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사 사우 영건 실지(祠宇營建實誌)
을미년(乙未一九五五) 3월 일
금성(錦城 나주)의 옛 군(郡)과 광산(光山)의 새로운 부(府)인 주(州)의 서쪽에 본량(本良坊) 동호리(東湖里)에 있는 대동사(大東祠)는 우리 시조이신 대승공(大丞公)을 제사하는 곳이다.
지난 영종조 정미년(1,727)에 특별히 묘소 아래에 사당(祠堂)을 세우라는 전교(傳敎)가 있었으니 제향(祭享)하고 사액(賜額)하는 성대한 은전(恩典)이 실로 성조(聖朝)의 충의와 도덕을 높이고 숭상하는데서 연유하였고 실로 사람의 공론에서 나온 것이다.
종친의 여러 집안들이 서로 물어 의견을 합하기 어려워서 미처 祠宇를 세우지 못하였는데 묘소가 문화현 구월산(文化縣九月山)에 있어서 천여 년 동안 수호하여 비록 들(野)의 노인과 초군목동(樵群牧童)이라도 그 묘를 가리키며 류릉(柳陵)이라고 하니 이 부근에 사당을 세우는 것이 당연 하였다.
☛ 서원등록( 1642년 ~ 1742년까지의 서원(書院) 및 사우(祀宇)에 관련된 제반 행정기록 문서를 편집하여 엮은 책으로 주무 관청인 예조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필사본이 전함 ) 의 기록에 의하면
(1) 1741년 7월 4일의 기록에 의하면 정미년 1727년 윤3월에 황해도 문화현에 대승 류차달과 문간공 류공권을 모시는 서원을 류이항이 주도로 하여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1741년 7월 4일) 서원등록 기록
문화현(文化縣):고려조 대승(大丞) 류차달(柳車達)의 사원은 정미년(丁未年) 1727년 윤3월에 창건하였는데, 문간공(文簡公) 류공권(柳公權)을 아울러 배향하였습니다. 그때의 감사는 이집(李潗)이고 현령은 이태익(李泰榏)이며, 그 일을 앞장서서 주도한 유생은 류이항(柳以恒)입니다.
2) 따라서 1727년 윤 3월부터 1741년 7월까지는 황해도 문화현에 대승 류차달과 문간공 류공권을 모시는 서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1741년 7월이후 바로 이 서원이 철폐 되었는지는 문헌상 확인이 안되고 조선시대 후기 광여지도(1750-1799년 제작 추정)에 문화현편 지도에 류대승사우(건물도 보임)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41년 7월이후에 존속하였다가 흥선대원군이 1871년 서원철폐령을 내리자 이때 훼철된 것으로 추정됨
☛ 일성록 1800년 3월 5일 기사를 보면 대승공 제사를 후손들이 모시고 있다는 기록이 있음
☛ 대동사 사우 영건 실지의 기록을 보면 정미년 1727년 영조가 대승 류차달등의 서원을 세우라는 전교가 있었다고 하였고 서원등록에는 1727년 류이항이 주도하여 대승 류차달과 문간공 류공권의 사원을 건립했다고 나오므로 서원 건립 시기는 두 기록 모두 동일하고 그 과정은 다소 차이가 있는 듯하다. 대동사 사우 영건 실지의 기록과 서원등록 기록을 종합해보면 1727년 영조의 전교에 의하여 류이항이 주도하여 황해도 문화현에 대승 류차달 및 문간공 류공권의 사우(서원)를 건립한 것으로 보여진다.
☛ 다만 대동사 사우 영건 실지를 보면 1727년 대승 류차달 및 문간공 류공권의 서원을 건립하지 못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서원등록 1741년 7월 4일 기록에 의하면 황해도 문화현에 건립한 것으로 보여지고 그 이후 조선후기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철폐되었는지는 문헌상 확인할 수 없고 다만 일성록에 의하면 대승 류차달의 제사는 후손들이 계속 모시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지난 甲戌年(一九三四)에 팔도(八道)의 여러 집안이 회의 하였는데 교통이 편리하다 하여 경성(京城) 부근인 시흥(始興)에 祠宇의 터를 정하였으나 결행하지 못하였고 또 의논하여 장단군(長湍郡)으로 고쳐 정하였으니 장단군은 개성(開城)의 부근이다. 대승공의 아들과 후손이 대대로 이곳에서 녹봉을 이어 받았고 대대로 묘를 쓴 곳이다. 그러므로 더욱 적합하다 하여 사우를 세울 것을 경영하고 공사를 시작 하였으나 시국이 변동하여 정성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우리 종친의 여러 집안이 한을 품어온 지가 오래였다.
☛ 대동사 사우 영건 실지를 보면 대승 류차달의 사우를 먼저 경기도 시흥에 터를 잡아 건립할려다가 결행하지 못하였고 또 의논하여 경기도 장단에 건립할려고 했으나 공사까지 시작하였으나 중간에 다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경기도 장단에 건립하려다가 중단한 이유가 "시국이 변동하여 정성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시국이 변동했다는 말은 일제의 탄압으로 보여진다.
족질(族姪)인 상열(庠烈)이 전일 왜놈들의 방해에 분개하여 여러 족인(族人)들과 합의해서 동호리에 터를 정하니 이곳은 사우를 창건할 때 발의한 곳이다.
불초인 나에게 찾아와 상의하기를 『사우 터를 비록 확정하였으나 구하기 어려운 것은 기둥과 들보의 재목이다』하였다. 내 비록 어둡고 어리석으나 선조를 사모하는 도리에 어찌 감히 범연(泛然)히 듣겠는가? 우리 선친께서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어루만져 길러서 이미 쓸 만한 재목에 이르렀으니 내 어김없이 스스로 분담하였고 경영하여 준공하는 일은 족질의 정성과 힘에 있었다.
다행히도 우리 종친이 합의하여 공사를 시작한지 몇 개월이 되지 않아 준공되어 당년 병술년(一九四六) 9월 19일에 예(禮)가 이루어져 大承公을 주벽(主壁)으로 삼고 아들과 손자 일곱명의 현인(賢人)을 배향하니 높고 낮은 분별이 분명하여 차례가 있고 강신(降神)하고 술잔을 올리는 예가 질서 정연하여 어김이 없다.
先祖의 정령(精靈)이 어찌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서 묵묵히 도우신 것이 아니겠는가? 평소 잊지 못하던 한(恨)의 덩어리가 이제야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추후에 유지하여 영원히 전하는 책임은 모두 본손(本孫)의 성의에 달려있고 사람들이 보호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바람(望)이 있는 것이다.
첫댓글 류대승사우 지도를 보았는데 사우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지만 류대승사우 지도 기록등을 족보 문헌편에 남기지 않았는지 생각하지만 요즘 유림이란 사람들 보면 함량 미달인 분이 있던데 조선중기 유림들이 과연 학문을 연구하였던 사람들인지 양반자손으로 유림 흉내를 내며 다녔는지? 그래서 대승사우 기록을 부실하게 관리했는지? 여려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