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신흥사는 북구 깊숙히 자리 잡은 곳에 있어 찾아 가기란 먼 곳이다.
그곳에는 옛 법당 천정에 아름다운 그림과 조각이 있고 현 법당에는 삼존불이 있어 많은 문화유산 답사가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신흥사 올라가는 누각에는 정면에는 보이지 않지만 누각아래로 들어가서 뒤 돌아보면 신성루라는 편액이 있다.
그곳에는 신성루라는 글이 있고 그 옆에는 건륭22년 계 정축 5월일 이라는 글과 병마절도사 이상국근사라는 글이 2행
으로 있다.
여기서 謹寫라는 표현은 삼가 그리다 뜻인데 여기서는 글을 쓰다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상국의 풀이를 엉터리로 하여 임진왜란 때 인물로 글을 써 놓아서 볼 때마다 짜증이 난다.
제대로 연구도 하지 않고 이상국이 실존 인물처럼 글을 쓰고 있어 답답한 마음이 앞선다.
건륭22년은 1757년인데 그 당시의 병마절도사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相國은 이름이 아니고 아부성 별칭인데 그것도 모르고 신문에 기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인용하고
제대로 알고 글을 써야지..............
1757년의 이상국은 누굴일까 하는 것인데!!!
그 당시(1757년)의 병마절도사는 이은춘이다. 기록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승정원 일기
영조 31년 11월 14일 계미 25/28 기사 1755년 乾隆(淸/高宗) 20년南泰齊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규장각 원본
○ 以南泰齊·鄭壽崑爲同知, 趙載洪·卞誼和爲僉知, 鄭鐩爲同知, 張志恒爲兼司僕將, 洪鑑輔·任載大·韓聖周·黃暹·金南瑞·金宗爀爲五衛將, 李殷春爲慶尙左兵使
승정원 일기에는 전라좌수사에서 경상좌병사로 제수되고 그 다음의 좌병사는 최진형인데 1757년 4월28일에 제수 되었다.
그리고 5월이면 최진형이 제수 되고 오는 시간이 있기에 한달 정도 더 좌병사로 재임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관찰사는 문경새재에서 임무를 교대하지만 그 외 수령들은 임지에서 임무교대를 하기에 서울에서 오는 시간과 서류를 보고 하는 시간이 걸리기에 신성루 편액에 5月日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생각에는 임기를 마치고 가면서 신흥사에 들러 글을 남겼는지 아니면 관문성에 시찰중에 잠시 휴식을
하는 곳이 신흥사 이기에 신성루라는 편액을 남긴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相國은 아부성 별칭으로 수군 절도사는 수상국, 통제사는 통상국, 순찰사는 순상국으로 부르고 있어
신흥사 신성루 편액의 인물은 이상국은 이은춘 좌병사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자료 가지고 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임진왜란때 인물이라 말하고 이상국이 실존 인물처럼 글을 쓴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이제라도 제대로 알렸으면 하고 신성루 편액의 이상국은 이은춘 병마절도사가 쓴것으로 인식하기 바란다.
그리고 이은춘이 1757년 9월까지 재임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영조 33년 9월 20일 기유 16/29 기사 1757년 乾隆(淸/高宗) 22년擧動 등에 관한 義禁府의 草記
○ 朴昌潤, 以義禁府言啓曰, 今此迎勅擧動時, 大駕各差備都事九員, 王世子左右考喧都事二員, 本府入直都事一員, 合以十二員分差, 而都事鄭基祚, 慶尙前左兵使李殷春拿來事下去
위의 글을 풀이하면 좌병사 이은춘이 죄를 지어 잡아와서 벼슬을 낮추었다로 풀이하는데 下去는 낮추었다 보다는
벼슬을 내려 놓게 하였다로 풀이된다.
위의 기록을 보았을 때 이은춘 다음에 오는 최진형절도사가 어떠한 일로 바로 부임 하지 못하여 이은춘 병마사가
9월까지 재임 한것으로 생각된다.
위의 기록외에는 이은춘과 최진형의 기록이 미비하여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신흥사 이상국은 이은춘 병마사로
인식을 하여야 할 것이다.
벽라; 옥산
밀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이희득
첫댓글 아주 수준 높은 글입니다... 아무거도 모르면서 기고하는 사람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요?
뭐 그리 창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