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셀때까지 고백하라고
아홉. 나 한번도 고백해 본적 없어
여덟. 왜 이렇게 빨리세?
일곱. .....
여섯. 왜 때려?
다섯. 알았어. 있잖아
넷. 네가 먼저 해봐
셋. 넌 고백 많이 해봤잖아
둘. 알았어
하나반. 화내지마 ..있잖아
하나. 사랑해
1927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기독교적 인간애와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사랑과 인생을 섬세한 언어로 형상화해 '사랑의 시인'으로 불리는 계관시인이다.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4년 후쿠오카[福岡] 규슈여고[九州女高]를 졸업했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예과를 수료하고,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를 졸업했다. 1991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대 초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강사를 거쳐 1955년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취임했으며, 1993년부터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2년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장(1984~), 한국여성문학인협회 회장(1986~), 대한민국예술원 회원(1990~), 방송문화진흥회 이사(2000~)로 활동하고 있다.
1950년 《연합신문》에 시 《성수(星宿)》 《잔상(殘像)》 등을 발표해 문단에 등단했다. 이어 1953년 첫시집 《목숨》을 출판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사랑의 그리움을 노래한 첫시집은 가톨릭 계율의 경건성과 참신한 정열의 표출이 조화를 잘 이룬 초기 대표시집으로 평가된다. 이후의 시집 《나아드의 향유》(1955) 《나무와 바람》(1958) 《정념의 기》(1960) 등으로 이어지면서 뜨거운 정열의 표출보다는 종교적 구원의 갈망이 더욱 심화되어 절제와 인내가 내면화된 가운데 자아를 성찰하는 모습이 형상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정감어린 세계를 그려낸 시집 《겨울 바다》(1967)를 비롯해 《설일(雪日)》(1971) 《사랑초서》(1974) 《동행》(1980) 《빛과 고요》(1983) 등 후기 시집으로 가면서 더욱 심화되어감을 알 수 있다. 특히 제8시집 《사랑초서》는 전편이 '사랑'을 주제로 다룬 연작시로 '사랑의 시인'으로 불리는 작가의 면모를 더욱 분명히 해준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인간의 영혼을 고양하는 사랑의 원초적인 힘을 종교적 시각에서 승화시켜 노래한 작가는 1950년대 등단 이후 현재까지 의욕적인 작품활동으로 30여 권이 넘는 시집을 발간했다. 삶의 근원이자 원동력인 '사랑'에 관한 지속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천착을 통해 생의 존재론적 탐구에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등의 뒤를 이어 1960년대 여류시인의 계보를 마련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1회 자유문인협회상(1958), 제2회 오월문예상(1963), 제7회 시인협회상(1974), 서울특별시문화상(1985),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88), 대한민국예술원상(1996) 등을 수상했으며, 국민훈장 모란장(1993)과 은관문화훈장(1998) 등을 받았다.
저서에 시집 《목숨》 《나아드의 향유》 《나무와 바람》 《정념의 기》 《풍림의 음악》(1963) 《겨울 바다》 《설일》 《사랑초서》 《동행》 《빛과 고요》 《바람세례》(1988) 《평안을 위하여》(1995) 《희망학습》(1998) 등이 있고, 수필집 《잠시 그리고 영원히》(1963) 《시간의 은모래》(1965) 《달과 해 사이》(1967) 《그래도 못다한 말》(1968) 《여럿이서 혼자서》(1971) 《은총과 고독의 이야기》(1975) 《사랑의 말》(1985) 《끝나는 고통, 끝이 없는 사랑》(1990) 《사랑 후에 남은 사랑》(1999) 등이 있다. 이 밖에 꽁트집 《아름다운 사람들》과 일역시집 및 다수의 시선집이 있다.
[2002년] ‘개구리소년’ 유골, 대구 와룡산서 발견
지난 1991년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며 마을 뒷산으로 놀러갔다 실종됐던 ‘개구리 소년’ 5명의 유골과 신발 등 유류품이 실종 11년만인 9월 26일 오전 11시 30분쯤 발견됐다.
