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디터김호정
관심
이번 주 김호정의 더 클래식은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앞뒤 재지 않고’ 나아가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거기에서 베토벤이 떠오릅니다. ‘청중석 밑에 폭탄을 설치해 뒀다’는 평을 들었던 18세기 피아니스트 베토벤과 2004년생 임윤찬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피아노를 전공한 김호정 기자의 설명을 음악과 함께 들어보시죠. 임윤찬이 숭배하는,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 피아니스트의 이야기와 연주도 만날 수 있습니다.
임윤찬 스타일② : 음표가 다를 때도 음악은 맞다
2004년생 피아니스트 임윤찬. 중앙포토
베토벤은 어떤 피아니스트였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작곡가 말고요, 피아노 연주자 베토벤 말입니다. 전설적 음악 평론가였던 해럴드 C 숀버그의 서술을 빌려봅니다. “베토벤의 연주가 압도적이었던 이유는 그의 연주가 바다와 같은 파동과 깊이를 표현했던 반면, 다른 음악가의 연주는 시냇물이 흐르는 것처럼 들려서였다.”
베토벤은 새로운 규칙, 즉 역동성과 아이디어를 제시했던 첫 피아니스트로 꼽힙니다. 모두가 섬세하고 부드러운 음악을 추구할 때, 원초적 힘과 폭발력을 내뿜었습니다.
임윤찬의 연주에서 피아니스트 베토벤이 떠오릅니다. 임윤찬은 음악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과감해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의 연주를 들으면 보통 시냇물이었던 부분이 바다가 되는 경험을 종종 합니다. 굽이치는 정도가 다르죠. 이번 회에는 임윤찬의 ‘저돌성’을 베토벤의 작품을 중심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사자보다 표범에 가깝다
2019년 통영에서 연주한 베토벤 협주곡 3번의 마지막 악장, 그중에서도 맨 끝부분입니다. 처음 이 연주를 접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일단 너무 빨랐거든요. 네, 물론 어느 피아니스트나 이 부분을 빠르게 칩니다. 악보를 볼까요. 여기에도 ‘빠르게 하라(Presto)’는 지시어가 쓰여 있죠. 속도 표시가 보입니다. 점사분음표 하나에 108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1분에 108번이니까 1초(60번)보다 1.8배 빠른 정도입니다. 베토벤의 제자였던 체르니는 ‘112’로 약간 더 빠른 속도를 권장해 놨네요.
베토벤 협주곡 3번 코다의 속도 표시.
이 지시에 가장 근접한 알프레드 브렌델의 연주를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박자기를 틀어 놓고 세어 보면 악보에 적힌 대로 108~112 정도입니다.
〈8분6초부터 재생되는지 확인해 보세요. 끝까지 들으시면 됩니다.〉
이번에는 임윤찬입니다. 15세의 임윤찬이 이 부분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겠습니다. 시작 속도부터 빠르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가속입니다. 빠르게 치는 것이 기량이라면, 가속은 스타일입니다. 임윤찬의 스타일은 틀을 벗어나는 데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음악을 휘몰아 가면서 거의 모든 마디마다 더 빨라집니다. 보통 피아니스트는 이 부분에서 하나의 패시지가 다른 패시지로 바뀔 때 (보통 두 마디나 네 마디 단위로) 속도를 당겨 잡거든요. 이야기마다 속도를 다르게 하는 건데요, 임윤찬은 같은 이야기 안에서도 한 어절마다 빨라지는 셈이죠.
〈33분27초부터〉
한 패시지마다 빨라지는 경우. 1보다 2가 빠르다.
임윤찬이 속도를 올리는 방식.
임윤찬의 속도는 결국 140 정도까지 올라갑니다. 맨 마지막 멜로디는 피아노 다음에 오케스트라가 똑같이 따라하는데, 어려워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으시죠? 이렇게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치고 나가는 바람에 오케스트라와 약간 어긋나기도 합니다. 다음 영상을 한번 보세요.
〈29분35초부터〉
29분40~43초에 목관악기와 조금씩 틀어지는 부분이 보이시나요? 딱딱 맞추려고 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입니다. 기술적으로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었던 거죠. 힘찬 엔진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음악요!
