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을 쉬라.[歇卽菩提, 헐즉보리] / 지유 스님
歇卽菩提(헐즉보리) - 쉬는 것이 보리다.
많은 사람들이 화두에 대해서 굉장히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看하고 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화두공안이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조사의 어록을 보고
1700공안이라고 해서 어느 선사에게 화두를
타야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이런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임제 선사는 단도직입으로 무엇이 불법의
가장 확실한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如何是佛法的的大意>
그 질문에 황벽스님은 다짜고짜 방망이로 20방을 두들기고 갈겼습니다.
그러니까, 임제선사 입장에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두드려 맞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데 무엇인가?
황벽黃檗스님에게 방망이로 두들겨 맞은
임제선사는 대우스님을 찾아갔습니다.
대우大愚스님이 임제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어떻게 공부 지도를 받았는고?"
"제가 공부 지도를 받은 것은 없고, 여차 여차 세 번이나
불법의 대의를 물었는데, 대답은 없고 오직 세 번에 걸쳐
60방이나 얻어맞았습니다.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그 때 대우스님 다음 말 한마디로 그 생각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황벽 스님이 그토록 노파심을 내며
너를 위해 정말로 정성을 다해 가르쳤건만,
너는 다시 나에게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 묻는가?”
이 말에 홀연히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당시 납자들이 선지식을 찾아가
"무엇이 불법입니까?, 부처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은 것입니다.
그렇게 물으면 선사들은 사량분별을 초월한 답을 일러 주었습니다.
모든 사량분별을 초월한 답이 화두공안입니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생각을 낼 때, 이미 생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목적하고 있는 것은
생각을 일으키는 자리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불법이란 뭐냐, 도란 뭐냐, 道란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생각으로도 그려 낼 수 없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참구 하는 것은 이미 생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찾아오면 그 때 선사들은
친절하게 사량분별을 초월한 입장에서
"뜰 앞의 잣나무다. 庭前栢樹子",
혹은 "마른 똥 막대기 乾屎橛"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일러주는 사람하고 듣는 사람이 어째서 어긋나는 것일까요?
일러주는 사람은 망상妄想을 초월해서 일러 주는데,
듣는 사람은 머릿속의 지식으로 이리 꿰고 저리 맞추고
사량하고 있으면 소통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그런 상황이라도 정말 알고자 간절히 의심하고 의심해야 합니다.
송장처럼 멍하니 앉아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의심하다 보면, 그 답답한 심정일 때
누가 옆에서 손가락을 하나 튕긴다든지 하는 것을 보고
홀연히 깨닫게 된다는 것이지요.
서산 대사의 선가귀감에 보면,
"마음을 알지 못하고 공부한다는 것은
무명 망상만 도울 뿐이지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선 마음부터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마음 깨닫기가 절대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거꾸로 뒤집어 보면 그것처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허공의 끝을 찾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했지만 뒤집어 보면 이것처럼 쉬운 일이 없습니다.
깨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자리에 있었다. 이렇게 되면 계합되는 것입니다.
성불이 절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알면 바로 부처요, 한 생각 놓으면 그 자리가 불국토입니다.
마음이라는 생각 이전의 본래 자리입니다.
눈을 뜨고 가만히 목전을<물끄러미>바라보십시오.
아무 생각도 없을 때라야 비로소 바로 보입니다.
무심의 눈엔 산은 산, 물은 물, 자동차는 자동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두를 들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화두를 파고들지만 깨닫지를 못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생각을 들고 있는 한, 못 깨칩니다.
그것을 놔버리면 저절로 깨닫습니다.
무거운 짐을 든 탓에 팔이 아파 도저히 못 견디겠을 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짐을 내려놓으면 그만이에요.
놓으면 됩니다. 놓고 보면 본래 자리입니다.
출처 : 봉은사랑
출처 : 가장 행복한 공부