유골이 발견된 곳은 ‘개구리소년’들이 놀러갔던 와룡산 서남쪽 계곡으로부터 2.5km 지점으로 이들이 살았던 달서구 이곡동 집과 다녔던 성서초등학교로부터는 3.5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경찰은 당초 산 속에서 길을 잃은 소년들이 저체온(低體溫)으로 자연사했을 것으로 추정했으나, 추가 발굴 과정에서 총탄과 소매가 매듭지어진 옷가지 등이 발견되고 유골의 두개골에서 함몰흔적과 구멍 등이 발견됨에 따라 타살 가능성에도 비중을 두고 조사했다. 유골 복원과정에서도 상당수의 치아와 머리카락 등이 발견되지 않아 소년들이 대구 와룡산의 발굴지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숨진 뒤 옮겨졌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유해 감식을 맡아온 경북대 법의학팀이 3명의 두개골에서 둔기로 맞은 수십 곳의 외상(外傷)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함으로써 타살로 가닥이 잡혀가는 듯했지만,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 터라 사건의 전말이 미궁으로 빠져들었다./조선
[1993년] 인공위성 우리별 2호 발사
1993년 9월 26일 오전 10시 45분(한국시간) 한국 국적의 2번째 인공위성인 우리별 2호가 아리안 로켓에 실려 발사되었다. 발사는 남아메리카 프랑스령 기아나에 있는 쿠루 우주 센터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별 2호는 과학실험용 소형 인공위성으로, 중량 50㎏, 크기 35.2×35.6×67.0㎤이며, 지상 800㎞ 상공에서 적도와의 경사각 98.6°를 갖는 태양동기궤도를 돌도록 설계되었다. 차세대 소형위성을 위한 32비트 컴퓨터(KASCOM), 지상에서 송신한 정보를 저장했다가 지구상의 원하는 곳에 보내주는 축적 및 전송 통신실험장치(DSFCE), 해상도 2㎞의 컬러 전하결합소자(CCD)와 해상도 200m의 흑백 CCD를 갖춘 지구표면 촬영장치(CEIS), 여러 가지 정보를 음성으로 방송할 수 있는 고속 변복조 실험장치(DSPE), 우주환경을 관측하는 저에너지 입자 검출기(LEED), 적외선 영상 시스템 실험을 위한 적외선감지기 실험장치(IREX) 등 6개의 실험장비들이 탑재되어 있다. 우리별 2호는 우리별 1호 개발을 통해 습득된 기술을 바탕으로 순수 국내 연구진에 의해 개발되었다. 가능한 한 많은 국산부품을 사용한다는 원칙하에 탑재장치도 국내 개발제품을 사용했다. 우리별 2호 개발로 국내 소형위성 개발 관련 기술이 진일보했다./브리태니커
[1960년] 케네디ㆍ닉슨, TV토론
1960년 10월 21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케네디(오른쪽)의 주장을 닉슨이 듣고 있다.
1960년 9월26일. 미국 시카고 시간으로 밤 8시 반이 되자 미국인들이 속속 TV 앞으로 몰려들었다. 역사상 최초로 열린 대통령후보들의 TV토론을 보기 위해서였다. 시카고 CBS에서 열린 토론은 미국의 3대 TV와 라디오 전파를 타고 미 전역에 생중계됐다.
이날의 주인공은 민주당의 케네디 후보와 공화당의 닉슨 후보였다. 사람들은 닉슨의 승리를 낙관했다. 그는 8년간 부통령 후보로 얼굴이 많이 알려진데다 베테랑 정치인이었다. 그에 비하면 케네디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신인이었다.