빠를수록 좋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속도가 무엇을 전달하느냐의 문제겠죠. 예를 들어 베토벤 협주곡 3번의 마지막 부분은 가장 베토벤다운 부분입니다. 단조(短調)로 시작했던 음악에서 검은 건반들이 확 걷어지면서, 밝은 승리로 나아가는 C장조(長調)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임윤찬의 앞뒤 재지 않는 ‘가속’은 승전보가 도착하는 베토벤 특유의 순간을 시원하게 앞당깁니다.
임윤찬의 불같은 베토벤 해석은 옛 피아니스트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매끄러움보다는 불안한 에너지가 느껴지지만, 개의치 않고 앞으로 전진해 나아갔던 피아니스트들 말입니다. 베토벤 협주곡에서는 1960년대의 레온 플라이셔가 그랬지요. 지휘자 조지 셸,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한 협주곡 3번의 맨 마지막 부분입니다. 임윤찬의 동영상과 같은 부분이니 비교해 보시길 바랍니다.
〈7분32초부터〉
플라이셔 역시 악보에 적힌 108 대신에 116 정도로 빠르게 시작해 결국 138~140 정도까지 올라갑니다. 음악평론가 테드 리비는 이 연주에 대해 “오케스트라를 사자처럼 휘어감고 있다”고 평했습니다. 그렇다면 임윤찬의 베토벤은 사자보다 더 빠르고 과감한 표범에 가깝지 않나요?
오류에 두려움이 없다
인터뷰해 보면 임윤찬은 표범보다 고양이에 가깝습니다. 적당한 단어를 고르느라 오래 생각하고, 그마저 빨리 내놓지 않죠. 그런데 피아노 앞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음 사이의 간격을 야생적 감각으로 조절하는 피아니스트가 바로 임윤찬입니다. 그리고 그 답이 틀릴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입니다.
베토벤 ‘영웅’ 변주곡의 13번째 변주인데 왼손은 왼쪽으로, 오른손은 오른쪽으로 아주 멀리 여러 번 오가야 하는 부분입니다. 2021년 임윤찬이 서울에서 독주회를 했는데 이 13번 변주에서 틀린 음을 꽤 자주 짚었습니다. 오른쪽과 왼쪽의 각 새끼손가락이 치는 음들이죠. 베토벤의 ‘영웅’ 주제를 담고 있는 꽤 중요한 음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개의치 않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음이 지저분하게 섞일 수도 있는 페달을 꾹 누른 채 별로 바꾸지 않습니다. 그냥 나아가는 겁니다.
〈11분48초부터〉
임윤찬의 연주에서 악보와 일치하지 않은 부분.(도돌이표 후 반복을 포함해서)
이 연주 뒤에 임윤찬에게 ‘한 번 더 치겠냐’고 물어 보면 그러자고 할지도 모릅니다. 꽤 폭탄 같은 연주였으니까요.
다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어보겠습니다. 언제나 정교한 연주자인 피에르 로랑 에이마르인데요, 뭔가 다르게 느껴지시죠? 네, 위험을 감수하는 대신 침착하고 고르게 음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틀린 음이 거의 없죠.
〈12분37초부터〉
‘위험 감수자’인 임윤찬이 만약 ‘절대 틀리지 말자’고 마음먹었다면 안전하게 그렇게 칠 수 있었을 겁니다. 가장 먼 지점의 음이 약간씩 늦게 나오도록 조절하면 됩니다. 새끼손가락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하고, 그때 건반을 누르면 되죠. 뭐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임윤찬의 음악이 아니겠죠. 그런 수많은 안 틀리는 연주 목록에 굳이 하나 더 보탤 필요는 없을 겁니다. 따라서 이런 음표의 오류들이 곧 음악의 오류는 아닙니다. 완성해 내놓은 음악에 의미가 있었으니까요.
‘좋은 연주’가 뭘까요. 저는 ‘머물지 않는 연주’라 봅니다. 정지해 있지 않아야 시간의 예술인 음악의 본질에 가까워지니까요. 임윤찬은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는 대표적 피아니스트입니다.
때로는 낯설게 보이기도 합니다. 2023년 1월 그가 영국 위그모어홀에 데뷔하자 가디언의 앤드루 클레멘츠는 “약간 덜 화려하고 더 시적이었어도 좋았겠다” “재능이 빛나지만, 깊어지고 성숙해질 여지가 있다”고 평했습니다.
이 리뷰를 읽으면서 또 한번 18세기 풍경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베토벤의 피아노 연주에 대해 일부는 낯설다고 했습니다.
