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를 사봤습니다. 참 재미있군요. 조사결과 바이킹은 그린란드의 피오르드 해안에 있는 녹지대에서 약 450년 동안 목축과 농업을 하면서 버텼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전멸하고 이 공동체는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1. 환경파괴 바이킹들은 집을 짓고, 배를 만들고, 겨울을 날 뗄감으로 쓰기 위해서 나무를 베어야 했습니다. 또 목축을 위해 초지를 조성하려고 숲을 불태웠으며 가축들이 풀을 뜯고 짓밟아 숲의 재생이 더욱 늦어졌습니다. 결국 그린란드의 얼마 안되는 산림 자원을 고갈되었습니다. 이들은 시베리아 유목을 줍거나 멀리 떨어진 노르웨이에서 수입을 하거나, 아니면 먼 래브라도 해안까지 가서 목재를 얻어야 했습니다. 결국에는 땔나무까지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근처에 살던 이누잇 족은 얼음을 깍아 이글루를 만들었고, 바닷표범가죽으로 카약을 만들었으며, 땔감은 바다표범 기름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피할수 있었습니다.
2. 철의 부족 그린란드에는 철이 무척 부족했습니다. 심지어 유적지에서 철로된 장검이나 투구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단 두 개의 사슬갑옷 조각이 발견되었으며, 이나마 본래 하나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아마 유럽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심지어 철못조차 거의 발견되지 않고 아이슬란드의 연감에 의하면 그린란드 바이킹의 배는 나무못을 박고 고래수염으로 동여맨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린란드에도 철광석을 채취할수는 있었고 철괴를 수입할수도 있었지만… 나무가 너무나 부족해서 철을 가공하는데 필요한 숯을 만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철의 부족은 연장을 뼈와 돌로 대체하게 하여 노동의 효율을 떨어뜨렸습니다. 결정적으로… 먼 훗날 에스파냐 인들이 강철 검과 강철 갑옷으로 잉카 제국을 도륙했을 때와는 달리, 그린란드의 바이킹은 이웃의 이누잇족에 대해서 무장 면에서의 우월함을 조금도 가질수 없었습니다.
3. 식량 부족 에 물론 척박한 기후다보니 목축도 농사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린란드는…. 그린란드 바이킹은 맥주를 거의 먹지 못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게다가 그린란드는 아이슬란드나 스칸디나비아와는 달리… 왠지 물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하층민의 유골에서 해산물의 흔적이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때 해산물이 터부시 되었던 것 같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이누잇 족은 그린란드 바이킹에 비해 몇가지 우월함을 가질수 있었는데… 우선 이들은 카약을 사용해서 먼 바다로 나가 고래를 잡을수 있었습니다. 그린란드 바이킹은 겨우 얼음에 갇힌 고래를 주울수 있었을 뿐이지요. 육지에서도 이누잇 족에게는 개썰매가 있어서 그린란드 바이킹보다 훨씬 넓은 범위를 돌아다니며 사냥을 할수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린란드에 서식하는 반달바다표범을 사냥하는 치밀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바이킹은 이 기술을 습득하지 못했습니다.
4. 충돌 마지막으로 그린란드 바이킹과 이누잇 족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아마 교역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화적 차이도 컷고 왠지 감정적으로도 별로 안 맞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 군사적 이점도 생존 수단의 우월함도 가지지 못했던 그린란드 바이킹들은 이누잇 족과의 대결에서 이길수가 없었습니다. 1379년 그린란드의 동쪽 정착지에서 이누잇 족이 습격하여 18명의 남자가 죽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 정착지의 인구는 4000명을 넘지 않았고, 따라서 18명이 죽었다는 것은 총 성인 남자의 2%가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현대의 미국(총인구 2억 8천만명)에 옮겨 놓고 보면 126만명이 사망한 것이라는군요.(…)
5. 종말 에 그리고, 마침내 1400년대 초에 소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해안이 얼어붙어 유빙이 생겨서 그린란드와 노르웨이 간의 교역이 힘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노르웨이에도 흑사병이 돌아서 인구의 절반이 목숨을 잃고,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이 통합되면서 노르웨이의 위상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아랍의 방해로 무역로가 막혀서 인도의 코끼리 상아가 유럽에 공급되지 않게 된 탓에, 그린란드의 주요 수출품이 될수있었던 해마의 상아도… 십자군 원정 덕분에 다시 유럽에 코끼리 상아가 들어오게 되서 가치가 떨어졌습니다. 결국 그린란드와 유럽간의 교역은 중단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즉, 그린란드는 철과 목재, 그리고 기독교 문화의 공급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에 죽어간 사람들의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한 목장의 가장 위층에서 발견된 파편들은 기둥, 지붕목재, 문, 가구, 그릇, 십자가 등등이었습니다. 최후의 생존자가 죽어서 이렇게 소중한 것들 까지 놓아둘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발견된 동물의 뼈는 작은 야생 새와, 토끼의 발뼈, 갓 태어난 송아지와 새-끼양의 뼈…. 그리고 소의 발굽뼈…와 사냥개의 뼈. 최후의 생존자들은 다음해에 기를 새-끼가축과 다음해에 사냥을 할 사냥개까지 먹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파리조차 내한성을 지닌 것 밖에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즉, 땔감도 없었던 것입니다.
출처: (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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