그러나 막상 토론이 시작되자 사람들의 시선은 케네디로 집중됐다. 겨우 40대 후반이면서도 늙고 초췌해 보이는 닉슨과 달리 케네디는 구릿빛 건강한 얼굴에 젊음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더구나 케네디는 화면에 뚜렷하게 부각되는 짙은 색 양복을 입고 시청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자신에 찬 목소리로 유권자들을 설득해 나간데 반해 닉슨은 옆 얼굴 만 드러낸 채 “나 역시(me too)”만을 연발하고 있었다.
이날 라디오 청취자는 나름대로의 논리로 토론을 끌고간 닉슨에게 후한 점수를 매겼지만 TV는 논리보다 감성과 이미지를 요구하고 있었다. 닉슨은 그걸 몰랐던 것이다./조선
케네디는 총 11만 8,550표 차이로 공화당 대통령후보인 닉슨을 가까스로 누르고, 미국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도로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8년] 최병우(崔秉宇) 기자 순직
1924. 6. 20 전남 목포~1958. 9. 26 타이완 진먼[金門]
교동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수석합격했으며 1942년 일본 시코쿠[四國] 고지 고등학교[高知高等學校]에 입학했다. 1944년 도호쿠제국대학[東北帝國大學] 법문학부 법학과에 입학했다. 1945년 6월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8·15해방 후 9월에 귀국했다. 이후 미군정청 외무처 동경공관의 섭외담당관을 지냈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는 주일대표부에서 근무했다. 도쿄[東京]에서 알게 된 장기영이 1952년 한국은행 부총재직을 사임하고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하면서 외신부장에 기용되었다. 종군기자를 자원, 일선 종군과 판문점 휴전회담 등을 취재했다. 1954년 3월 장기영이 〈한국일보〉를 창간하자 한국일보사 초대 외신부장이 되었고 1955년 한국일보 편집부국장이 되었다. 1956년 6월 〈코리아 타임스〉 편집국장에 취임했고 관훈 클럽과 신문편집인협회의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58년 5월 인도네시아 내전을 취재했으며, 같은 해 9월 타이완 해협의 중공포격전을 취재하는 도중 진먼 섬에서 지프 사고로 부상당했다. 26일 부상한 몸으로 진먼 섬에 다시 상륙하려다 조난되었다. 이후 그의 업적과 순직을 기려 〈신문기자 최병우〉가 출간되었고, 최병우 기념도서관이 건립되었다.
[1950년] 국군, 서울 탈환
미국 제1해병사단과 제7사단으로 이루어진 제10군단 및 5000명에 달하는 한국해병대가 9월 15일 새벽 인천 월미도(月尾島)에 기습상륙, 다음날 인천을 탈환하였다. 미국 해병대와 한국군은 서울탈환을 위하여 동진하였고, 미국 제7사단은 남진하여 북상하는 유엔군과 오산에서 합류함으로써 북한군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중부 및 동부산악지대로 패주하였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은 26일 서울로 진입하여, 28일에는 빼앗긴 지 3개월 만에 서울을 수복하였으며, 동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계속 북상하였다. 30일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는 북한군총사령관 김일성에게 <더 이상의 유혈과 파괴를 없애기 위해 적대행위를 중지하라>는 항복권고문을 보냈으나 김일성은 이를 거부하고, 단지 남한지역에 있는 북한군의 전면 퇴각만을 명령하였다. 따라서 같은 날 유엔군사령부는 전장병에게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것을 명령하였다.
[1940년] 발터 벤야민, 망명 실패로 자살
← 독일의 문학비평가 발터 벤야민
히틀러의 유태인 억압정책때문에 미국으로 망명을 결심한 발터 벤야민이 1940년 9월 26일 모르핀을 먹고 자살했다. 벤야민은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가장 중요한 독일의 문학비평가로 꼽힌다. 부유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브라이스가우에 있는 프라이부르크·뮌헨·베른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23년에는 교수 자격 취득 논문으로 ‘독일 비극의 기원’을 제출했으나 당시 프랑크푸르트 대학은 보수적 학풍을 이유로 벤야민의 논문을 거절했다. 논문 심사에서 거절당한 벤야민은 교수를 단념하고 문필 생활로 들어갔다. 벤야민의 저술은 대체로 체계적인 긴 논문이라기보다는 짧은 형식의 글들이 많다. 이는 그가 생계를 위한 글쓰기를 했음을 알려준다.
