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응칠 朴應七 (1871 ~ 1907)】 " 을사오적 암살단, 권중현 저격"
충청북도 보은군(報恩郡) 출신이다. 1907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36세로, 1871년생으로 추정된다. 1907년 자신회(自新會)에 가담하여 을사오적 처단 의거에 참여하였다.
1907년 2월 나철(羅喆, 본명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이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기 위한 비밀결사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약 200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의거를 준비하였는데, 김동필(金東弼)·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정인국(鄭寅國)·김영채(金永采)·이광수(李光秀) 등과 함께 ‘을사오적 처단 의거’를 결의하였다.
이들은 거사 자금을 모집하여 김동필이 인천에서 권총 50정을 구입하고, 거사일을 1907년 2월 13일로 정하였다. 이 날은 (음)1월 1일로 문무백관(文武百官)이 하례 차 입궐하는 날이었다. 이때를 기회로 을사오적을 처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경계 강화로 지방에서 모집한 결사대원들이 서울로 집결하지 못하자 박대하가 거사일을 3월 25일로 연기하였다. 을사오적이 이동하는 길목에 분산, 매복하여 같은 시각에 동시다발로 곳곳에서 이들을 처단하고자 하였다.
이때 의거를 결행할 결사대원 30인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권중현을 처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1907년 3월 25일 이기(李沂)가 작성한 「자신회취지서(自新會趣旨書)」와 애국가(愛國歌), 동맹서(同盟書), 참간장(斬奸狀)과 무기를 휴대하고 서울 사동(寺洞) 길거리에서 매복 중 권중현이 나타나자 그를 저격하였다. 그러나 가벼운 부상만 입힌 채 적중하지 못하였고, 다른 곳에서도 실패하고 말았다.
의거가 실패하자 동지 최상오(崔相五)·황경오(黃景五) 등 20여 명과 함께 충남 금산군(錦山郡) 보광리(寶光里)와 두두리(斗頭里) 등지로 거점을 옮겨 총기와 거사 자금을 마련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 붙잡혔다. 1907년 7월 3일 평리원(平理院)에서 이른바 모살죄로 교수형을 받고 형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평리원, 1907. 7. 3)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