“예전 스타일에 집착하던 음악가들은 아마 그의 연주가 거칠고 신경에 거슬린다고 여겼을 테지만 대부분의 음악가와 흥행사들, 특히 젊은 세대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메이너드 솔로몬)
지금 2024년엔 어떤가요? 젊은 세대는 왜 두려움 없는 피아니스트에 늘 열광하는 걸까요?
많은 전문가가 임윤찬을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연결시킵니다. 여기에서는 호로비츠 대신 베토벤을 다시 소환하려 합니다. 베토벤은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기에 앞서 유명한 피아니스트였고, 그중에서도 악보 없이 연주하는 탁월한 즉흥 연주자였습니다. 임윤찬은 기본적으로 즉흥 연주자의 기질이 있습니다.
지난 회에 설명했던 화음의 특성 외에도 속도를 당겨 잡거나 풀어놓고, 음표의 타이밍을 조절하는 방식도 그렇습니다.
체르니는 스승 베토벤의 즉흥 연주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어딘가 마법 같은 구석이 있었다.” 베토벤에 대한 숀버그의 비유가 이번 회의 임윤찬에 보다 가까울지도 모르겠네요. “이전 피아니스트들이 상냥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청중에게 구애를 펼쳤다면, 베토벤은 청중의 의자 밑에 폭탄(bombs)을 설치해 두었다.” 자꾸만 폭탄을 터뜨리는 임윤찬 역시 그저 ‘피아노를 완벽하게 잘 치는’ 피아니스트에 머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다음 회에는 지휘자 정명훈의 스타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일찍이 세계 톱 오케스트라 무대에 섰던 그는 어떤 지휘자일까요. 김호정의 더 클래식은 여러분이 궁금해질 즈음,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새로운 스토리도 다시 다룰 예정이랍니다!
임윤찬 인스타는 왜 이 사람의 이름일까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사진 홈페이지
대중 앞에 거의 나타나지 않고도 숭배의 대상이 된 피아니스트가 있다.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Vladimir Sofronitsky, 1901~61). 그는 소련(현 러시아) 밖에서는 거의 연주하지 않았다. 게다가 전쟁 중이었다. 1941년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도 소프로니츠키는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소련 바깥에서는 단 세 번(바르샤바·파리·포츠담) 공연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1915~97)는 소프로니츠키의 연주를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애썼다.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이런 열광적 숭배 분위기를 기록해 뒀다. 소프로니츠키의 음악원 졸업 연주회는 당시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객석이 부서질까 봐 걱정될 정도로 만원을 이뤘다. 그는 영하의 날씨에 손가락 없는 장갑을 끼고 청중 가득한 무대에 올랐다.
임윤찬의 인스타그램 아이디가 sofrolimsky다. 임윤찬을 보면서 많이 떠올렸던 호로비츠도, 젊은 연주자들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아르헤리치, 폴리니, 키신도 아니고 하필 이 베일에 싸인 러시아 낭만주의 피아니스트의 이름을 골라 중간에 자신의 이름 lim을 새기듯 넣었다.
소프로니츠키를 들을 땐 먼저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의 음악이 적당하다. 소프로니츠키가 연주하는 스크리아빈에는 정확한 정도의 관능미와 신비주의, 또 즉흥성이 있다. 그는 스크리아빈의 딸과 결혼했고, 스크리아빈의 거의 모든 작품을 연주했다. 스크리아빈은 쇼팽과 닮아 있다. 음악이 물처럼 흐른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에 20세기의 폭발력이 더해진다. 직관적 피아니스트가 스크리아빈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소프로니츠키는 그런 점에서 스크리아빈의 피아니스트였다. 임윤찬은 스크리아빈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을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연주했고, ‘시곡’과 소품도 종종 골라 든다.
소프로니츠키에 대해 남아 있는 평가와 기록은 임윤찬의 음악 취향을 짐작하게 한다. 소프로니츠키는 ‘청중이 없는 듯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였고, ‘뭔가가 관통하는 듯한’ 음악을 했으며, 공연이 아니고서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렸다. 무엇보다 ‘들으면 바로 알 수 있는’ 어디에도 없는 스타일이었다.
※중앙일보(주)는 본 콘텐트에 대한 저작권 등 일체의 권리를 보유하며, 본 콘텐트의 무단 전재를 금합니다.
임윤찬을 다룬 중앙일보 기사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