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두 돌 다되어가는 큰 녀석, 5개월에 접어든 둘째, 손자 둘을 보는 낙이 큽니다 요즘은. 아들 딸 키울 때는 업무에 바빠, 친구가 좋아 아이들에게 사랑을 충분히 주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자책의 마음도 가끔 들긴 합니다. 손자들에게 마음 가는 걸 비교해 보면 말입니다. 육아방식, 자세에 있어서도 많이 달라지고 차이가 적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손자들을 키우는 건 아들 며느리이니 그들의 방식을 지켜보기로 합니다. 우리와 다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잘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점 중 하나, 제가 애들 키울 때는 어지간하면 그냥 지나갔는데 요즘 아이들은 아주 작은 이상에도 병원을 찾더군요. 우리가 무지했을 수도, 애들이 민감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차치하고, 손자들이 건강하게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조부모의 즐거움, 기쁨, 행복이라는 건 당연지사지요. 더구나, 애들이 찾는 병원이 우리집 근처라, 김천서 준비하는 동안 제가 먼저 가서 예약함으로써 시간을 버는 데 도움을 주는 즐거움도 왕왕 있습니다.
콧물감기가 좀 오래 지속되어 최근 아이들이 자주 병원에 왔습니다. 얼마 전, 병원 예약만 해주고 출장 갔는데, 며느리로부터 문자가 왔더군요. 의사가 둘째 콧물을 빼는 데, 아이가 우니까 자기 동생을 괴롭힌다고 생각해서인지, 큰 놈이 의사선생님을 꼬집더라네요. 민망해서 얼굴이 빨개지더랍니다. 의사선생님께 미안한 마음도 저 또한 들었지만, 한 편으론 이 어린 나이에도 벌써 형제애를 느끼고, 행동하는구나 싶어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사촌 동생이 둘째를 꼬집는 것 보더니 말리면서 그 사촌을 밀치더란 얘기도 기억났습니다. 가족이란, 우애란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거나 눈살을 찌푸리게 해선 안 되겠지요. 나만의 세상이 아닌, 함께 사는 사회니까요. 손자들이 자라면서 그러함을 깨달아, ‘우리’도 소중하지만 ‘그들’과도 원활하게 소통하고, 나 자신만을 내세우지 않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길 바랄 따름입니다. 그건 매우 소중한 선택입니다. 시선 바꾸기입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자연은 언제나 자신의 위치에서 순리에 따라, 함께, 더불어 살고 있음을 새삼 떠올려봅니다. 추운, 얼어붙었던 겨울을 지나 만물이 생동하는 봄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반곡지에도 봄이 그득합니다. 눈이 상큼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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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에는 이미 복사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개인이 일군 메타세쿼이아숲길에서 ‘우리’, ‘함께’, ‘더불어’의 의미를 깊게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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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엔 울주군에서 벚꽃의 마지막 길을 영접했습니다. 내년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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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옥성면의 보호수를 돌아보았습니다. 나목에 이제 새순이 돋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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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우리의 몫이다(모셔 온 글)=======
알 수 없어서 불안한 사람도 있고, 알 수 없기 때문에 설렌다는 사람도 있다. 시선을 달리하면 똑같은 일도 아주 다른 일이 된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개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은 나를 먹여줘, 그러니까 그는 나의 신이야.'
고양이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은 나를 먹여줘, 그러니까 나는 그의 신이야.'"
퇴직을 앞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시간이 앞에 놓여 있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다른 한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최초의 시간을 맞이하는 설렘을 느낀다고 했다. 아이의 미래를 알 수 없어서 불안하다는 엄마가 있는가 하면,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아이가 무언가를 해낼 때마다 설렌다는 엄마도 있다. 가족 중의 한 사람이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나는 불행을 겪어도 어느 부모는 자녀를 물가에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어느 부모는 자녀에게 수영을 가르친다.
시선을 달리하면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것을 배우게 된다. 개와 고양이처럼 완전히 다른 결론에도 이를 수 있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김미라의 <삶이 내게 무엇을 묻더라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