적 질문입니다. 분명 실존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하는데 진짜 나는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사는지?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대답하기는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문제는 70, 80, 90평생을 살아도 나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모르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를 모르면 악한 자는 악한대로, 게으른 자는 게으른 대로, 교만한 자는 교만한 대로, 자포 자기 하는 자는 패배자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허무하고 무가치하게 살다 죽게 됩니다. 니체는 이렇게 살다는 죽은 인생을 사람도 되어보지 못하고 죽는 종말형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하루 3/2시간 자기를 위해 투자하고, 겸손히 배우려 노력하고 더욱 발전하고, 성숙으로 가는 인생은 위버멘쉬 초인이라고 합니다. 그런 인생은 행복한 자가 되고,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인생으로 살 것인가? 각자가 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속에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과 다윗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초대 왕은 사울은 먼저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은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결과는 생판 다릅니다. 시작은 사울이 더 멋있게 출발하였습니다. 그는 기스의 아들로 택함 받았을 때 그 가 백성들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도 어깨 위만큼 컷다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이 모든 백성들에게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 할 이가 없느니라” 반면에 다윗의 경우는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중에 기름을 부으려고 찾아갔을 때 그는 후보 중에 끼지도 못했습니다. 일곱 아들 중에 막둥이로 형들의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아주 쬐쬐하고, 키도 작고 볼품이 없었습니다. 존재 가치가 없었습니다. 형네들 중에 없는듯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왕이면서도 늘 다윗을 시기하며 악신에 사로잡혀 살다가 길보아 산에서 스스로 칼에 엎드러져 아들과 함께 죽었습니다. 다윗은 점점 흥황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고,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는 약속까지 받아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목자요 왕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 사람은 자신을 잘 알고 한 사람은 자신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불순종의 죄를 책망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삼상 15:17) 그가 스스로 작게 여기고 겸손 할 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어떤 자인지 어떤 은혜를 입은 자인지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교만했고 하나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고, 충성된 부하 다윗을 계속 원수로 여기며 죽이려 하였습니다. 결국 비참하게 종말형 인생이되어 망했습니다.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잘 살고 못사는 기준이 남입니다. 남을 탓합니다. 남과 비교합니다. 남을 죽이고 자신이 오르려고 합니다. 자신의 철학이 없습니다. 정치 철학, 목회 철학이 없고 남의 것이나 비판합니다. 저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목회를 할 때는 비참했습니다. 남과 비교하고, 탓하고, 낙심하고 그런데 이런 자신에게 깊은 절망의 위기 순간이 왔을 때 오히려 나를 찾게 되는 축복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행복한 목회를하고 있습니다. 물론 행복이라고 해서 현실의 모든 조건들이 다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움고 힘든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니 모든 것이 감사이고 행복입니다. 저는 다윗의 삶을 보면서 그가 그렇게 하나님께 인정받고 훌륭한 목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자신을 알았기 때문이며 자신을 찾아가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이렇게 질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역대상 17:16)” 그는 인간적 조건을 볼 때 왕이 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겸손하며 감사했습니다. 그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왕이 되어 궁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할 때도 그는 자신의 양치는 목동 중에서 택함 받은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 언제나 겸손함으로 왕이 될 수 있었고, 그 아들 대대로 왕위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인줄 알면 우리는 스스로 낮은 자가 되고 교만할 수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출세하고 성공 한 후에 넘어집니까? 왜 부자가 되고 인생 실패자가 됩니까? 자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자인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이르러 소산을 먹고 풍족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자신들의 능력 때문 이었습니까? 구약 성경을 읽다가 보면 하나님께서 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지시켜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이끌어내 여호와, 노예의 삶에서 이끌어낸 여호와와 그 때 일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과일을 수학할 때 다 따지 ㅁㄹ고, 곡식을 추수 할 때 다 베지 말라고 합니다. 고아, 가난한 자들 과부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서 남겨두라고 합니다. 힘없는 사람들을 없신 여기며 학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 받은 자임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무정하게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근본 은혜를 받은 자임을 알고 은혜 베푸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알면 더욱 성숙한 사람으로 변하 될 수 있고, 베푸는 삶도 살 수 있게 됩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ㅇ직 기득권을 악용하여 남의 것마져 빼앗는 일을 합니다. 