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 김만중 일가를 돌아보면 화려했던 조선시대의 명문거족 광산 김씨의 역사가 보인다. 증조부 사계 김장생으로부터 큰할아버지 신독재 김집, 할아버지 허주 김반, 둘째 아버지 창주 김익희, 형 서석 김만기, 조카 죽천 김진규, 중손 건암 김양택, 북헌 김춘택 등 셀 수 없을 정도의 인물들이 명멸했던 것이다. 또한 여인으로서는 형 김만기의 딸이자 김진규의 동생인 인경왕후(1661~1680)의 삶이 애잔하다. 1671년 열한 살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열네살의 나이로 숙종의 즉위와 함께 왕비에 진봉되어 두 딸을 낳았지만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다. 인경왕후 역시 1680년 10월 스무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어린 두 외손녀와 딸을 먼저 떠나 보낸 형 만기의 슬픔이야 어찌 형언할 수 있으랴만 김만중의 슬픔 역시 대단했으리라.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겠지만 인경왕후가 장수했더라면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는 없었을 것이고 장희빈마저 등장이 가능했을까. 분명 인경왕후의 죽음은 새로운 역사를 소용돌이치게 만든 단초를 제공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서포 가문의 가장 큰 영광은 한국 유교사상 전무후무하게 부자가 문묘에 배향된 일이다. 문묘에 배향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죽은 후에 공자묘에 들어가 영원토록 나라에서 올리는 제사인 제향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문묘에 배향된 우리나라 선현들의 수는 신라시대 설총 이후 모두 18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동국 18현으로 부른다. 동국 18현은 신라시대 설총, 최치원, 고려시대 안향, 정몽주, 조선시대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박세채를 말한다. 모두 유학의 한 분야를 집대성한 인물들이다. 이러한 문묘에 김만중의 증조부 사계 김장생과 큰할아버지 신독재 김집이 나란히 배향되었다는 것은 두 부자가 조선 유교의 예학을 집대성했기 때문이다. 예의 본질과 의의, 내용의 옳고 그름을 탐구하는 유학의 한 분야였던 예학은 조선 중기에 본격적으로 연구되었고 깁장생의 『가례집람家禮輯覽』을 통해 집대성되었다. 그 후 김집은 만년에 예학을 대성하였고 아버지와 더불어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당대 사회의 가장 큰 정신적인 지주였던 문묘에 한 집안에서 두 사람이 들어갔다는 사실 만으로도 김만중의 가문이 얼마나 학문을 숭상했는지를 나타내는 증표이다. 학문을 닦아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아치로 등용되는 것을 최상의 삶으로 여겼던 조선사회. 그 사회에서 선망의 대상은 지금도 그다지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높은 벼슬을 하는 사대부일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연안 이씨와 광산 김씨는 학문과 문장을 겸비하지 않고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사대부로서는 정승보다 더 명예롭게 생각했던 대제학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집안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광산 김씨 일가는 연안 이씨와 함께 ‘연이광김延李光金’으로 불렸다. 이것은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가문의 영광을 잣대로 드러내는 말이다. 김만중의 가문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수장이었던 대제학을 맨처음 지낸 인물은 큰아버지인 창주 김익희다. 병자호란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윈 형 김만기와 유복자로 태어난 김만중은 어머니의 교육을 받으면서도 학문에서는 큰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김익희의 뒤를 이어 그의 조카인 김만기, 김만중이 차례로 대제학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그 후 서석 김만기의 둘째아들인 죽천 김진규와 손자 건암 김양택이 대제학에 올랐다. 특히 김만기, 김진규, 김양택은 직계 3대에 걸쳐 대제학에 올라 당대 최고의 학덕이 있는 집안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그 후 100여 년을 내려와 조선후기 고종때에는 경대 김상현과 하정 김영수가 대제학에 올라 모두 7명의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을 배출하게 되었다. 문묘에 배향된 두 선대와 일곱 명의 대제학 출신말고도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지낸 할아버지 허주 김반, 형조, 공조, 호조판서를 지낸 조카 만구와 김진구와 그의 아들 척재 김보택은 물론 인현왕후 복위에 앞장선 북헌 김춘택 등이 바로 그들이다. 김춘택은 형 김만기의 손자로 『북헌집』이라는 문집을 남겨 김만중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또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김만중의 직계로는 의성현감 등을 지낸 아들 진화와 손자 용택, 광택, 경택이 있다. 특히 손자 고송헌 김용택은 김만중의 사위였던 이이명의 사위가 되어 그의 천거로 벼슬살이를 했다니 좀처럼 보기 드문 인연을 가졌다. 증손자로는 용택의 자손으로 대재, 원재, 회재가 있고 광택의 자손으로 민재, 간재, 헌재, 경택의 자손으로 세재가 있다. 김만중의 증손자 중 우계 김민재는 소론의 영잉군 세제 책봉 반대에 맞서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소론을 규탄하는 소를 올렸지만 실패하자 성균관을 물러나 학문에만 열중했다. 그는 후에 담양·제천 군수를 지냈다. 서포 김만중의 가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서인과 노론이 득세하던 시기인 조선 중기에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장새에서부터 김춘택에 이르는 6대 동안 광산 김씨 일족은 전성기를 누렸던 것이다. 권불 10년이라 했지만 그들은 1백년이 넘는 세월을 명멸하면서 한 세기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비단 정치가로써의 역할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학자로써 군림했기에 학통이 쇠진해지기까지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
4대 최고 문형 가문, 광산김씨 [문중평론방]의 "봉숭아 학당" 한국명문 (2004-10-22 오전 6:32:50) Hit : 135 Vote : 17
4대 최고 문형가문, 광산김씨 [문중평론방]의 "봉숭아 학당"
오늘은 모방송국에서 인기리에 진행되고 있는 코미디 프로 "봉숭아 학당"을 흉내내보고자 한다. 인간은 속 에 있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싶은 본능이 있다. 그러나 하고싶은 말을 다 못하고 사는 것이 인생살이다. 그래서 우리가 못할 말을 골라 하는 코미디 프로가 인기가 있다.