히틀러의 광기가 유럽 전역을 물들이면서 당시 48세였던 벤야민은 미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한다. 그러나 마르크시즘 연구자라 해서 출국 비자가 발급되지 않자 피레네 산을 넘어 스페인으로 향했다. 1940년 9월 26일 저녁, 국경에 도착한 후 입국 허가증을 받기 위해 출두하지만, 스페인 경찰로부터 프랑스 강제송환을 통보받는다. 결국 밤 10시 벤야민은 다량의 모르핀을 삼켜 자살했다. 유태인이라는 사실이 그의 일생에서 지고 가는 사상적 짐이 된 것이다./조선
[1937년] 미국 흑인 블루스의 여왕 베시 스미스 (Smith, Bessie) 사망
←스미스
1898(?또는 1894). 4. 15 미국 테네시 채터누가~1937. 9. 26 미시시피 클라크스데일.
미국의 여류 흑인 블루스가수. 테네시주 채터누거 출생. 소녀시절 이름난 블루스가수 마 레이니(Ma Rainey)에게 사사하였다.
수년간 밤의 술집, 조그만 극장 등에서 노래를 불러오다가 뒤에 컬럼비아레코드사의 대표이며 피아니스트 ·작곡가인 C.윌리엄스에게 발견되어 1923년 2월 처음으로 레코드취입을 하게 되었다.
그 뒤 10년간 160곡을 취입하였는데, 이는 재즈사상 귀중한 블루스보컬의 자료로 평가된다.
1920년대 중기에는 ‘블루스의 여왕(The Empress of the Blues)’으로 불렸으며, 풍부한 성량과 소박한 창법은 후진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37년 지방 순회 중 교통사고로 죽었다.
전체 미국 흑인세대의 희망과 좌절을 노래로 표현한 그녀는 대담하고 자신만만하여 마이크 사용을 경멸하였으며,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그녀의 당당한 체격과 미모는 《세인트루이스 블루스:St. Louis Blues》(1927)라는 영화에 담겨 있으나, 한때 그 리얼리즘 때문에 상영 금지되기도 하였으며, 현재 그 필름은 뉴욕근대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녀의 비참한 사고사는 E.앨비의 희곡 《베시 스미스의 죽음:The Death of Bessie Smith》(1960)의 주제이기도 하다. 1970년 이후 그녀의 레코드는 다시 각광을 받았다. /naver
[1908년] 소설가 김정한(金廷漢) 출생
1908. 9. 26 경남 동래~1996. 11. 28 부산.
아호는 요산(樂山). 일제강점기에는 반일운동을 했고, 해방 이후에는 통일과 반독재운동에 앞장섰다. 주로 핍박당하는 농촌현실을 주제로 한 소설을 썼다.
