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담 鄭湛 (? ~ 1592)】「어찌 장수가 일보 물러나 살기를 도모한단 말이냐?」
1583년 무과에 급제하여 신립장군 기병대의 돌격장으로서 니탕개의 난을 진압하였고 1592년 김제군수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나주판관 이복남, 해남현감 변응정, 의병장 황박 등을 부관 으로 하여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끄는 일본군에 맞서 전라도의 핵심 목 지점인 웅치를 방어하고자 웅치고개에 3차 방어선을 편성하였다. 강대한 적을 맞아 싸웠으며, 전라도 점령을 위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군의 정예 다수를 격멸하고 장렬히 전사하였다.(웅치 전투)
전투 이후 일본군은 그 충절에 경의를 표시하여 ‘조조선국충의간담(弔朝鮮國忠義肝膽)’ 라는 묘비를 세웠다. 이는 웅치전투에서 조선군의 모습이 지금껏 일본군이 상대해온 정돈되지 못하고 사기가 떨어진 군이 아닌 죽음을 불사한 관군과 민초들의 모습에 감복한 것이다. 전쟁 직후 전공을 크게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추후 그의 공적이 알려지며1690년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뒤에 병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영해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으며 순조 임금 당시 '장렬공'의 시호를 얻었다.
김제군수 정담의 웅치방어 전투는 관군과 민병으로 분리되어있던 조선의 군대가 체계적인 연합을 구축하여 전면에 나선 선지적 예시가 됨으로써 웅치, 이치 전투 이후에 발생한 여러 전투에서 민,관군이 연합을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웅치전투 진중 어록 : 웅치전투의 막바지 패색이 짙어진 시점에서 종사관 '이봉'이 철수를 권하자 "정녕코 적을 하나라도 더 죽이고 죽을 것이며, 살아서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본인이 물러남에 적의 기세를 높일 수는 없다. 갑옷에 이름을 써 놓았으니, 자식들이 시신은 찾아주겠지" 라 하며, 종사관 이봉과 더불어 최후의 순간까지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255-1에 정려가 있다. 1690년(숙종 16)에 정문(旌門)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마을 가운데에 목비(木碑)로 세웠다가, 1782년(정조 5) 마을 앞 길가에 석비(石碑)로 다시 세웠다. 뒤에 병조참판을 추증받았으며 영해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정담 [鄭湛]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임진왜란의 전 과정을 지켜보며 기록을 남겨놓았던 백사 이항복의 ‘백사집’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나의 장인 권율장군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내가 주도한 행주싸움의 功이 크다고 하나 사실은 전라도 웅치싸움을 주도한 정담이 가장 크고, 다음은 행주싸움이다. 그가 1000명도 안 되는 약한 군사를 데리고 10배가 넘는 대적을 맞아 잘 싸우다 죽었고, 그러므로 호남이 보전되었으니 어찌 그 공이 적다하겠는가!”』 [출처] 호남땅을 지켜낸 김제군수 정담장군
명고서원(明皐書院)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명고서원(明皐書院))] 1710년(숙종 3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담(鄭湛)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묘우(廟宇)인 향현사(鄕賢祠)와 강당인 명교당(明敎堂), 그리고 동재(東齋)·서재(西齋)·신문(神門)·주소(廚所) 등이 있었다.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영양 야성정씨 참판공 종택(英陽 野城鄭氏 參判公 宗宅)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77호 장열공 사당으로 지정되었다가, 2015년 12월 14일 영양 야성정씨 참판공 종택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곳에는 교지 7점과 장군의 공적을 적은 『충렬록』, 판각 85매와 『충렬록 전적』 2권 등의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으며, 후손들이 불천위 제사를 모시고 있다. 그의 후손들은 높은 관직이나 많은 자산을 가지지 못했으나, 국가를 위한 충신의 집안으로 남고자 자손을 귀하게 여기고, 국가에 충성하며, 다수의 중견직 군인(영관장교). 경찰, 공무원(3~5급)을 배출하고 있다.
"퇴각은 없다. 적 한 명을 죽이고 죽을지언정 어찌 장수가 일보 물러나 살기를 도모한단 말이냐"
불멸의 이순신에서 한산 대첩 직전 웅치 전투를 묘사할 때 등장했다. 배우는 전헌태. 작중 대사는 한 줄 뿐이지만 이 대사는 실제로 정담이 했던 말이다. 지형의 이점을 이용하여 분전했으나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전사했다. 작품 내적으로는 이 패배로 인해 이치를 지키는 권율과 한산도에서의 이순신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극적 긴장감을 이끌어 낸다.
첫댓글 "寧加殺一賊而死 不可退一步而生"(영가살일적이사 불가퇴일보이생)"
차라리 적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한 걸음 물러서서 삶을 구하지 않겠다." _정담 鄭湛장군
"내가 여기서 물러나 적의 기세를 높여줄 수는 없다.
내 갑옷 안쪽에 이름을 적어놓았으니, 나중에 자식들이 내 시신은 찾아주겠지"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적과 맞서 싸우다 순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