이 [문중평론방]도 주로 홈지기가 호객행위하는 잡놈 같이 남이 보거나 말거나 그저 지껄이고 있다. 이것 도 알고 보면 하고 싶은 말을 멋대로 하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 욕구에서 나온 것이다. 이 놈의 말들이 동네 복덕방이나 아파트 경로당의 잡담보다 조금 나은 수준일른지는 모르나 명색이 문중 연구라는 거창한 구호 를 내건 탓에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다. 홈지기가 속은 얕고 행동은 촐랑거려도 여기서만은 근엄해야 된다. 홈피 만들어 좀 아는체도 하고 멋대로 지껄여 스트레스나 풀려고 했는데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올가미"에 걸려 자다가도 일어나 미친듯이 지껄여야 굴러간다. 잠시라도 이 올가미를 벗는 길은 " 일일 봉숭아 학당 운영" 뿐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오늘은 파탈하고 멋대로 지껄이련다.
김장생과 김집이 누가 더 나은가? 분명히 둘이 우열이 있을 텐데 도무지 알길이 없다. 아둔한 내 머리로 는 사계가 더 나은것 같기도 하고 신독재가 더 나은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언제나 헷갈린다.
복사를 하면 원본보다 오히려 복사본이 더 선명할 때가 있어 어느 것이 원본인지 복사본인지 모를 때가 있다. 원본을 계속 복사해보고 복사본을 계속 복사해 보면 원본은 아무리 많이 복사해도 똑 같은데 복사본 은 계속 복사하면 나중에 흐릿하게 나온다. 원본의 우월성이 드러난다. 원본이 이처럼 우월하듯이 아비만 한 자식이 없고 형만한 동생이 없다. 이것이 세상의 순리다. 그렇다면 김장생이 김집보다 낫기 마련이다. 그 쉬운 원리를 두고 뭐 그리 부질없는 질문을 스스로 하는가?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아들이 아비보다 낫다든지 동생이 형보다 낫다고 하는 말을 종종 한다. 왜, 그런 가? 그 순리인가 뭔가 하는 게 엉터리란 말인가? 아니다. 그 순리는 맞는 말이다. 단지 세상일에는 예외가 있기 마련이다. [청출어남] 즉, "마디풀인 일년초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말이 있 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아버지가 형조참판을 지냈고 아들은 이조판서를 지냈으니 벼슬은 아들이 아버지보다 낫다. 그러나 이 곳은 벼슬을 따지는 곳이 아니라 인품이나 학덕을 논하는 곳이니 그것은 먹히지 않는다.
둘다 예학을 했으나 누가 더 학문이 깊은 지는 알길이 없다. 아버지가 예학을 시작하고 아들이 마감했으 니 그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부자가 똑같이 문묘에 배향되었으니 그 영광의 크기가 복사판처럼 똑같다. 김 장생의 제자가 송시열, 송준길....이었는데 김집의 제자도 송시열, 송준길....이니 이것도 피장파장이다. 김 장생이 만83세에 졸했으며, 김집도 만82세에 졸했다. 다 같이 천수를 누렸으니 이것도 피장부 아장부다. 문 묘에 배향된 아들을 둔 김장생이나 문묘에 배향된 아버지를 둔 김집이나 그 복이 그 복이니 이것도 장군이 야! 멍군이야!다.
박찬호와 박세리 둘 중 누가 더 나은가? 이것은 대답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주 어리석은 질문이다.각 자 다른 분야에서 각각 세계 정상에 선 두 선수의 우열을 어떻게 가를 수 있단 말인가? 태종과 세종대왕 둘 중 누가 더 나은가?"라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세종대왕이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선수라면 태종은 금메달리 스트의 코치 격이다. 금메달을 딴 선수도 세계1류 코치는 자동으로 될 수 없고 세계1류 코치도 손수 금메달 을 딸 수는 없다. 각기 제 분야에 세계 제1일 뿐이다. 이처럼 분야가 다른 두 사람이 똑같이 뛰어난 것은 우 열을 가르기가 불가능하다. 저 위에서 열거한 바대로 모든 면에서 똑같이 뛰어난 김장생과 김집 두 사람은 말해 뭐하겠는가?.