생애와 활동
아버지 기수(基壽)의 장남으로 태어나 향리에서 한문을 배웠다. 1928년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원보통학교 교원으로 있으면서 조선인교원동맹을 조직하려다가 검거되었다.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에서 공부했다. 1931년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펴낸 〈학지광〉 편집을 맡았고, 1932년 여름방학 때 귀국했다가 마침 일어난 양산농민봉기사건으로 검거되어 학업을 중단했다. 1933년 남해보통학교 교원으로 있으면서 농민문학에 뜻을 두었다. 1940년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경영하던 중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등 민족운동과 관련하여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해방직후 건국준비위원회에 관계했고, 1945년 〈민주신보〉 논설위원, 1947년 부산중학교 교사, 1949년 부산대학교 강사를 지냈으며, 1950년 부산대 문리대 조교수가 되었다. 1959년 〈부산일보〉 논설위원, 1960년 부산대 문리대 문학부장을 지내다가 1961년 5·16군사정변 때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1965년 복직되었으며, 1974년 정년퇴직 후 진보적 문학가들의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고문과 1987년 그 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초대 의장을 역임했다. 1941년 이후 25년간 절필했다가 59세 때인 1966년 〈모래톱 이야기〉로 문단에 복귀했으며, 이후로 20여 년간 수십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문학세계
동래고등보통학교 시절부터 습작하다가 1928년 〈동아일보〉에 시 〈어느 겨울날〉을 발표한 뒤, 유학시절 〈학지광〉 등에 시를 발표했다. 1936년 〈조선일보〉에 단편 〈사하촌〉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데뷔작이자 대표작인 〈사하촌〉에서는 일제강점기의 불합리한 토지소유관계로 인해 궁핍해진 농촌현실을 고발하고, 이에 항거하여 일어선 농민들을 그렸다.
8·15해방 후에도 여전히 토지를 둘러싸고 불합리한 관계가 지속되는 현실을 폭로한 〈모래톱 이야기〉(문학, 1966. 10), 낙동강 하류의 어느 농촌에 자리잡은 양반집안의 며느리인 가야부인을 중심으로 5대에 걸친 가족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수난과 저항의 역사를 전형적으로 보여준 〈수라도 修羅道〉(월간문학, 1969. 6) 등을 발표했다.
작품집으로 일제강점기에 발표했던 작품을 묶은 〈낙일홍〉(1956)과 1966년 문단복귀 이후의 작품을 묶은 〈인간단지〉(1971) 외에 문고판 〈수라도·인간단지〉(1973)·〈김정한소설선집〉(1974) 등이 있다. 그밖에 한 편뿐인 장편소설 〈삼별초〉(1977)와 자전적 에세이인 〈낙동강의 파수꾼〉(1978)을 펴냈다. 1969년 한국문학상, 197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받았으며, 1976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01년] 장로교 목사이자 신학자 김재준(金在俊) 목사 출생
1901 함북 경흥~1990 서울.
호는 장공(長空). 일본 아오야마[靑山]신학부를 졸업한 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구약학으로 학위를 받은 후 귀국하여 1933년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성서를 가르쳤다. 1935년 '아빙돈(Abingdon)단권성경주석(單券聖經註釋)사건'이 일어났을 때 송창근(宋昌根)·한경직(韓景職)과 함께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8·15해방 이전에는 정통주의 신학에 대해 비판을 하지는 않았다. 그가 한국신학계에서 자유주의 신학자로 부각된 것은 8·15해방 후 조선신학교를 세우면서부터이다. 즉 그는 1947년 성서비평에 입각하여 모세오경 저작 문제와 십계명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강의했다. 이러한 신학적 해석에 대해 당시의 보수적 학생들의 항의를 받게 되었고, 이 사건이 비화되어 1952년 장로교 총회에서 제명되었고, 1953년 기독교장로회가 별도로 분립되었다. 그는 이 교단에서 자유로운 신학 연구와 강의를 했으며 한국신학대학의 신학적 배경을 성립시켰다. 1970년대부터는 사회문제에 적극 관심을 보여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였다.
[1889년]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출생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유일하게 남은 가능성은 사유의 시작을 통해 신의 출현이나 몰락 속에서 신의 부재를 예비하는 것이다. 부재하는 신 앞에서 우리는 몰락한다. "
- 마르틴 하이데거,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1889년 9월 26일 태어남 / 1976년 5월 26일 죽음
하이데거는 20세기 실존주의의 대표자로 꼽히는 독일의 철학자이다. 하이데거는 독창적인 사상가이자 기술사회에 대한 비판가로서, 당대의 대표적인 존재론자였다. 그는 20대에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하인리히 리케르트, 후설과 함께 공부했다. 1927년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을 출간했으며, 이 책으로 인해 그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대표자로 분류되었다. <존재와 시간>은 매우 읽기 힘든 어려운 문체였지만 독일어권 나라들 외에 라틴계 나라들에서도 널리 읽혔으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와 시간>의 목표는 인간이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밝히는 데 있다. 이 책은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를 비롯한 여러 실존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하이데거는 1928년 후설이 은퇴하자 그 후임으로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정교수가 되었고 후에는 총장을 역임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유럽 대륙 문화계의 신세대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86년] 독립운동가 장소진(張韶鎭) 출생
1886. 9. 26 경기 화성~1924.