정치를 하고 목회를 해도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약자를 생각하거나 타인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세를 불려갑니다. 내란을 일으켜서라도 상대방을 죽이고 무력으로 세도 권세를 유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아는 사람은 내가 부족하고 약한자라는 것을 알기에 약자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왕이 되고 어떤 사명을 위한 직분을 얻었다 할지라도 먼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먼저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를 아는데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헤르만 헷세는 <데미안>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일생이란 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다. 자기를 찾아 길을 떠나는 여행이다! 지금 어떤 형태의 삶을 살던 종국에는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연금술사에도 나오는데 그만큼 사람들이 자기를 모른다는 것이면 자기를 찾는 것이 일생일대의 과제라는 것입니다. 다시 데미안 책을 일다보니 이런 글이 눈에 듸었습니다. < 깨달음이 날카로운 불꽃처럼 갑자기 나를 불태웠다. 각자에게 직분이 주어져 있지만...깨어난 인간에게는 단 한가지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자기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고, 그것이 어디로 향하든 자신만의 길을 계속 더듬어 나가는 것 말고는 달리 그 어떤 어떤 어떤 의무도 없다”> 참된 자신을 만나는 것이 태어난 이유이고 살아가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어떤 직분 어떤 사명도 주어진 것이 없다. 오직 자신을 만나는 것만이 의무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태에서부터 에레미아처럼 주의 종으로 사도로 또는 교사로 어떤 사람은 법과 장관, 의사, 예술가, 또느 농민으로 직분을 부여받으며 태어나지 않았나요? 이런 것은 외피적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만나지 않은 사람이 법관 ,장관 ,대통령, 교사, 목사노릇을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천직이라 한들 잘 감당해낼 수 있을까요? 어릴 때부터 엘리트 코스 밟고 남부러워하는 서울데 범대 의대 나오고, 판사 검사 대통령까지 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번히 보이지 않습니까? 약자를 등치고, 권력을 남용하고, 내란을 일으키고 백성들을 압박하지 않습니까? 또 정치 현장에서 설치며 분열을 획책하는 목회자들 극우세력을 선동하는 지도자들을 보십시오.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다 부름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이런 자들이 그 자리에서 속히 내려왔으면 좋겠습니다. 사울을 파면하듯이 결국 하나님이 파면하실 것입니다. 저는 목회 20년차 철저히 절망하고 무너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잘 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도 100명 1,000명 부흠을 목표로 남과 비교 경쟁하는 그런 외피적 목회를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나를 모르고 나를 만나지 않는 사람이 누구를 목회한다는 것입니까? 어불성설이지요. 다행이 모든 문제들이 남이 아니고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나를 찾는 데 더 관심을 갖게 되고, 나 자신에게로 궤도 수정을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모릅니다. 그렇다고 지금 나를 다 찾고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다 못 찻았습니다. 더 멋진 나를 더 온전한 나를 만나야 합니다. 이제는 함께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게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 목회 목표는 수가 아닙니다. 정 수를 정한다면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을 제대로 알고, 한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고, 한 사람을 제대로 성장시키는 목회가 나의 목회 철학입니다. 그런데 더 행복합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에게 도달 할 수 있겠습니까? 물음, 질문밖에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하였습니다. 알려면 질문이 필수입니다. 질문을 통해 자신을 바르게 아는 것이 자기에 도달하는 길입니다. 끊임 없이 질문을 해서 모른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합니다. 니체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시도와 물음! 그것이 나의모든 행로였다. 그리고 진정 그런 물음에 대답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나 자신을 아는 길이며 거기서 비로서 배움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조금 안다 생각하면 사람들은 더 이상 배우지 않습니다. 그것이 배우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몰라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는체 합니다. 그러나 게속 묻고 또 물어보면 모릅니다. 예수님도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엘리아, 선지자 등 나름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안다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 아는 것이 자기를 잘못된 지식으로 묶어좋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자꾸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사는 것이 정말 바르게 사는 것인지? 내가 지금 하는 것이 옳은지, 지금 최상의 삶을 사는 것인지? 의심도 해보고, 더 높은 차원, 더 나은 삶은 없는지? 계속 질문을 해야 합니다. 질문이 있어야 답이 나오게 되어 있고, 좋은 질문 속에 좋은 답이, 그런 질문 속에서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멈추면 보이는 것들>의 저자 혜민스님은 우리는 바삐 살며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만 거의 자신은 만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래? 저 나쁜 놈, 저 사람은 좀 괜찮네. 우리의 관심은 거의 밖으로 향해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자기 소외라는 문제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정작 내가 나를 데리고 살아가긴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서는 잘 하는 것같은데 안으로 들어오면 잘못한다는 것입니다. 좀 생각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혜민스님은 가끔은 고요함속에서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지라 그 시간을 나에게 선물 하라고 합니다. 