그런데 부자 문묘배향이란 사실은 둘다 똑 같은 영광 이상의 그 무엇이 분명 있는 느낌이다. 상신 판서나 대제학은 형제도 많이 했으며, 부자도 여럿이 했다. 부자 문묘 배향은 딱 한 번이다. 이것은 일어날 수 없 는 일이 일어 났다고 본다. 이것은 실수다. 유림의 노망이다. 아버지가 문묘에 배향되면 아들은 될 수 없는 것이 유교 사회의 기본 상식이다. 아버지가 되면 아들이 양보하고 아들이 되면 아버지가 양보하는 것이 기 본 예의다. 부자는 겸상도 하지 않는다. 벼슬이야 욕심 덩어리 세계이니 겹에 겹을 한들 어쩌랴만 문묘배 향이란 유림의 최고 원로에 왕관을 씌우는 작업이다. 어느 가문이든 문장이 하나며 원로도 하나다. 그런데 어찌 이런 망발이 생겼는가?
그 답은 오직 하나다. 이것은 아들 김집이 아버지 김장생보다 더 낫다는 말이 된다. 태양은 두 개가 있을 수 없다. 아버지 김장생이 낫다면 아들 김집은 문묘배향의 대상이 자동으로 안된다. 김장생 하나로 족한 것 이 둘로 된 것은 아들 김집의 뛰어남을 드러내고도 남는 일이다. 그런 뜻에서 되지 않았다면 이것은 분명 조선조 유림이 보인 사족의 표본이며, 조선양반 장식문화가 낳은 허영의 단면이거나 망령된 처사 탓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으로 [봉숭아 학당] 강설을 마친다.
아들의 위대성을 강조하다 보니 아버지한테 본의 아니게 불경한 언사가 됐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자 기보다 잘 낫다고 할 때가 기쁜 것이다. 이제 김집의 인생 역정을 간략하게 살펴 보기로 하자.
******김 집********
1574년에 태어나 1656년에 졸했다. 만8세에 조부 황강공[김계휘]이 별세했으니 그 때까지 그 엄하고도 인 자한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았다. 이어 송상현에게 글을 배웠으나 아버지 사계의 깊은 학문의 요람에서 행 운아로 성장했다.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고향 연산의 임천에서 줄곧 가학에 전심했다.
한때 동생이 무고를 당해 장래를 예측키 어렵게 되었다. 이에 대궐로 들어가 아우 반과 더불어 대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고[서제]가 진실로 망언을 하였으나 그 부형이 모두 어지므로 특별히 용서한다."고 하였 다.
부여현감, 임피현령 등을 거쳐 동부승지, 우부승지, 공조참판, 예조참판 등을 지냈다. 그러나 늘 아버지 가 계신 곳을 그리워하며 연산에 돌아가 아버지의 예학을 이어 받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아버지가 가 르치던 천하의 영재들을 대를 이어 가르치는 기쁨으로 충만했다.
벼슬을 버리곤 줄곧 귀향하니 그 덕을 사모하는 태학의 유생들이 벼슬에 머물도록 해달라고 임금에게 상 소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76세에 김상헌의 주청으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세 번 상소하고, 임금을 알현하여 사양하였으나 임 금이 허락지 않았다. 조선조의 상례가 서로 틀린 곳이 많아 생활에 불편이 많으므로 아버지가 찬한 [의례문 해]를 교정하는 등 저술활동을 펼치면서 주자의 논설을 상고하여 책한권을 만들어 임금에게 받쳤다.
"율곡의 석담 강학을 뿌리로 하고 사계의 순박하고 진실한 공적을 이어 받아 그 종통을 얻었다. 순수한 자질로 정도를 닦아 기호학파의 꽃을 만개시켰다.
"아름답다 선생이여! 오직 진실을 힘썼도다. 학문이 전일하고 행실이 돈독하며 효도하고 우애하였도다. 노년까지 어버이를 모시니 양세가 도학의 종장이 되었도다. 태산은 무너졌으나 동량은 남아있네 임금 앞 에 계책을 진달하니 순 임금과 우 임금이 주고 받던 일이로다. 성상이 보위에 올라 제일 먼저 불렀도다. 정 사도 묻고 학문도 물으니 어진 지혜를 아뢰었네 사람들이 선생이라 하니 참으로 의롭고 인하도다. 임금을 도와 이 나라 사람을 훈화하기를 모두 원했는데 향리에 돌아오니 선비들도 눈물을 머금고 탄식하네. 깊은 연못에 엷은 얼음을 밟은 듯 평생을 조심하며 예학 연찬을 늙어도 쉬지 않았네. 조예 법도가 깊고 험이 없 었도다. 어찌 백년을 살아 우리 후생을 일깨워 주지 않는고? 천호산 봉우리가 높이 솟았으니 억만년이 지나 도 길이 길이 그 영조가 남을 것일세."----- 문인 송시열이 찬한 신도비명에서-------
-------충남 연산에는 해가 셋이 있네. 하나는 하늘에 뜬 해고, 그 다음은 김장생의 해요, 다음다음은 김집 의 밤에 뜨는 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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