일명 봉래(鳳來).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차병한(車炳漢)·장제덕(張濟德)·차희식(車喜植)·이영검(李永劍)·이순모(李順模)·차인범(車仁範) 등과 경기도 화성군(지금의 화성시) 내 장안면·우정면에서 대규모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4월 3일 조암장터에서 2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선두에 서서 시위군중들을 지휘하여 장안면사무소를 파괴·소각했으며, 이어 군중이 1,000여 명으로 늘자 가까운 쌍봉산(雙峰山)으로 인솔하여 그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이때 일본경찰에 의해 사상자가 나자, 시위군중들은 다시 우정면사무소로 행진하여 서류를 불태우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군중들을 인솔하여 화수리주재소를 습격·소각했는데, 이때 순사부장 가와바타[川端豊太郞]가 시위군중에게 발포하고 도주하자, 차희식 등과 더불어 추격하여 돌로 쳐죽이고 일본헌병 2명에게도 중상을 입혔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2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과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24년 8월 병보석으로 출옥했으나 가료(加療)중 순국했다.
[1888년] 미국 태생의 영국 시인, 극작가, 문학비평가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 출생
미국의 미주리주(州) 세인트루이스 출생. 스미스 아카데미를 거쳐 1906년 하버드대학교에 들어가 철학을 전공하는 한편 프랑스문학을 공부하고 그 상징시(象徵詩)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 영향은 후에 그의 시작품에 나타나게 된다. 그 밖에도 17세기 영국의 형이상학시(形而上學詩)와 엘리자베스조(朝) 연극을 연구하였다. 하버드대학교 졸업 후 한때 프랑스의 소르본대학에 유학, 이어 1914년에 독일에 유학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영국에 피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연구하였으며, 1915년에 처음으로 지상(誌上)에 시를 발표하였다.
그후에도 계속 영국에 머물며 은행원으로 근무하는 한편 시작(詩作)에 몰두, 1917년에 처녀시집 《프루프록 및 그 밖의 관찰 Prufrock and Other Observation》을 냈고, 이어 1920년에는 처녀평론집 《성스러운 숲 The Sacred Wood》을 내놓아 새로운 문예평론의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명성을 높여 준 것은 1922년에 그가 편집·창간한 문화평론지 《크라이티어리언 Criterion》에 발표한 《황무지(荒蕪地) The Waste Land》(Dial상 수상)이다. 이 작품으로 종래의 미온적인 낭만주의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일부 보수적인 시인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20세기 시단(詩壇)의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927년 영국에 귀화하는 동시에 영국 국교(國敎)로 개종(改宗), 1928년에 강행된 평론집 《랜슬롯 앤드루스를 위하여 For Lancelot Andrewes》의 서문에서, '문학적으로는 고전주의자, 정치적으로는 왕정 지지자, 종교적으로는 영국 국교도'임을 선언하였다. 1932년 미국에 돌아가 하버드대학교 시학 교수 칭호를 받았으며, 그후에는 주로 런던에 거주하면서, 참신한 문예서적을 많이 간행하는 출판사 'Favour & Favour'의 중역이 되어 영국문단의 중진(重鎭)으로 활동하였고, 1948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초기의 시(詩)는 영국의 형이상학시와 프랑스 상징시에서 받은 영향이 짙으며, 현대문명의 퇴폐상을 그리면서 그 배경으로 신화의 세계를 엿보게 한다.
