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 본가에 가면 저녁에 꼭 어머니와 함께 보는 TV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우리말 겨루기와 가요무대입니다. 우리말 겨루기를 보며 한글에 대한 무지를 조금이나마 보완하고, 가요무대를 보며 옛노래 속에 추억에 젖어 드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겨루기도 20년이 넘었지만, 가요무대는 ‘85년 11월 방송을 시작하여 지난주 1,870회까지, 40년여를 이어온 장수 프로그램입니다. 하지만, 경연프로그램을 보면서 젊은 가수들의 힘 있는 목소리, 고성에서의 안정감, 엄청난 연습량에 따른 가창력에 익숙해졌다 보니, 가요무대에 나오시는 원로 가수들의 노래에서 불안한 음정을 들으며 잠시 불편해지기도 했습니다. ’왜 이리 연습을 덜 하고 나오는 거야?‘라는 생각이 깊어질수록 ’그렇지는 않을 터인데. 하는 생각도 더 깊어졌습니다. 그런데 제 또래들, 그보다 연세 더 드신 이들의 요즘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해되는 부분이 큽니다. 이미 목소리가 갈라지고, 음정과 박자가 불안해져 예전의 명성을 잃은, 가수 뺨쳤던 친구들의 노래를 들으며 세월 한탄을 함께 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요무대에 나오신 원로 가수들, 설 자리가 많지 않았을 터이기에 연습할 시간도 많았고, 노력도 그만큼 많이 하셨을 거라 믿습니다. 세월이 따라주지 않는 걸 어쩌겠냐, 이해하는 마음 커집니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닌 것도 같습니다. ‘21년, 쟈니 리는 84세에 복면가왕의 가왕이 되어 3연속 왕좌를 지켰습니다. 그만큼 쟈니 리는 노력을 더 많이 하셨다는 얘기겠지요. 음정, 소리의 갈라짐, 이런 걸 떠나서, 원로 가수들께서 주시는 감성은 요즘의 노래 잘하는 대세 가수들도 따라갈 수 없음 또한 분명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어머니와 가요무대 본방 시청은 사수할 겁니다. 감정의 깊이는 가사에서도 느껴지지만, 연륜에서 묻어나는 감성의 전달력은 목소리, 호흡, 장단 조절에서 충분히 감정이입이 됩니다. 지난주에 조율 얘기를 했습니다만, 원로 가수님들, 출연 기회가 적더라도 자신을 위해 지속적으로 조율을 해 주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늙는다는 일이 서러운 일이 아닐 수 있음을 입증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 나이 이제 가을에 해당하는, 한국 남성 평균 수명의 2/3 이상을 살고 있습니다. 가을의 풍요로움, 성숙함 속에 제 삶도 한층 더 익어가길 소원하며 가을을 즐깁니다.
아흔 넘으신 어머니와 함께 하면 세상 모든 게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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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엔 김천치유의숲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그 멋진 공간을 한 시간 20분 거니는 동안 방문객은 함께 오신 가족 4명이 전부였습니다. 분명 국립 치유의숲인데, 이리 잘 조성해 두었는데, 아쉬움이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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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네(모셔 온 글)==============
늙는다는 것은 분명 서러운 일이다. 늙었지만 손끝에 일이 있으면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 쥐고 있던 일거리를 놓고 뒷방 구석으로 쓸쓸하게 밀려나는 현상을 ‘은퇴’라는 고급스런 낱말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뒤집어 보면 처절한 고독과 단절이 그 속에 숨어 있다. 그래서 은퇴는 더 서러운 것이다.
방콕(방안에 콕 처박혀 있는 상태)이란 단어가 은퇴자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다. 세간에서는 그들을 화백(화려한 백수), 불백(불쌍한 백수), 마포불백(마누라도 포기한 불쌍한 백수) 등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화백이든 불백이든 간에 마음 밑바닥으로 흐르는 깊은 강의 원류는 ‘눈물나도록 외롭다.’는 사실을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화백도 골프 가방을 메고 나설 때 화려할 뿐이지 그들도 집으로 돌아오면 심적 공황상태인 방콕을 면치 못한다. 집단에 소속되지 못하고 지속적인 노동의 즐거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제 진 태양은 오늘 다시 떠오르지만, 은퇴자들은 어제도 갈 곳 없었지만 오늘 역시 갈 곳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럴 때마다 다산 선생의 ‘독립’이란 시를 기억해 내곤 혼자 웃는다. '대지팡이 짚고 절간에나 노닐까 생각다가 그냥 두고 작은 배로 낚시터나 가볼까 생각하네. 아무리 생각해도 몸은 이미 늙었는데 작은 등불만 예전대로 책 더미에 비추네'.
곰곰 생각해 보면 방콕이 獨樂(독락)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닌가 생각된다. 영화나 책을 둘이 나란히 앉아서 본다고 두 사람이 함께 보는 것인가. 아니다. 나는 내 것을 보고 너는 네 것을 볼 뿐이다. 그래서 생애도 혼자서, 죽음도 홀로 맞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것들은 모두 홀로이다. 태양이 그렇고 하나님이 그러하다. 태양에 암수가 있고,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 가정해보면 알 것이다. 온리 원(only one)이란 고독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경주 안강의 자옥산 기슭으로 낙향한 회재 이언적 선생도 독락당을 짓고 인고의 7년 세월을 외로움과 함께 버텨냈다. 사무치도록 외로웠기 때문에 담을 헐어낸 자리에 살창을 끼워 계곡의 물소리를 눈으로 들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조선조 초의 학자 권근의 '독락당기'를 보면 홀로의 즐거움이 일목요연하다. '봄꽃과 가을 달을 보면 즐길만한 것이지만 꽃과 달이 나와 함께 즐겨주지 않네. 눈 덮인 소나무와 반가운 빗소리도 나와 함께 즐기지 못하니 독락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글과 시도 혼자 보는 것이며 술도 혼자 마시는 것이어서 독락이네….'
옛 선비들의 독락에는 다분히 풍류적인 즐거움이 서려 있지만 오늘의 백수들이 곧잘 읊조리는 '방콕'에는 궁상과 자탄이 한숨처럼 배어 있다. '강산과 풍월은 원래 주인이 없고 한가로운 사람이 바로 주인'이라고 했으니 홀로 독락을 못 즐길 양이면 풍월의 주인이라도 될 일이다. 풍월주인은 정년도 없고 은퇴도 없다. ‘문밖 나서니 갈 곳이 없네’란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구활(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