고요함 속에 들어가면 자기를 만날 수 있나요? 아무래도 고요함속에 들어가면 고독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은 없고 자기 자신만 있게 되니 자기를 많이 생각하게 되고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과거에는 마음이 울적하면 함께 보낼 친구나 찾거나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내어 식사를 하자고 하였지만 지금은 책을 들고 바다로 나가서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갖습니다. 아무도 없고 파도 소리만 들리는 바다 이따금 바닷새들이 옹기종기 모여 고기를 잡는 모습을 보고 먼 바다 풍경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준비한 책을 읽고 또 큐티 답글이 올라오면 댓글을 달아주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제는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 모임을 참여하며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있는 5 분 거리에 조용한 바다가 있다는 것, 코 닿는 곳에 산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한 시간이면 멀리 떨어져 신안 섬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정말 꽃자리입니다. 왜 우리는 홀로 자신을 이렇게 만나야 합니까? 외롭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정말 좋습니다. 자신을 만나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고,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고, 자기에게 맞는 맞춤형 행복한 삶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남의 인생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차박도 유행하지 않습니까? 온갖 업체들이 너도나도 캠핑카를 만들어 팔고, 사람들은 거금들여서라도 카라반 사서 남들처럼 여행하는 것을 로망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캠핑카 차박이나 여행도 남 따라서 하면 쪽박 차고 후회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캠핑도 자기를 알고 자기 맞춤형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삶이 그렇습니다.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나를 알아야 내 삶을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나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질문 하나를 더 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 다음에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근본 나를 알고 만나려면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녀라는 것,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 알 때 안개 걷히듯이 인생의 비밀을 벗겨지게 되고, 구원의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영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육의 차원을 뛰어넘어 영적 존재인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육에 차원에서 영의 차원으로가는 것은 혈통 육정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내가 근본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근본 자신이 얼마나 숭고한 존재인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을 만남으로서 최고 가치의 존재인 자신도 만날 수 있게 되고, 비로로 성장 목표를 갖게 되고 발전 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사 49:5) 그러므로 우리는 제대로 나를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 잠언 1장 7절은 말 합니다. “7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어떤 것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알게 되면 모든 비밀이 풀리게 됩니다. 그 다음에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답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으면 저절로 자기를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안 보입니까? 대형 교회에 태극기 흔들며 반공 외치는 사람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기를 모르니 자신이 하는 일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유대인들 얼마나 아집과 교만이 철철 넘칩니까? 성경을 달달 암송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무지함으로 백성들이 흉악범을 살려주고 예수를 이단이라고 죽이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 제자들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야고보 요한이 하나는 우 편 하나는 좌 편에 앉게 해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를 모르니 자기가 무엇을 구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면 이제 시작입니다. 우리는 많이 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가슴으로 내려와 삶 속에 녹아서 실행되기 까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책도 읽고, 공부도 하며 배우며 실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비록 하나님을 믿고 알아도 이제 겨우 주님 만난 어린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까지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이제 겨우 광대한 우주 속에 한 점을 찍고 발견한 것입니다. 더 성숙하고 더 영향력 있고 더 많이 베풀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배우는 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이 누구신가? 끊임없이 질문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더 멋지고, 더 아름답고, 더 크게 영향을 끼치며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모습은 다 큰 모습이 아닙니다. 더 멋있게 자라야 합니다. 더 크게 성장해야 합니다. 더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더 세상과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삶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 날마다 더욱 성숙한 자기를 만나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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