《황무지》 이후 1930년에 간행된 시집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에서는 종교적 색채가 한층 더 짙어졌으며, 그의 시인으로서의 정점(頂點)은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쓰기 시작하여 전후(戰後)에 완성한 《4개의 4중주(四重奏) Four Quartets》(1944)에서 볼 수 있다. 그는 또한 시극(詩劇)에 관심을 가져, 《바위 The Rock》(1934), 《성당의 살인 Murder in the Catheadral》(1935) 《가족의 재회 The Family Reunion》(1939), 《칵테일파티 The Cocktail Party》(1949) 등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 동안 간행된 여러 권의 평론집이 1932년과 1951년에 각각 《평론선집》으로서 정리·간행되었다. 한편, 그는 문예비평에서 점차 문명비평(文明批評)으로 옮겨가서 《시의 효용(效用)과 비평의 효용 The Use of Poetry and the Use of Criticism》(1933), 《이신(異神)을 찾아서 After Strange Gods》(1934), 《고금 평론집 Essays Ancient and Modern》(1936), 《문화의 정의에 대한 노트 Notes towards the Definition of Culture》(1948) 등을 발표하였다.
[1856년] 독립운동가 임치정(林蚩正) 출생
1856. 9. 26 평남 용강~1932. 1. 9.
호는 춘곡(春谷). 아버지는 이조판서 국노(國老)이다.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한인자치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 간사로 일했다. 1905년 11월 정재관(鄭在寬) 등과 함께 기관지 〈공립신문〉을 창간하여, 간부로 활약했다. 1906년 미국에서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의 부총무 겸 회계주임으로 일하면서 국권회복운동에 주력했다. 1907년 4월 안창호·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승훈(李昇薰) 등과 같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재정간사로 활동하다가, 1907년 이완용암살미수사건에 관련되어 체포되었다. 한일합병 후 그의 집에서 3차례에 걸쳐 신민회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 건설을 결의했다. 이때문에 1910년 안명근(安明根)의 군자금 모집사건이 일어나자,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 건설의 혐의로 양기탁 등과 다시 체포되었다. 출옥 후 독립군 근거지 건설에 주력하던 중 1911년 일제가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끝에 양기탁·이승훈·윤치호(尹致昊)·안태국(安泰國)·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105인사건의 6명의 주동자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14년 특사로 출옥한 후 진남포에서 광산사무소를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자들의 유가족을 돌보았다. 1919년 이승훈 등 기독교 인사들과 3·1운동을 계획하고, 평안도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조직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특히 노윤길(盧允吉)·김정민(金正民) 등과 함께 진남포의 만세시위를 주동했다. 1920년 1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 평안남도 진남포 참사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신문과 문서들을 비밀리에 배부, 선전했다. 1923년 4월 민족교육기관의 설립을 위해 전국적으로 조직된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49년] 조건반사 개념을 발전시킨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Ivan Petrovich Pavlov) 출생
1849년 9월 26일 랴잔에서 출생하였다. 1879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의학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육군 군의학교의 내과연구실에서 심장의 신경지배를 주로 연구하였다. 1884년부터 2년간 라이프치히대학교와 브레슬라우대학교에 유학하고 귀국한 후, 육군 군의학교에서 소화의 생리학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1890년 약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1891년 실험의학 연구소의 생리학 주임이 되었다. 여기서는 소화샘의 실험생리학적 연구를 15년간 계속하였다. 그는 외과수술을 장기로 하고 있었으므로, 가능한 정상상태로 동물실험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새로운 실험법을 창안해 냈다. 특히 소화에 관한 연구에서는 소위법(小胃法)·췌영구루법(膵永久瘻法)·위사양법(僞飼養法)을 고안하고, 소화액의 분비메커니즘을 실험적으로 밝혀 냈다. 특히 신경지배의 연구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 일련의 연구의 업적을 인정받아 1904년 노벨생리 ·의학상을 수상하였다. 이 소화샘을 연구하는 사이에, 침은 단지 음식을 먹거나 시큼한 것을 입에 넣었을 때에만 분비되는 것이 아니라, 실험용의 개가 주인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침을 분비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은 대뇌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통찰하였다. 그 후 실험적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대뇌의 고차적인 작용이 침을 분비시키는 것으로 보아 동물에 대해서도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건반사(條件反射)’로서 뇌의 작용에 대해서도 자연과학의 방법으로 연구할 수 있음을 제시해 준 것이다. 조건반사의 연구는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의 코르투시에 있는 파블로프생리학 연구소에서 30년간 계속되었으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주요저서에 《대뇌 양 반구의 작용에 관한 강의》(1927), 《조건반사학 강의》(1928), 《조건반사 연구의 20년》(1932) 등이 있다.
[1815년] 신성동맹 체결(러시아ㆍ오스트리아ㆍ프로이센)
← 신성동맹 체결을 제안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1815년 9월 26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파리에서 '신성동맹'을 체결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제안으로 국제평화와 질서유지를 그 목적으로 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먼저 프로이센 왕과 오스트리아 황제를 설득하여 조인에 참가시키고 터키를 제외한 유럽의 전(全)군주에게 가맹장을 보냈다. 터키 황제는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참가요청을 받지 않았다.
이 동맹의 골자는 '각국의 군주가 성서 말씀을 바탕으로 서로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며 서로 돕고, 자기 나라의 신민(臣民)에 대해서는 가부(家父)와 같이 동포애의 정신에 따라 이를 지도하며, 신앙 ·평화 및 정의를 옹호한다’는 내용의 지극히 관념적 · 비현실적인 것이었으나 알렉산드르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기 위하여 로마 교황, 그리고 영국 왕 이외의 모든 유럽의 군주가 이 동맹에 참가했다.
이렇게 이루어진 신성동맹은 1823년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간섭을 거부하는 '먼로선언'을 하고 그 전후로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이 공화제로 잇달아 독립하면서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한 뒤 그리스 독립을 둘러싼 각국의 이해 대립으로 1825년 전유럽적 체제로서의 동맹은 와해됐다./조선
그밖에
2005년 청계천문화관 오픈
2002년 세네갈 여객선 침몰로 740여명 사망·실종
2000년 심권호 시드니올림픽 레슬링에서 금메달 획득으로 올림픽 2체급 석권
1998년 제1회 방콕국제영화제서 장선우 감독의 `꽃잎`이 최고상 수상
1997년 인도네시아 항공 에어버스 A300-B4기 수마트라 추락. 234명 사망
1994년 선불카드 첫 선
1990년 이탈리아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 사망
1984년 영국-중공, 홍콩반환협정 가조인
1982년 스즈키 젠코 일본 수상, 북경 방문
1981년 등소평, 3차 국공합작 제의
1978년 국산 유도탄 시험발사 성공
1974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발족
1962년 알제리아의회, 아메드 벤 벨라를 초대수상으로 선출
1960년 전남매일신문 창간
1959년 보사부, 성병보균 조사결과 발표
1958년 버마, 쿠데타로 네윈장군 집권
1954년 일본 여객선 도야마루호가 쓰루가해협에서 침몰. 1천1백72명 사망
1953년 서독 재군비 선언
1952년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 사망
1949년 법원조직법 공포
1949년 동서독, 1억5천만달러의 통상협정 체결
1947년 소련, 한국에서의 미국-소련군 동시철수 제안
1936년 네덜란드, 프랑스, 스위스 금본위제 폐기
1930년 아르헨티나 우리부루 쿠데타
1910년 친일단체 일진회 해체
1907년 뉴질랜드, 독립해 영국자치령을 선언
1877년 독일의 수학자 그라스만 사망 - 벡터 미적분학 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